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96화
연못 바닥의 진흙들이 올라와 허공에 덕지덕지 뭉쳐서 모이더니, 이내 얼굴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설마.'
그것도 사람이 아닌, 개의 머리다.
시몬은 바로 누군지 깨달았다.
'전염병의 마수, 칼!'
꾸드득-
진흙이 뭉친 개의 머리가 움직이며 시몬과 카쟌, 그리고 피어를 보았다.
흘러내리는 살 너머로 뼈 같은 게 보이는 게 언데드의 이미지는 확연히 남아 있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피어!]
심지어 말까지 했다.
[크하하하! 오랜만이군! 칼!]
진짜 칼이야?
이렇게 쉽게 찾았다고?
시몬이 황당한 표정으로 피어를 보았다.
[물론 진짜는 아니다, 소년! 그냥 분신일 뿐이지. 네가 달고 다니는 내 해골배지와 비슷한 종류다!]
시몬은 배지를 내려다보며 바로 이해했다.
[그런데 피어, 그 꼬맹이는 뭐지? 옛날처럼 인간 꼬마 하나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냐?]
피어가 끌끌 웃었다.
[리처드의 아들, 시몬 폴렌티아다. 현재는 그의 뒤를 이어 제7군단장이지!]
[그놈의 아들이라고?]
칼의 시선이 시몬에게로 향했다.
[그렇군, 그래! 그 리처드 놈과 똑같이 생겨먹었어! 인간의 '피'라는 건 정말 소름 끼치네! 놈의 기질이 진득하게 느껴져.]
칼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흠- 그래도 그 망아지가 자식 교육은 잘 시켰나 본데? 아들놈에게 껍데기가 있어. 아주 튼튼하고 견고한 껍데기야. 하지만 그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면 어떠려나? 리처드 놈과 같아지려나? 아니면-]
"미안하지만, 칼."
시몬이 빙긋 웃었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 우린 당신을 데리러 왔어. 본체의 절반은 확보했는데 나머지 절반은 어디 있지?"
[그야 나도 모르지!]
칼의 분신이 컹컹 웃었다. 정말로 개의 울음소리가 났다.
[내 기억 마지막에, 본체는 마차에 실려 '타라도스' 어딘가로 옮겨지는 중이었어! 본체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분신체들을 만들어 마차의 빈틈으로 탈출시켰지! 우리는 바닥을 기어 이동했고, 몸을 유지하기 위해 가까운 습지나 연못으로 숨었어. 이후 본체와의 연락이 끊긴 거야.]
칼이 고개를 움직여 시몬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계속 너희들이 오길 기다렸지! 본체는 분신들에게 '군단의 힘'을 가진 자가 가까이 오면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도록 했거든!]
시몬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칼의 본체는 타라도스에 있었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칼! 그렇다면 다른 분신들은 어디 있나?]
이번에는 피어가 물었다. 칼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본체는 물론, 분신들끼리도 소통이 안 되거든. 아마 다들 축축한 어딘가에 숨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겠지.]
[......흠.]
[어쨌거나 서둘러 피어! 놈들이 내 본체에 온갖 끔찍한 실험을 감행하고 있어! 이대로는 본체가 완전히 망가져서 손쓸 틈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그때 시몬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좋아, 칼. 대신에 한 가지 약속해 줘야 할 게 있어. 널 구해주면 너와 네 세력은 내가 이끄는 7군단에 들어와야만 해."
[어, 음!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 겠지?]
흐지부지 말을 흐린 칼의 분신이 눈알을 굴리는 게 보였다.
[그런 문제는 잠깐 제쳐놓고, 일단은 날 탈출시키는 게 먼저지 않겠어? 우리가 힘을 합쳐야만 그 나쁜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나와 손을 잡자!]
시몬이 등을 홱 돌렸다.
"키젠으로 돌아가죠. 피어, 카쟌."
[잠깐! 잠깐! 잠깐!]
칼의 분신이 다급하게 말했다.
[돌아가긴 뭘 돌아가! 날 구하러 왔다며!]
"정확히는, 당신을 다시 군단에 복귀시키려고 온 거야."
시몬이 고개만 돌려 그를 보았다.
"복귀를 거부한다면 우리도 굳이 그놈들과 싸울 필요가 없지."
순간 칼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 같으니! 내가 네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줬는지 알아? 네 아버지의 은인인 날 이렇게 방치하겠다고?]
카쟌은 말없이 지도를 펼쳤다.
"키젠으로 복귀하는 다음 텔레포트 마법진의 거리는 여기서 15분 거리다."
"네, 가죠."
[잠깐! 잠깐! 잠깐!]
