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22화
두 번째 경기장에 도착했다.
처음에 있었던 경기장과 디자인부터 좌석 규모까지 완전히 동일했기에, 앉아 있던 관중들 모두 그 자리 그대로 옮겨갈 수 있었다.
시몬은 이번에도 선수 대기석에 왔고, 편입생들도 아까처럼 뒤쪽 관중석에 자리 잡은 채 열심히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그리고 메이린은 앞에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
스트레칭을 끝낸 그녀는 눈을 감고 체내의 칠흑을 순환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집중력 좋은데.'
주위에 사람들이 얼마나 있든 얼마나 시끄럽든 조금도 방해받지 않는 모습.
이내 그녀가 눈을 천천히 뜨며 손바닥을 펼치자, 검은 광택이 도는 얼음이 촤르륵 일어나 눈꽃을 만들어냈다.
가까이에서 보던 편입생들이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놀라운 완성도의 얼음세공이었다. 시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컨디션은 만전이야.'
임무평가 직후라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그녀가 주먹을 쥐자, 허공의 얼음꽃도 바스러졌다.
"키젠 부회장 실력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상아탑 직계라잖아."
"진짜?"
상아탑이란 말에 메이린이 쓱 고개를 돌렸다. 편입생들 모두 시선을 피하며 눈을 굴리는 모습이다.
시몬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키젠의 승리는 확정됐잖아. 쉬엄쉬엄해도 괜찮아."
그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안 괜찮아. 키젠이라면 무조건 완승이지."
"여러분~"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카미바레즈가 선수 대기석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카미!"
메이린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시몬도 뒤따라 말했다.
"몸은 괜찮아?"
"네, 이제 괜찮아요!"
다행히 그녀의 상대였던 알리자린은, 들것에 실려 가는 중에 눈을 떴다고 한다. 크게 다친 곳은 없었고, 의료진들도 당장 내일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카미바레즈는 붕대를 감고 있는 알리자린에게 사과했지만.
-나야말로, 우르슬라가 배부른 소리니 뭐니 경솔하게 말했던 거, 진심으로 사과할게.
알리자린은 역으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힘, 진짜로 힘들겠더라.
카미바레즈는 그의 마지막 말만큼은 시몬과 메이린에게 굳이 하지는 않았다.
걱정 끼치기 싫었으니까.
반쪽짜리라도 이 피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면, 기꺼이 내 힘으로 만들고 말겠다. 카미바레즈는 그렇게 결의했다.
그때 방송음이 들렸다.
-마지막 경기의 학생들, 경기장으로 들어와 주시길 바랍니다.
메이린이 후아! 하고 숨을 토해내더니 이내 열정 넘치게 팔을 세웠다.
"가볍게 발라 버리고 올게!"
시몬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카미바레즈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격려했다. 이내 메이린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갔다.
"힘내라! 부회장!"
"실력 좀 보자아아!"
편입생들의 응원도 이어졌다. 메이린은 감사의 의미로 가볍게 눈짓하고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걸었다.
그렇게 메이린이 떠나고.
"......."
"......."
선수 대기석에 둘만 남겨진 시몬과 카미바레즈 사이에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
시몬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앞만 보았다.
'......쥐구멍에 기어들어 가고 싶다.'
카미바레즈가 피에 지배당해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린 순간에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오로지 그녀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머리를 식히자, 뒤늦게 자신이 카미바레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했다.
-노, 놓아주세요......!
-네가 다시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안 돼! 봉인을 닫고 우르슬라의 피를 가라앉혀!
쿵!
시몬은 머리를 경기장 펜스에 박았다. 앞에 있던 경기장 경비가 놀라서 움찔했다.
'주, 죽고 싶다아.'
지금 와서 생각하니,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흑역사를 갱신한 시몬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벌게진 이마를 들어서 옆을 보니, 마찬가지로 뺨을 홍조로 물들인 카미바레즈가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샥-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외면해 버리며 시선을 발밑으로 고정했다. 시몬은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어, 어떻게 사과해야 하지?'
