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43화
새로운 동아리 정책이 확립되었다. 제인의 결재까지 무사히 받아낸 학생회는 거칠 것 없이 움직였다.
정책만큼이나 중요한 게 정책의 홍보다. 학생회 직속 하수인들은 시몬이 부탁한 인쇄물을 각 기숙사에 전달하고, 캠퍼스 곳곳에 붙이러 다녔다. 머릿수가 많으니 뭐든지 척척이었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졌다. 저녁에는 동아리 시즌 동안 쓰게 될 '부스' 선정 절차가 있었다.
굳게 닫혀 있는 학생회관 문을 바라보던 딕이 신호를 보냈다.
"여세요!"
덜컹!
학생회관 문이 열리기 무섭게, 각 동아리의 부장들이 좀비 떼처럼 우르르 안으로 몰려들었다.
"여러분! 질서를 지켜서 줄을 서주시길 바랍니다!"
"진정하시고 일렬로 서주십시오!"
직속 하수인들이 학생들을 통제했다. 그들은 학생회실 앞에 한 줄로 대기하다가 벽에 붙어 있는 벽보를 보았다.
"어, 이거 뭐야."
"새로운 동아리 시즌, 이런 게 바뀝니다?"
앞서 논의했던 대로, 학생회에서는 예산 분배의 기준을 전교생 앞에 투명하게 공개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부원의 수', 그리고 '부원의 지속 및 관리'다.
그리고 지속 부분을 평가하기 위해 매달 성과 보고서를 작성해야 예산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보고서를 쓰라고?"
"걔들, 학생회 됐다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그냥 하던 대로 하지."
투덜거리는 동아리 부장들도 있었지만.
"나쁠 거 없지."
"학생회에서 몇 푼 빼돌릴 줄 알았는데, 이러면 다 준다는 거네."
보고서를 쓰는 건 귀찮지만, 예산에서 자신도 모르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동아리 부장들이 많았다.
특히 대표적인 특권층 동아리였던 노블(Noble)의 경우, 멤버는 소수정예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학생회를 압박, 많은 예산을 타와서 호화롭게 지내왔다.
하지만 정책이 바뀐 올해는 변화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봐! 난리 났어, 부장! 어쩔 거야?"
같이 온 노블의 여학생이 부장의 어깨를 짤짤짤 흔들었다.
작년의 노블 부장은 몰리 공주의 오빠이자 지금은 키젠에서 쫓겨난 안드레 왕자였고, 올해 노블의 부장은 2학년 7위, 유령선의 엘리사 셀렌이었다.
엘리사가 슬슬 눈을 피하며 말했다.
"하, 학생회장이 그렇게 정했다면 따라야......."
같이 온 여학생의 눈가가 가늘어지자, 엘리사가 얼른 소리쳤다.
"그으, 그래도 명색이 노블인데 당연히 많이 퍼주겠지!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그렇지? 역시 엘리사야!"
'하아.'
사실 엘리사의 경우, 지금은 동아리 문제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시몬에게 잘 보이려 하는 이유는 셀린 가문에서 진행하려는 대규모 사업 때문이다.
키젠과의 협업으로 진행할 예정인데, 학생회장급 정도의 거물이 딴지를 걸면 귀찮아지니까 미리 잘 보이려고 했던 것뿐이다.
'예산 못 타오면 3학년들이 죽어라 갈굴 거고, 시몬한테 뭐라 하자니 가문 사업이 위태위태하고.'
그녀가 속으로 고뇌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아리 부장직 따위를 맡는 게 아니었어!'
키젠에서는 외부 일정이 많은 3학년 대신, 2학년이 부장을 맡는 게 관례다. 동아리 운영 또한 2학년들이 주역이다.
엘리사가 머릿속으로 복잡한 셈법을 하는 사이, 어느새 줄이 줄어들고 그녀의 차례가 됐다.
"여러분 차례입니다. 들어가시죠."
하수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엘리사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애써 당당한 걸음걸이로 학생회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각 사각-
앞에는 책상 하나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는 부회장 메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동아리 시즌 부스 배치도와 동아리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들고 있었다.
그 뒤쪽의 큰 책상에는 딕과 카미바레즈가 앞선 동아리 부장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깃펜을 끄적이고 있는 소년.
학생회장, 시몬 폴렌티아가 보인다.
"안. 녕."
메이린이 전혀 안녕하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엘리사의 이마에 혈관이 돋아났다.
'......이 싸가지 없는 기지배가.'