칼이 혓바닥을 쭉 내밀며 헐떡이는 시늉을 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군단에 복귀하면 되잖아!]
"응. 교섭 성립."
시몬이 방긋 웃었다.
[크윽......!]
그리고 칼은 느꼈다.
시몬의 저 웃는 얼굴이, 잘살고 있는 남의 던전에 쳐들어와서 내 부하가 되라며 협박하던 리처드의 웃는 얼굴과 완벽히 겹쳐진다는 것을.
[하여간 인간 놈들의 탐욕은......!!]
시몬은 가볍게 무시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본체가 타라도스에 있는 것 외에, 더 아는 건 없어?"
[나는 일개 분신일 뿐이라 정확한 위치는 몰라. 그래도 본체의 존재를 느낄 수는 있지! 지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갇혀 있는 게 느껴지거든! 날 데려가. 본체의 위치가 가까워질수록 내 몸에서 반응이 올 거야.]
칼의 분신은 본체를 찾아주는 일종의 탐지기인 셈이었다.
"시몬, 이걸 쓰지."
카쟌은 가방에서 소켓 목걸이를 꺼내 시몬에게 건넸다. 칼의 분신은 그 소켓 안으로 가볍게 쏙 들어갔다.
[오! 여기 좋은데? 몸이 마를 일도 없고.]
목걸이가 시계추처럼 휙휙 흔들렸다.
[그럼 출발해! 빨리 내 본체를 찾으러 가달라고!]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해줘."
시몬은 소켓 뚜껑을 완전히 닫은 다음 자신의 목에 걸었다.
"고마워요. 이건 학교에서 돌려드릴게요. 카쟌."
"그래. 일단 마을부터 찾지."
* * *
같은 시간.
타라도스 근방의 늪지대.
[나는 칼의 분신! 군단의 힘을 가진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늪지대 바닥이 뭉치며 칼의 분신이 튀어나왔다. 시몬과 했던 이야기가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역시. 정보대로.]
늪지대에 등장한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
그의 이름은 알라제.
매그너스가 이끄는 제5군단 에이션트 언데드였다.
[본진이 점령당한 상황에도, 에이션트 언데드 수급. 매그너스 군단장. 파격적.]
그렇게 중얼거리는 알라제의 주위에는 호위병들이 서 있었는데,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쓴 언데드들이었다.
로브 사이로 보이는 몸에는 여러 색의 살갗들이 실로 꿰매 연결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타액을 줄줄 흘렀다. 두 동공은 마치 아이들이 낙서한 듯 새까만 회오리가 넘실거렸다.
칼의 분신은 에이션트 언데드 알라제보다도, 그 뒤의 언데드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질문.]
알라제가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협력 가능. 하지만 조건. 본체를 우리가 빼낼 경우. 매그너스의 5군단에 소속되어야 함.]
군단 소속이라는 말에, 칼의 분신은 진저리를 쳤다.
7군단이 해체되고 자유의 몸이 된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또 군단에 들어가야 한다니!
[그, 그건......!]
[그 외에는 협상의 여지 없음.]
알라제의 말대로, 지금의 경우 칼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게 몇 년 만의 군단의 힘을 가진 자란 말인가.
[......그래, 좋다. 그놈들에게서 날 빼주기만 한다면 말이야!]
알라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칼과 5군단, 계약성립. 방해되는 자. 모조리 없애겠음.]
* * *
자유의 보석, 타라도스.
이곳은 한때 고가의 광석 몬스터들이 출현하는 '금광던전'이란 곳으로 기적같은 번영을 누렸었다.
일확천금의 꿈에 부푼 수많은 모험가들과 트레져헌터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낮은 물론 밤늦게까지 영지 전역의 도시에 불이 켜졌다.
주민들은 외부인들을 차별 없이 환대했고, 모험가들은 지방, 국적, 종족을 가리지 않고 어깨동무를 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어울렸다. 종족과 국적을 초월한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었다.
억압받던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타라도스는 새로운 자유의 상징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금광던전 내의 광석 몬스터들의 씨가 마르면서 서서히 외부인들의 발걸음이 줄어들고, 새 영주가 타라도스에 오고 나서는 모든 게 달라졌다.
강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떠내려오고.
타라도스에 살던 사람들이 끔찍한 키메라로 변해 산맥을 넘어 이웃 영지의 농장을 습격하는 일도 있었다.
불길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이제는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런 타라도스의 이야기는 이곳, 이웃영지 '엡룬'에도 능히 알려져 있었다.
"타라도스로 가고 싶다고?"
두 사람은 무사히 근처 마을에 도착했다.
시몬과 카쟌의 요청에, 마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시몬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바로 가고 싶습니다."
