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03화
불사의 군대와의 전투는 끝이 났다.
가네스 길드에 이어 타라도스 정규군까지 시몬 측에 합류했다. 병사들은 각자 자기 앞에 재생하는 언데드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무기를 휘둘렀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들을 소멸시킬 수 있는 시몬이 지나다니면서 파멸의 대검으로 마무리. 더 이상 되살아나는 언데드 병사들은 없었다.
"여기서 진을 친다!"
"밤이 오기 전에 빨리빨리 움직여!"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타라도스의 밤은 춥기로 악명높았기에, 시몬의 중재하에 두 세력은 함께 진을 쳤다.
이런 와중에도 세르네는 자신의 도적 떼들로 로레인이 이끄는 정규병과 한판 붙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시몬이 뜯어말렸다.
따앙! 따앙!
소녀들이 앉아서 쉬는 사이, 카쟌은 못을 입에 물고 다니며 능숙하게 망치질을 했다. 커다란 군막이 뚝딱 만들어지고 있었다.
'보기보다 어렵네.'
시몬도 카쟌을 돕고 있었다.
천막과 연결한 줄을 쇠말뚝에 감아 고정하면 되는 작업인데, 보기보다 신경 쓸 게 많았다. 천막을 밸런스 있게 당겨야 했고, 모래가 많은 곳은 피해 단단한 지반을 찾아야 했다.
"잘 지냈어? 시몬."
그때 검은 머리의 소녀가 시몬에게 다가왔다.
"아, 로레인!"
"도와줄까?"
"아냐, 아냐,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시몬의 옆에 쪼그려 앉아 구경했다.
어쩐지 옆에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니 긴장이 됐다. 시몬의 망치질도 더욱 신중해졌다.
땅- 땅-
"깜짝 놀랐어."
시몬이 망치질하며 말했다.
"네가 영주병을 이끌고 나타난 것도, 세르네가 가네스 길드를 데려온 것도."
로레인이 빙긋 웃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
그녀는 이번 임무평가도 세르네의 음모를 막으러 왔다고 말했다.
세르네가 시몬의 목적지인 타라도스에 가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학교 측에 타라도스로 향하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추가로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임무평가 전날, 타라도스에 파견된 하수인과의 연락이 갑작스레 끊겼다.
로레인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시몬보다 먼저 타라도스로 넘어왔다.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결사'가 보낸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키젠 교복을 보고도 로레인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타라도스로 가는 텔레포트 마법진이 없었던 거구나."
"맞아."
"징글징글하네요~ 정말."
세르네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쩜, 이런 곳까지 날 따라올 생각을 했어요?"
세르네는 로레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의뢰를 받은 다음, 상아탑 측의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타라도스에 넘어온 거였다.
로레인이 눈을 치켜떴다.
"당연히 따라가야지. 너희 상아탑이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번뜩이는 붉은 안광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세르네가 픽 웃었다.
"학교에서는 팔다리 묶인 맹수처럼 얌전하게 굴더니. 밖에 나왔다고 바로 본색이 드러나네요?"
그녀는 로레인이 목에 걸고 있는 자물쇠 목걸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자물쇠는 열려 있었다.
"그러니까-"
로레인이 살기를 담아 싸늘하게 뇌까렸다.
"하나하나 잘 생각해서 행동해. 조금만 수상쩍은 행동을 했다간 나오면 내가 먼저 칠 테니까."
"어머나~ 무서워라."
"그만들 싸워라."
그때 망치를 든 카쟌이 군막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계속 여기서 놀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싶은데."
* * *
카쟌은 바로 참고자들을 이곳 천막으로 불러들였다.
길잡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준 마부와, 의뢰자의 여동생인 세라.
타라도스 정규군을 이끄는 아민 장군.
가네스 길드를 이끌며 세르네의 오른팔을 자처하는 도적대장 카락까지.
"아민입니다."
아민 장군이 대표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진을 친 이곳이 '결사'의 비밀기지 입구입니다. 타라도스 전역에서 붙잡은 포로들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지죠."
시몬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비밀기지에 보내진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도 멀리서 '문'이 열려 있는 모습만 봤을 뿐, 끌려간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릅니다."
"저기요. 그런 건 됐고요~"
세르네가 귀밑머리를 넘겼다.
"어떻게 그 비밀기지인가 뭔가에 들어갈 수 있는지나 말해요."
원체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지라, 아민 장군도 깍듯하게 대했다.