메이린과 엘리사는 1학년 시절부터 앙숙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쉬운 쪽은 엘리사였기에, 애써 웃는 얼굴로 '안녕'하고 인사했다.
"이름."
"헤헤, 부회장님. 내 이름 몰라?"
"이름 말하라고오."
"에, 엘리사 셀린."
메이린이 고개를 까닥이며 그녀의 이름을 리스트에 썼다.
"동아리 이름은?"
탕!
그때 엘리사와 같이 온 여학생이 메이린의 책상을 내리쳤다.
"다 알면서 귀찮게 뭐 하는 짓이야? 우리가 '노블'인 거 몰라?"
"......."
메이린이 싸늘한 얼굴로 엘리사에 눈짓을 보냈다.
얘 뭐냐. 하는 의미였다.
"아하하! 그냥 같이 온 부원이야!"
엘리사가 식겁하며 친구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서 굳이 메이린을 자극하는 건 좋지 않았다.
"내가 노블 부장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부회장, 계속해 줘!"
메이린은 뚱한 표정으로 서류에 '노블'이라고 기입했다.
"올해 동아리 시즌도 1학년 캠퍼스 중앙광장에서 열려. 원하는 부스를 선택하면 돼."
"다, 당연히 우리는......!"
작년에도 그랬듯, 가장 크고 넓은 부스를 선택하려던 엘리사의 손짓이 배치도 앞에서 멈칫했다.
이미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혈류 연구회, 사담.]
"뭐, 뭐야 이거!"
사담이 여길 먹었다고?
엘리사가 벙쪄 있는 사이, 그녀의 친구가 불쑥 튀어나와 소리쳤다.
"잠깐! 여긴 우리 부스잖아! 누가 여길 고른 건데!"
"눈깔 삐었니?"
메이린이 턱을 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사담이라고 빤히 적혀 있잖아."
"여긴 10년 넘게 노블의 부스 자리였어! 이 정도는 센스 있게 알아서 빼놨어야지! 학생회 니들 일 대충 할래?"
"니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게, 왜 학생회가 일을 대충 하는 건데?"
여학생이 기가 막힌다는 듯 '와'하고 입을 벌렸다.
"니들 이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야? 노블 3학년 선배들이 누구누구 있는지 알기나 해?"
"대체 왜-"
메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들이 늦게 와놓고 나한테 지랄이야?"
그녀가 순간적으로 뿜어내는 박력에 여학생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부스 선착순인 거 몰랐어? 아님 알고도 대갈빡 터져서 대접받으려고 늦게 왔니? 노블 선배님들이 뭐라 하시면 말씀드릴게. 이 새끼들이 게을러터져서 늦게 오는 바람에 좋은 부스 놓쳤어요. 그리고 항의할 거면 사담에 하든가. 왜 중립적으로 일하고 있는 우리한테 지랄이냐고오."
"너, 너......! 내가 누군지 알고!"
"뭔 1학년도 아니고 키젠에서 가문빨 내세우냐? 꼬우면 상아탑이랑 함 붙든가. 자신 있어?"
여학생은 얼굴만 벌게진 채 어버버-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이런 모욕을 받는 것 자체가 처음인지, 그냥 사고 자체가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야, 노블 꺼져."
메이린이 자리에 앉아 깃펜으로 노블의 이름을 지웠다.
"다음이요."
"자, 잠깐마안!"
결국 수습은 부장인 엘리사의 몫이었다.
엉엉 울음보가 터진 친구를 학생회실 밖으로 내보낸 그녀가 잽싸게 자리로 복귀했다.
"미, 미안. 부회장! 여기라도 할게!"
엘리사가 차선의 자리를 선택했다. 메이린이 후 하고 한숨을 쉬자 앞머리가 나풀거리며 휘날렸다.
"너희 선배님들이 정 뭐라 하시면 사담이랑 이야기해 봐. 합의하에 부스를 변경하는 건 가능하니까."
"아. 응. 알았어!"
물론 사담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말이다.
부스에 노블의 이름을 써넣은 메이린이 뒤를 가리켰다. 등록했으니 꺼지란 소리였다.
'하아아.'
엘리사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견디며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어서 오세요!"
자리에 앉아 있는 카미바레즈가 방긋 웃으며 맞아주었다.
"개웃기네 진짜."
그 옆에 서 있는 딕은 배를 잡고 낄낄거리는 중이었다.
"쟤 왜 겁대가리 없이 메이린한테 깝쳤냐? 한 성깔 하는 거 알면서."
