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488화 (488/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88화

와슈번 산맥 정상, 마왕의 고성.

본래 이곳은 군단장인 매그너스의 은거지이자 제5군단의 본진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그런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텅 비어 있는 빈 성이었다.

"이것 참."

빈 성을 둘러보고 있는 중년 남자.

어깨에 깃털망토를 두르고, 인상을 찌푸린 채 이마를 긁적거리는 그는 키젠 '까마귀' 소속의 네크로맨서였다.

"진작에 떠난 건가."

예상치 못한 상황.

매그너스의 성향을 아는 네크로맨서들은, 그가 성을 버린 채 도망쳤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깃털망토를 흔들며 주위를 탐색했다.

이곳은 고요하고, 깨끗했다. 물건들까지 싹 빼서 다른 곳으로 옮긴 모양이다. 남아 있는 건 주인 없이 비어 있는 왕좌. 그리고 이 유황냄새가 나는 온천 정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래층까지 모두 뒤져봐."

"예!"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단서를 뽑아내."

"알겠습니다!"

요원들이 잔상을 그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홀로 남은 까마귀 네크로맨서는 걸음을 옮겨 유황온천 앞까지 다가왔다.

허연 연기가 풀풀 날리고, 달걀 껍데기 썩은 냄새가 났다. 한쪽 무릎을 꿇고 손끝을 온천에 살짝 대보았다가 뗐다.

"기분 나쁜 취미로군."

그가 중얼거렸다.

"네, 네. 그쵸. 진짜 드럽게 기분 나쁘네요~"

뒤에서 저벅저벅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몰아붙이느라 들인 수고가 얼만데, 어떻게 알고 미리 도망친 건지 원."

마찬가지로 까마귀 망토를 걸친 청년이,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불량한 팔자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식물의 이파리처럼 괴기한 모양으로 뻗쳐 있었고, 입에는 길가에서 주운 이상한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다.

"왔나."

"다-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선배~"

그가 걸음을 멈추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까마귀 내에서 정보가 새고 있습니다."

"......."

"그 있잖아요. '마늘'? 아니, '바늘'의 네크로맨서였던가? 에반겔로스 선배도 매그너스와 내통하고 있던 추종자였잖아요. 그렇담, 까마귀 내에 스파이가 더 있을 수 있죠!"

이죽거리면서 걸어 다니던 그가 두 팔을 벌렸다.

"그 배신자 선배가, 매그너스랑 손잡고 학술회 중인 펜타모니엄을 조지려고 했다면서요? 그러다 붙잡히니까 뇌가 펑~ 캬캬캬!"

"......."

"아, 참! 미안합니다! 두 분 키젠 시절부터 동기셨지? 특례 3번이랑 2번 출신이라고 했던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임무에나 집중하게."

선배 네크로맨서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거, 딱딱하시긴! 여기 뒤져봐야 뭐 없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아~"

후배가 씹고 있던 나뭇가지를 강하게 한번 물었다.

까득!

까드득!

까득!

그러자 고성 곳곳에 이빨 자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단단한 벽돌에도, 기둥에도, 마치 베어 문 것처럼 무수한 이빨 자국이 무늬처럼 일어났다.

"아주 이가 갈리네요. 이가 갈려. 그 요상한 수를 쓰는 군단장 놈, 반드시 붙잡고 말 겁니다. 선배."

까드드드득!

벽에 긴 이빨 자국이 생겼다.

"그런데 혹시나, 혹시나 말입니다! 진짜로 까마귀 안에 스파이가 있고, 지금처럼 몰래몰래 매그너스에게 정보를 빼돌리는 거라면."

뚝.

그가 물고 있던 나뭇가지가 뚝 부러졌다. 그것을 퉤 하고 바닥에 뱉은 그가 싸늘하게 뇌까렸다.

"그 새끼 잡아서 살점 한 덩이 남기지 않고 잘근잘근 씹어 먹어줄 겁니다."

"작작해라."

선배가 눈을 번뜩이며 말하자, 후배는 어깨를 으쓱했다.

"예이, 예이. 연차 차이가 얼만데 깨갱 해드려야지."

등을 돌린 그는 또 괴상한 팔자걸음으로 걸어갔다.