"예. 우선 비밀기지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대는 자정으로 추정됩니다. 모든 포로들이 밤에 옮겨져서 자정에 이 유적지에 도착합니다. 단 한 번도 시간대가 틀린 적은 없었고, 가끔 포로들의 수가 너무 많으면 돌려보내고 그다음 날 자정에 들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건 아까 로레인에게 들은 바였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유적지에 진을 치고 자정까지 버티고 있는 거였고.
"그렇다면, 자정이 되면 문을 여는 방법은 뭐지?"
카쟌이 물음에, 아민은 품에서 열쇠를 꺼내 보였다.
"영주에게서 가져온 열쇠입니다. 자정에 유적지에서 공간이 비틀림이 발생하는 순간, 이 열쇠를 꽂으면 비밀기지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을 겁니다."
"어, 그 열쇠! 우리 보스도 들고 있었어."
이번엔 도적대장 카락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러곤 세르네를 보며 잽싸게 말을 고쳤다.
"물론 옛 보스일 뿐이고! 지금은 우리 여왕님을 섬기지만 말입니다!"
"어머~ 충심 있는 아저씨네."
세르네가 호호 웃었다. 로레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너, 검은 이리 가네스는 어떻게 했지?"
"어떻게 했긴요~"
세르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감히 나한테 무기를 들이대고, 정신장악도 잘 안 통해서, 홧김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죠. 막 피투성이가 돼서 눈물 질질 짜면서 도망치던데~ 지금쯤 죽지 않았을까 싶네요."
"역시 여왕님! 가네스 대장을 그렇게 압도할 수 있는 존재는 대륙에 우리 여왕님밖에 없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던 시몬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가네스 길드를 손에 넣었나 했더니, 그냥 힘으로 제압해 버린 거였다.
"그러는 당신은 어떻게 영주병을 데리고 온 건데요?"
이번엔 세르네가 로레인을 향해 물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너와 시몬을 찾는 게 우선이었지만, 타라도스의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어. 영주에게 해명을 들으러 가는 김에 겸사겸사."
역시.
그녀도 네프티스의 뒤를 이을 인물인 만큼 이번 타라도스 사태에 중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영주는 체포해서 지하감옥에 가둬놨어."
사실 타라도스의 병사들 사이에서도 영주의 평판은 최악이었다. 병사들에게 악역을 자처하게 하면서도 봉급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속 밀려 있었으니 당연했다.
영주보다 아민의 인기가 훨씬 높은 상황. 영주가 감옥에 갇히고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에 병사들은 대부분 아민의 편을 들었다.
지금 데려온 정규병도 모두 영주가 아닌 아민에게 충성하는 병사들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죠. 이건 영주의 금고에 있었던, 비밀기지 내부의 대략적인 지도입니다."
아민이 테이블에 지도를 내려놓았다. 카쟌이 고개를 쭉 기울여 그것을 보았다.
"외부인이 들고 있기엔 지나치게 기밀자료인데."
"영주는 결사의 일원으로 들어갔었습니다. 막대한 인력을 제공하는 만큼, 결사에겐 중요한 인물이었겠죠."
시몬이 손뼉을 쳤다.
"좋아요. 그럼 자정까지 쉬었다가, 시간이 되면 열쇠로 공간의 문을 열고 진입하겠습니다."
시몬이 고개를 돌려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사를 보았다.
"걱정하지 마, 리사. 내가 꼭 오빠를 구해낼게."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시몬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흔들렸다.
[잠깐잠깐! 우선순위를 잊지 않았겠지! 내 본체가 우선이야!]
'알았어. 칼.'
시몬이 다른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도와줄 거죠?"
카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야기된 부분이다. 나는 네 호위이고, 무슨 일이든 협조하기로 했으니."
로레인도 거들었다.
"키젠으로서 타라도스의 비극을 못 본 척할 순 없어. 온 힘을 다해 도울게."
세르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전 싫어요~"
'응?'
그러곤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준다면 또 모를까?"
"......너 말이야."
세르네는 그 자체로 강력한 존재인 건 물론, 군단장의 힘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인물이다. 그녀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시몬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뭘 원하는데?"
"늘 그랬듯, 쿠폰 도장 찍어주셔야죠."
세르네가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이번 건은 세 장 정도?"
"......."
솔직히 그녀가 쿠폰 쿠폰 하는 걸 처음엔 신경 안 쓰려고 했지만, 계속 저렇게 어필을 하고 있으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10장을 다 모으면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고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조금은 무서운 기분까지 들었다.
"세 장은 너무 과해. 한 장으로 해."
"세 장."
"한 장."
"세 장."
"한 장."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다.
그때 세르네가 귀엽게 눈을 찡긋하며 시몬의 팔을 붙잡았다.
"저와의 오붓한 데이트 타임까지 추가해서 세 장 어때요?"
"크읍! 나의 여왕님이......!"