"......아, 몰라. 뒷반이라 몰랐나 보지."
엘리사가 그렇게 말하며 카미바레즈를 보았다. 얼른 시작하란 의미였다.
카미바레즈가 서류를 들었다.
"혹시 이번 동아리 시즌에 예산이 필요하신가요?"
"당연하지. 현수막도 설치하고, 인쇄물도 뽑아야 하고, 뭐 이것저것 많이 필요해."
"예이~ 고갱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딕이 바로 비즈니스 모드로 들어오며 깃펜을 착 내밀었다.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쓸 건지, 확실히 기입해 주셔야 예산이 나옵니다요."
엘리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딕이 건넨 깃펜을 들었다.
"너네 원래 이렇게 빡세게 해?"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게 우리 학생회장님 모토라서."
딕이 뒤를 가리켰다. 학생회장석에 앉아 있는 시몬이 서류에 서명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자부해."
딕이 두 팔을 벌리며 히죽 웃었다.
"딱 하라는 대로만 해주면, 작년보다 동아리 예산이 많으면 많았지. 결코 덜 나오진 않을 거란 걸."
"......."
"우리는 중간 마진을 안 남기는 학생회거든."
* * *
바뀐 제도에 대해서는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사실 시몬의 학생회가 최초로 이런 제도를 도입한 건 아니었다. 메이린이 알아보니 드물지만 이런 제도를 시행한 학생회들도 있었고, 그들의 자료를 이용해 짧은 시간 안에 제도를 준비할 수 있었다.
학생회장의 성향에 따라 제도는 계속해서 바뀌어왔다.
작년 학생회인 판타서스의 경우, 학생회를 배후에서 조종하려는 3대 거대 동아리의 싹을 말려 버리기 위해 이전 정책을 고수했다.
이제는 3대 거대 동아리 중 남은 건 노블 하나뿐이었기에, 시몬도 새로운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된 거였다.
그렇게 부스가 확정되고, 1학년 중앙광장에서는 대규모 부스 설치작업이 열렸다.
학생들과 하수인들은 물론, 외부에서 온 용역들까지 동원되어 동아리 부스를 설치하고 현수막을 붙였다.
평범하게 그늘막만 치는 동아리부터, 아예 세트장을 설치하거나 조리실까지 준비하는 동아리들도 있었다.
뚝딱뚝딱거리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네크로맨서 학교인 만큼, 언데드들이 나무나 철근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부스 위로는 알록달록한 삼각형 파티플래그가 달렸고, 벽면에는 풍선과 현수막이 붙여졌다.
수업을 들으러 가던 1학년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주말을 하루 앞두고.
동아리 시즌이 시작됐다.
"와아아아아!"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사방에 1학년 학생들이 와글와글거리며 동아리 부스를 둘러보고 있었다.
1년 중 유일하게 1학년 앞에서 선배들이 망가지는 시점. 인형탈을 입은 2학년들이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고, 곳곳에서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학생들도 보였다.
시몬과 딕도 현장을 점검하러 나왔다.
"조, 조금 과하지 않나?"
시몬이 웃으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부스만 설치하면 되는 걸, 무슨 놀이동산 코스처럼 커다란 인공동굴을 만든 것도 있었다. 전면에는 <던전 연구 동아리>라고 적혀 있었다.
그 옆에는 체육 동아리가 보였다. 펀치 기계로 완력을 측정하는 것으로 남학생들의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펑! 펑!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했다.
"어쩐지 작년보다 더 화려해졌는데."
"네가 불을 붙인 거야. 시몬."
딕이 음흐흐 웃음을 흘렸다.
"예산을 타려면 동아리 부원 수가 작년보다 더 중요해졌으니까. 쟤들도 눈에 불을 켜고 하는 거지."
"흠."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벌써부터 전쟁이 일어나 있었다.
"비행 동아리에 관심 없니?"
"변신 동아리에!"
"사나이라면 피지컬 동아리지!"
뉴페이스를 동아리에 영입하려는 경쟁이 무척이나 치열했다. 선배들이 우르르 둘러싸자 어쩔 줄 몰라 하는 1학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근데 어째.......'
시몬이 팔짱을 끼며 헛웃음을 흘렸다.
'1학년보다 2학년이 더 많은 느낌?'
"얘들아!"
그때 메이린과 카미바레즈가 서류철을 껴안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어!"
"?"
딕은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학생회 완장을 높게 올렸다.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