"아~ 아~ 내 동기 바힐만 있었으면 이런 수사쯤은 뚝딱인데! 언제 복귀하는 거야? 평생 교수짓이나 하면서 애들 똥이나 닦아주려고? 같이 현장에서 놀자니까아!"

끼하하하하!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후배를 보며, 선배 네크로맨서는 한숨을 쉬었다.

'저 기수들은 왜 하나같이 나사가 빠진 건지.'

"보고드립니다!"

그때 네크로맨서 요원이 뛰어와 고개를 숙였다.

"지하층까지 쓱 훑어보고 왔는데 이렇다 할 단서는 없었습니다. 다만, 이거."

요원이 장갑을 낀 손으로 증거물을 내밀었다. 네크로맨서도 장갑을 끼고는 그것을 살펴보았다.

"머리카락이군."

흰 머리카락.

그것도 듬성듬성 잘린 흔적이 있었다.

"매그너스의 생김새는 분명 마른 체형에 백발. 그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이라고 했지. 앞으로의 도피생활을 위해 머리를 자른 건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매그너스의 본진을 접수한 것치고는, 큰 소득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혹시 '그들'에게 온 연락은?"

"없었습니다."

"......알겠다. 그 머리카락은 본부로 보내. 남은 인원은 지원병력이 오는 대로 비밀 통로 같은 게 있는지 철저하게 수사하도록."

"예!"

요원들이 제각기 흩어졌다.

까마귀 네크로맨서는 느릿하게 걸어가 벽에 난 이빨 자국을 손끝으로 훑었다.

* * *

드레스덴 왕립 도서관.

무려 '왕궁' 내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는 이 도서관은 대륙에서 이름난 명소였다.

드레스덴 왕국의 역대 왕들은 독서광으로 유명했고, 통치 기간 내내 값비싼 책들을 수집해 왔다.

왕국은 워낙 이 도서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이곳에서 보유하고 있는 사료가 펜타모니엄에 꿀리지 않는다고 주장하곤 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에는 진귀하고 중요한 자료가 많기에, 현재는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다.

바로 이곳에.

"세라. 좋은 아침."

"네."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정장을 쫙 차려입고 왕립 도서관에 출근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듯 경비병들과 마법 탐지기를 지나, 도서관에 들어왔다.

'우후후, 이 정도 탐지마법쯤이야 내겐 간단하지.'

슬쩍 선글라스를 코 아래로 내린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진홍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7군단의 대장, 에르제베트.

시몬의 명령으로 이곳에 잠입한 그녀는, 왕궁에서 일하는 사서의 인적사항과 스케쥴표를 빼돌려 휴가로 자리를 비운 직원인 척하고 있었다.

'우리 군단장님과의 데이트도 걸렸으니, 열심히 찾아볼까~'

그녀의 임무는 하나.

과거 리처드의 에이션트 언데드였던 '전염병의 마수 칼'. 그를 붙잡아 연구한 정체불명의 무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녀가 가진 것은, 그곳에서 건져낸 정체불명의 언어로 적힌 자료들뿐이다.

핵심은 언어.

왕립 도서관의 고서들을 뒤져서 이 정체불명의 글자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대륙의 역사는 길다. 지금처럼 대륙어로 통일되기 전에는 나라별로, 영지별로, 마을별로 수많은 언어들이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그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에르제베트는 사라진 언어에 관련된 책들을 가지고 와 구석에 자리 잡고는 쭉 펼쳐놓았다. 그리고 칼의 던전에서 가져온 책의 적힌 글자들과 비교했다.

'이것도 아니고, 요것도 아니고.'

그녀가 책을 열심히 뒤적거리고 있는 그때였다.

"세라!"

에르제베트가 변신한 '세라'의 상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자네 휴간데 여기 와서 뭐 해?"

에르제베트는 속으론 식겁했지만, 천연덕스럽게 맞장구쳤다.

"아, 뭐. 막상 집에 있으니까 할 게 없더라고요. 막 그런 거 있잖아요? 남들 다 일할 때 합법적으로 놀면서 딴짓하기! 그만큼 힐링이 되는 것도 없죠 뭐!"

"으으음, 그런가?"

상관이 벗겨진 머리를 긁적였다.

"자네 보기보다 괴짜 같은 면모도 있군. 난 휴가철엔 직장 쪽은 쳐다보기도 싫던데."

"직장은 쳐다보기 싫어도, 책은 사랑하니까요. 이 기회에 실컷 읽으려고요."