당장 내일부터 학교생활이 시작된다. 학생회실에서도 계속 마주칠 거고, 카미바레즈와 언제까지 이렇게 어색한 사이를 유지할 수는 없다.
사과해야 하는 적기가 있다면, 잘못을 저지른 직후인 지금이다.
"카, 카미. 있잖아."
시몬이 말했다.
그녀는 개미 기어서 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용기를 내어 시몬의 눈동자와 마주했으나.
'......!'
1초 만에 다시 시선을 원상 복구시키며 시선을 발끝으로 모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발의 말단이 찌릿거렸다.
-너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너 자신뿐이야.
얼굴에 피가 계속 쏠린다. 옆에 서 있는 시몬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며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아무리 부끄럽고 민망해도, 자신을 구하러 경기장에 뛰쳐나온 사람에게 바보니 뭐니 그런 소릴 할 수가 있을까.
바로 되돌아와서 고맙다고 인사하긴 했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사과도 해야 했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아까는!"
"사실......!"
그러고는 동시에 눈을 더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는 두 사람이었다.
"......메이린 경기 시작한다."
"그, 그, 그러네요. 아하하."
선수 대기석 앞에 서 있던 경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애들이 쌍으로 염장을 질러대는구나. 아주.'
* * *
"메이린 학생과 화이트 학생 앞으로."
마지막 경기를 앞둔 두 학생이 경기장 앞으로 불려 나왔다.
그 순간.
우우우우우우우우!
시몬도 깜짝 놀랄 만큼 험악한 야유가 쏟아졌다. 그간 신사적이었던 모이란 학생들과 관중들이 보여줬던 매너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
당황한 카미바레즈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어, 어째서 메이린에게만......!"
"메이린에게 하는 야유가 아냐."
시몬이 심각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꺼져라 화이트!"
"무슨 낯으로 편입평가전까지 올라왔냐!"
"비겁자! 집으로 돌아가라!"
"사기꾼!"
우우우우우우!
야유의 대상은 메이린이 아니라 같은 모이란 학생인 '화이트'였다.
영문을 모를 상황이었다.
'무슨 일 있나?'
안 그래도 처음부터 신경 쓰였던 녀석인데, 관중들의 저런 반응을 보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시몬은 선수 대기석에서 슬쩍 걸음을 옮겨 관중석 쪽으로 다가갔다.
"얘들아."
시몬이 관중석 쪽으로 몸을 기댄 채 넌지시 말을 걸었다. 관중석에서 야유를 퍼붓고 있던 모이란 학생들이 깜짝 놀라며 그를 보았다.
"키, 키젠 학생회장이다!"
"아까 경기 멋졌어!"
학생들의 교복 깃에 숫자 '2'가 적혀 있는 배지가 보인다. 모이란에서 2학년을 상징하는 배지였다.
시몬은 주위에 있는 어른들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조용히 물었다.
"저 화이트란 애. 같은 모이란인데도 왜 다들 싫어하는 거야?"
그렇게 묻길 기다렸다는 듯, 모이란 학생들은 앞다투어 화이트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화이트는 1학년 말. 기말고사 전에 난데없이 전입해 온 학생이었다.
신분도 출신지도 불명.
몰락 귀족 출신이라느니, 왕족의 숨겨진 아들이라느니 소문만 무성했다.
처음에 모이란 학생들은 화이트를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하지만 전입해 오자마자 그가 벌인 행적은 파격적이었다. 치는 시험마다 만점을 맞는 건 물론, 모이란의 Top10에게 결투를 신청해 도장깨기처럼 압도적인 격차로 찍어 눌러 승리를 쟁취했다.
급기야 모이란 차석까지 한 방에 무릎 꿇리더니, 끝내 편입생 1순위인 수석도 쓰러트리고 명실상부 1학년 최강이 되었다.