도적대장 카락이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시몬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몬은 협상을 이어나갔다.
"그럼 오히려 깎아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와, 너무해!"
"그럼 시간 내주는 거까지 합쳐서 두 장."
"그렇담 좋아요!"
세르네가 비로소 만족한 듯 손을 내밀었고, 시몬이 맞잡으며 악수했다.
* * *
시간이 흘러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마이웨이 기질이 다분한 세르네는 세상 태연하게 담요를 덮고 눈을 붙였고, 카쟌은 비밀기지의 지도를 세부적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로레인은 저녁준비를 한다고 나섰다.
"간단한 거 만들게. 큰 전투 전에 뭐라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녀가 양동이를 들고 몸을 일으키자 시몬도 뒤따라 일어났다.
"아, 나도 도와줄게."
날이 어두워지는 시간, 두 사람은 유적 근처에 흐른다는 지하수를 뜨러 함께 걸었다.
딱히 취사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라 먹을 건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 아공간에 취사세트는 있어서 간단한 야채수프를 만들 생각이었다.
"......."
시몬은 빈 양동이를 들고 걸으며 로레인의 눈치를 힐긋 보았다.
오늘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다. 가끔 살짝살짝 뛰듯이 걷기도 한다.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
확실히 학교에서의 모습과는 달랐다.
"자꾸 어딜 보는 거니?"
로레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움찔한 시몬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
"이거, 신경 쓰여?"
그녀가 자물쇠 목걸이를 흔들어 보였다. 시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계속 물어보고 싶었지만, 최근 로레인의 표정엔 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네프티스와의 가정문제일지도 모르니 말을 아끼고 있었다.
"방학 때,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로레인이 자물쇠를 매만졌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내리깔렸다.
"키젠 1학년 동안, 시몬이나 다른 동기들에 비해 너는 얼마나 성장했어? 하고."
"......."
"딱히 할 말 없더라."
로레인은 이미 그 자체로 완전체 네크로맨서다.
소환체에 작용하는 그녀의 붉은 이능은, 스켈레톤에 부여하면 홀로 10기의 스켈레톤을 쓰러트릴 정도로 강해지고, 해골마에 부여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해골마보다 빨라진다.
하지만 이능이 강한 만큼, 이능에 대한 의존성이 문제였다.
시몬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랑 비교하신 거야? 왠지 좀 미안하네."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리고, 엄마가 두 번째 예를 든 게 판타서스 선배님이었어. 그분도 이능 없이 저주 하나만 갈고닦아서 키젠 최강이 되셨잖아. 그런 예시들을 듣고 있으니 난 정말 1학년 때에 비해 성장한 게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
시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1학년 공부에 의욕이 안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지."
밤바람이 불어오며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학교에서 배우는 그 무엇도 내 이능보다 강하진 않았으니까. 나는 배움보다는 학교의 운영에 관여하고,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어른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썼어. 하지만 정작 내 신분인 학생으로서 중요한 게 빠졌던 거야."
어느새 지하수가 흐르는 장소에 도착했다. 구덩이가 파인 곳에 그녀가 양동이를 내려놓자, 물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그래서 제약이 생겼어."
그녀가 다리를 모아 가슴까지 당겼다.
"졸업 전까지 학교의 운영에 간섭하지 말 것. 엄마의 명령이야."
"......그래서 3학년들의 신고식 때 전면에 나서서 막지 못했구나."
"응. 내겐 어떤 권한도 없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그녀가 목걸이 끝에 달린 자물쇠를 잠근 다음, 손바닥에 칠흑을 일으켰다.
붉은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그녀의 머리처럼 순수하게 까만 칠흑이 일렁였다.
"교내에서 이능을 봉인할 것."
"......."
"앞으로의 모든 수업, 시험, 수행평가까지 전부 이능 없이 네크로맨서 본연의 힘으로 해결해야 해. 내가 이능을 쓸 수 있는 건 아크볼드 가문으로서 이름을 걸고 싸워야 할 때나, 내 임무인 세르네를 막을 때뿐이야."
시몬이 입을 열었다.
"내가 뭐라 할 문제는 아니지만, 조금 과한 제약 아닐까? 넌 지금까지 계속 칠흑에 이능을 섞어서 흑마법을 써왔잖아. 그걸 갑자기 막으면......."
"응, 맞아. 키젠에서 난 평범 이하의 네크로맨서가 됐을지도 몰라."
그녀가 칠흑을 일으키던 손바닥을 접고 주먹을 꾹 쥐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시몬."
그러곤 시몬을 보며 생긋 웃어 보였다.
"네가 존경스러워지더라."
시몬이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