"그래, 맘대로 해."

그가 쓱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에르제베트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상관이 재차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참! 휴가 중에 진짜 진짜 미안한데. 이것 좀 봐주면 안 되남? 5분이면 되네. 딱 5분이면!"

그래, 처음부터 그게 본론이겠지.

에르제베트가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싫다고 했다가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인간들은 참 아등바등 힘들게 산다니까.'

이럴 줄 알고, 변신하기 전에 이 세라라는 여자의 업무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왔다.

에르제베트는 칼의 던전에서 가져온 책만 챙겨서 상관을 따라갔다.

"?"

그때 에르제베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왕립 도서관과 왕궁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왕궁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 중 이상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얼굴이 그늘로 덮여 보이지 않는 여자.

군단의 스파이로서 다양한 은신 기술을 애용하던 에르제베트는 알 수 있었다.

저건 상당히 고난도의 은신 기술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누구지? 저런 수상한 사람이 왜 왕궁에?'

"자네, 거기서 뭐 하나?"

상관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르제베트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웃는 표정을 꾸며냈다.

"네, 네, 갈게요!"

* * *

드레스덴 왕궁 내부, 은밀한 접대실.

얼굴에 그늘이 붙은 여자가 자리에 앉아 차를 한잔 마셨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노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연구는 잘되어가나?"

"그럭저럭."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얼굴에 가려진 그늘이 태양빛에 따라 좁아지거나 넓어지거나 했다.

"다만 최근엔 좀, 영지 내 날파리들이 외부인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서 귀찮네. 대영주에게 알려도 씨알도 안 먹히니까, 왕국이나 암흑연합 측에 직접 이야기하려는 것 같아."

"그 점은 내가 손써보겠네."

노년의 남자가 깍지를 꼈다.

"그보다 서신으로 보내면 될 걸, 굳이 직접 왕궁까지는 왜 왔나? 실험으로도 바쁜 줄 알았는데."

"어르신께서 안배해 둔 것 중 하나."

그녀가 손을 펼쳤다.

"이 왕궁에 있지?"

"그렇네."

"슬슬 준비해 두라는 어르신의 지시야. 나도 상태를 한번 보고 싶고."

노년의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게."

* * *

시몬은 키젠에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일반과목의 '제왕학'은 3학년들 사이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영지민들을 통솔하는 리더쉽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경영, 군사, 법학, 지리, 외교, 행정, 예절, 작법까지.

배울 게 산더미였다.

"시몬 폴렌티아 학생. 지금은 볼드윈이 아니라 드레스덴 왕국의 예법입니다. 포크의 위치가 어긋났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버지 리처드로부터 예법은 깍듯하게 배웠다고 자부한 시몬도, 막상 제왕학 수업을 들으니 또 배울 게 많았다.

교양과목치고는 상당히 빡센 편이었다.

그렇게 멘탈을 혹사당한 뒤, 오후에 제인의 칠흑역학 수업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시몬~"

"왔어?"

이제는 눈빛만 봐도 아는 학생회 멤버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 수업은 잘 아는 A반 학생들도 많았다. 주위에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제인의 수업이다. 수업내용도 두말할 것 없이 유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힐의 저주학은.

"시몬 폴렌티아 학생!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바힐은 시몬을 연단으로 불러들여서 계속 뭔가를 이것저것 시켰다. 시몬은 다른 학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진땀을 흘리며 저주 방정식을 써내려가야 했다.

다소 부담스러운 관심이었다.

"드레인 수식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군요!"

바힐은 심지어 시몬이 실수한 부분도 독창적이라며 칭찬을 늘어놓았고, 시몬이 생각지도 않았던 해석을 쏟아내기도 했다.

시몬은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서 와. 바힐의 남자, 시몬."

시몬이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딕이 킬킬거리며 놀렸다. 시몬이 그를 노려보았고, 카미바레즈와 메이린이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문제는 마지막 수업이었다.

바로 홍펭의 마투학.

오랜만에 하마에 매달려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자, 학쟁 여러분! 방학 내내 먹고 자고 놀고 하느라 여러분의 체력이 극도로 떨어진 게 보여 유감이에요!"

그녀가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생긋 웃었다.

"일단 체력부터 원래 주준으로 돌려놓도록 하겠어요!!"

이때 도망쳤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