참고로 3대 네크로맨서 학교 학생들은, 키젠 편입이 결정되는 1학년 2학기가 가장 경쟁이 격화되고 민감해지는 시점이다. 이 시기만큼은 선배들조차 1학년들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혜성처럼 스타급 인재가 튀어나왔고 교내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학교에서는 계산기를 두들기기 시작했고, '편입생은 최소 1학기 이상 수료할 것.'이라는 절대적인 룰에 예외를 두면서까지 화이트를 편입생 리스트에 집어넣었다.
물론 화이트를 키젠에 보내는 게, 학교의 명예와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경영진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때 당시 1학년들은 물론, 선배들까지 들고일어났다.
결국 학교의 정점인 3학년들까지 이번 사태에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모이란의 3학년 학생회장이 화이트에게 결투를 제안했고, 화이트는 편입 포기를, 학생회장은 자신의 학생회장 자리를 걸었다.
그리고 그 승부에서.
"화이트가 이겼어."
모이란 학생의 말에, 시몬의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그게 말이 돼? 1학년 전입생이 3학년 학생회장을 이겼다고?"
"어,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야."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학생회장 선배님은 학생회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충격에 시름 하다가 이틀 뒤 총장님께 자퇴서를 제출했지."
"......."
"졸업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도 그렇게 한 거야."
화이트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7세 소년이란 프로필은 거짓이고 사실은 성인 프로 네크로맨서였다느니, 금지된 흑마법을 썼다느니, 에프넬의 끄나풀이라느니.
모이란의 총장 또한 학생들의 이런 의심이 정당하다고 인정했고, 온갖 검증의 자리가 쏟아졌지만 끝내 화이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이래나 저래나, 결국 네크로맨서 학교에서는 실력이 최우선.
화이트는 키젠 편입생 자리를 하나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물론 2학년이 된 지금도 학생들 마음에 앙금이 남아 있었다.
'으음.'
시몬의 고개가 돌아갔다. 화이트와 악수하고 있는 메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거, 걱정되는데.'
어차피 키젠의 승리는 확정이다. 위험한 상대니까 마음 같아서는 말리고 싶었지만, 이건 몇백 년 넘게 이어온 학교 간 전통이고 승리를 다짐한 메이린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메이린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두 학생. 모두 준비됐습니까?"
심판의 물음에, 메이린과 화이트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모이란의 화이트 학생과, 키젠의 메이린 빌렌느 학생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코칭을 해주던 교수들이 물러나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한 심판의 팔이 내려갔다.
"경기 시작!"
사방에서 관중들의 외침이 쏟아졌다.
"힘내라! 키젠!"
"제발 저 새끼 콧대 좀 눌러줘!"
모이란 학생들이 적팀 학교를 응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메이린은 즉시 마법진을 펼치고 공세를 준비했다. 마법진에서 하얀 냉기가 흘러나오는 게 보인다.
'다행히, 오늘 메이린의 컨디션은 최고조야.'
경기가 시작되고 시몬이 다시 카미바레즈 옆으로 뛰어 돌아왔다. 카미바레즈가 그를 보았다.
"시몬, 모이란 분들과 무슨 이야기 했어요?"
"아, 메이린의 상대에 대해 조금.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화이트는 마법진도 그리지 않고, 제자리에 선 채 딱히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라는 듯,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과연 메이린이 이번 경기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시몬이 그런 의문을 품고 지켜보고 있는데, 드디어 그녀가 첫 번째 마법진을 펼쳐 들었다.
<프로즌>
하얀 냉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위의 수로들에 흐르던 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메이린의 눈에 신중한 빛이 일렁였다.
'지금까지 상대한 두 명 모두 물을 이용한 기술로 싸웠어. 이걸로 귀찮은 홈 어드밴티지는 무력화시켰고.'
그러곤 펼친 손바닥을 치켜들었다.
까드드드득!
까드드득!
수로에 얼어붙은 얼음들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단순히 상대의 물 관련 흑마법을 막는 게 끝이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더 잘 써먹어 주겠어!'
주위의 얼음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방어는 필요 없는.
철저한 맹공의 준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