"어휴! 젊은 친구들이 대낮부터 술이라도 마셨어? 지금 타라도스는 지옥이야!"
마부가 손을 휘저었다.
벌써 네 명째 거절이었다. 이미 거절한 마부들이 마차에 등을 기댄 채 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누가 타라도스를 가겠소?"
"자살을 할 거면 저어기 뒤쪽 유적지에 가면 맹독연못이 있는데, 거기서 하든가!"
"하하하!"
시몬은 마부들의 웃음소리를 가뿐히 흘려넘기며 물었다.
"타라도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그건...... 크흠."
마부가 헛기침을 하며 주위의 눈치를 슬슬 보았다.
"외부인에게 한가하게 늘어놓을 소린 아니지. 나도 밤에 맘 편히 눈 붙이고 싶다고."
그래도 택도 없다는 다른 마부들의 반응보다는, 이 사람이 그나마 상대는 해주는 느낌이라 괜찮았다.
시몬은 로브 안 주머니에서 돈이 든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꼴깍-
그것을 본 마부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지만, 이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천금 만금을 줘도 못 가! 아무리 돈이 좋아도 목숨이 더 중요해!"
"그 정도로 타라도스가 위험해요?"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데."
시몬은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 타라도스에 가려는 것 같은데요."
한 무리의 짐마차가 타라도스 방향으로 이동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들이 검을 빼 든 채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다.
"......조심해. 저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마."
마부가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걷거나, 창문을 닫고 있었다.
"누구길래요?"
"가네스 길드. 말이 길드지 그냥 도적 떼야. 타라도스를 본거지로 활동하는 놈들인데, 무척 위험한....... 이, 이봐!"
시몬은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가네스 길드의 짐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도적들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손에 쥔 무기를 겨누었다.
"어이, 너 뭐야?"
"간땡이가 처 부었나."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 마부가 기겁하며 시몬에게 돌아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지만, 시몬은 빙긋 웃어 보이고는 도적들을 보았다.
"타라도스에 가시죠? 여기에 뭐 들어 있어요?"
그러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마차에 실린 상자를 가리켰다.
그때 도적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짐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너, 뭐 하는 새끼냐?"
살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 말에 시몬은 품을 뒤적거리더니 키젠 2학년 학생증을 꺼내 들었다.
"키젠에서 왔습니다."
가네스 길드원들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대장 격으로 보이던 남자는 얼굴에 핏기가 가신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시몬이 다시 학생증을 품에 넣고는 손끝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다시 한번 물을게요. 지금 뭘 타라도스로 옮기고 계시는 거죠?"
대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벨트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우-
연초 연기가 안개처럼 뻗어 나가 주위를 뿌옇게 덧칠했다.
"거, 배우신 분이 참."
대장이 음흐흐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키젠 학생증을 보이니, 다짜고짜 압박할 때보다는 목소리가 많이 유해져 있었다.
"내가 말입니다. 딱 선생님만 한 나이의 아들내미가 있습죠. 돈이 없어서 코어 개방도 못 하고, 그냥 어디 짱 박혀서 옷이나 만들고 있다는데―"
"수사 중입니다.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키젠이시라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자라서, 장차 나라를 움직이는 높으신 분이 되셔야죠. 굳이 벌집 들쑤셔서 상처라도 생기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설득조로 이야기한 그가 연초 연기를 흩뿌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아랫것들은 다~ 아랫것들의 삶이 있는 겁니다. 좀 드럽고 지저분하니까 관심 가지면 눈만 배려요. 내가 아들내미 생각나서 충고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 협조 안 하시면."
숨 막힐 듯한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시몬이 상자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열어 볼게요?"
스릉! 스릉! 승!
처억! 척!
상자에 손을 올리는 순간, 모든 도적들이 검과 활을 시몬 쪽으로 겨누었다.
"어허, 그러지 마시라니까~"
도적대장도 검을 시몬의 목덜미에 겨누었다.
"선생님! 내가 비록 무식해서 배운 건 없어도 하나는 장담합니다."
그가 품에서 골드가 든 주머니를 꺼내, 시몬의 앞에 스윽 들이밀었다.
"이대로 그냥 무시하고 돌아가셔도, 선생님의 인생에 좁쌀만큼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아니, 참. 서민들 사는 데 와서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 사실 이런 게 목적이죠? 예?"
시몬은 상자에 손을 올린 자세 그대로 시선을 내렸다.
목덜미를 겨눈 용병대장의 검을 지나, 상자가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상자의 아주 작은 틈.
그 작은 틈에서.
"!"
데굴데굴 굴러가는 사람의 눈동자가 보인다.
"자, 자, 그러니까 선생-"
"이봐."
순간, 시몬의 눈매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런 이야기로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