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54화
상아탑.
2,000년간 인류의 발전을 주도해 온 마법사 집단이다.
대륙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던 그들이 삐끗하게 된 계기는 '네크로맨서와 프리스트 시대'의 대두도 있었지만, 그 전에 한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상아탑의 꼭대기 층에, '던전 게이트'가 열렸다.
약 300년 전에 출현한 그것은 시간을 왜곡하는 이상현상을 가진 던전이었다. 던전은 탑 곳곳에 존재하던 각종 마법들을 흡수, 결합하며 인류 최악의 재해로 커져만 갔다.
"외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터질 게 터졌다는 느낌입니다."
본부직원이 말했다.
"상아탑 본부의 꼭대기 층에서는 '시간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으니까요."
가만히 설명을 듣던 시몬의 눈이 커졌다.
"시간을요?"
"예, 상아탑은 무려 2,000년간 인류를 통치하고,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핵심세력입니다. 시간마저 정복하겠다는 그들의 욕망은 어찌 보면 당연하죠."
본부직원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과거의 소실된 마도지식을 획득하고, 미래의 주도권을 영원히 가져오고 싶었을 겁니다. 오만이죠."
본부직원은 상아탑 꼭대기에 열린 던전 게이트를, 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시간을 통제하려는 그들의 과도한 마법이, 시간과 관련된 던전을 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찌 됐건 당대 상아탑주와 그 제자들까지.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끝에 가까스로 던전을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상아탑에서는 게이트 사태로 폐허가 된 탑을 버리고, 새로운 탑으로 이사했다. 그곳이 현재의 상아탑 본부다.
그리고 봉인된 던전이 되어버리며 남겨진 옛탑.
"사람들은 그곳을 '시간의 탑'이라고 부릅니다."
본부직원이 깍지를 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봉인이 헐거워지면서, 조금씩 시간의 힘이 새어 나오고 있죠. 그래서 시간의 탑 내부에는 이천 년 넘게 상아탑이 본부로 쓰면서 쌓아둔 산더미 같은 지식과, 황홀하고 미스테리한 현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상아탑에서는 5년에 한 번 축제를 열어 이런 '신비'를 외부인들에게도 공개해 오고 있지요."
본부직원이 손을 착 세웠다.
"바로 그 축제가 바로 여러분이 가게 될 '시간의 축제'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시몬의 눈이 빛났다.
"......재, 재밌겠는데요?"
파견이라고 하길래 긴장했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장소란 생각이 들었다. 대륙의 시간이 얽매여 있는 곳이라니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메리다도 같은 생각인 듯 다소 잠이 깬 눈으로 서류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거기서, 뭘 하면 되나요."
그녀가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탑의 내부는 신비의 공간이지만, 그래도 던전은 던전인지라 몬스터가 나옵니다."
본부직원이 답했다.
"몬스터들을 없애고, 탑을 청소하고, 묻혀 있는 지식을 발굴하고, 대충 그 정도의 임무를 맡을 겁니다. 자세한 사항은 상아탑 측에서 설명해 줄 겁니다."
나쁘지 않았다.
상아탑 세력의 본부에 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의 탑에서 축제를 즐기고 일도 하는 파견.
물론 파견을 나온 입장이니 일반 초대객들보다는 힘들겠지만, 일생에 한 번 가보기 힘든 기회인 것도 사실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만 주의하신다면 수월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본부직원은 가방에서 두 개의 작은 목걸이 아티팩트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뭔가요?"
"네프티스 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아티팩트입니다."
시몬과 메리다가 목걸이를 하나씩 받아들었다.
"시간의 탑에서, 혹시 모를 사태에 여러분을 지켜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은 아티팩트를 관찰했다.
목걸이 끝에는 아주 작은 시계 하나가 달려 있었는데, 성녀 사태 때 시간을 되돌리는 그 아티팩트와는 다른 종류인 것 같았다.
본부직원은 이 아티팩트에 대해서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 그저 가지고 있으라고만 말했다.
"일단 여러분은 시간의 축제, 초대객 자격으로 방문합니다. 여기 상아탑 측에서 보낸 세부 사항입니다. 드레스 코드나 규칙 등이 적혀 있습니다."
드레스 코드도 있는 건가.
축제는 축제인지 꽤 본격적이었다.
"그럼 전달사항은 이걸로 끝입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 * *
본부직원에게 인사한 뒤, 시몬과 메리다는 응접실에서 나왔다.
어느새 깜깜한 밤이었다. 두 사람은 달빛이 비치는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
저벅저벅 발소리만 낮게 울려 퍼진다.
괜히 어색했던 시몬은 힐끔 메리다 쪽을 보았다. 그녀는 참았던 졸음이 쏟아졌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것도 걸으면서 말이다.
"메리다, 괜찮아?"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꾸벅꾸벅 졸면서 아공간을 열더니, 주섬주섬 이불을 꺼내 바닥에 펼쳐놓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던져 다이빙. 이불에 드러누워 버렸다.
"잠깐만! 여기서 자면 안 돼!"
식겁한 시몬이 달려가 그녀를 흔들어 깨우고 있는데.
번쩍 치켜든 그녀의 손가락 끝이 시몬의 이마에 닿았다.
"?!"
시몬이 휘청이며 메리다 위에 엎어졌다.
'스, 슬립?'
머릿속으로 참기 힘든 졸음이 쏟아졌다.
'의식이 순식간에 날아갈 뻔했어......!'
한 번에 몇 스택이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시몬도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어떻게든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서 버티고 있는 그때.
"흠."
누워서 자고 있던 메리다의 두 눈동자가 떠졌다.
"판타서스 오빠가 선택한 남자라서 기대했어."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니네."
"메, 메리다!"
메리다가 다시 시몬의 이마에 손가락을 올렸다. 슬립 스택이 더 쌓이고, 버티지 못한 시몬이 그녀의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너, 크윽! 이게 무슨 짓......!"
"시험."
그녀의 입가에서 자장가 같은 노곤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정말로 이켈 가문의 슬립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이 슬립......! 풀어......!"
시몬이 이를 악물고 말하자, 메리다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힘들어? 노곤 노곤 졸리기만 할 텐데."
"아니, 그...... 게 문제가 아니라......!"
마침 아래의 계단 쪽에서 시끌시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날 밤에 걔가 레베카한테......!"
"진짜 진짜? 입 맞춘 거야?"
"확실히 봤어! 막 팔로 허리를 감싸고......."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학생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
바닥에 흐트러져 깔린 이불.
눈을 끔뻑이며 무방비로 가만히 누워 있는 소녀.
그 위에 올라탄 채 몸을 버둥거리는 소년.
포개어진 남녀의 적나라한 모습을 본 소녀들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시뻘게졌다.
"꺄아아아아아악!"
"하, 하, 학교에서! 학교! 학교! 학교에서어어!"
이야기나 책으로만 보던 바로 그 장면.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한 그녀들의 눈이 팽글팽글 돌아갔다.
"잠깐만!"
시몬이 시뻘게진 얼굴로 외쳤다.
"이건......!"
"방해해서 미안해애애애!"
그녀들이 후다닥 왔던 계단을 내려갔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골치 아파진 시몬이 끙 소리를 내며 말했다.
"메리다! 이게 무슨 짓이야?"
메리다는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건지, 아니면 무슨 상관이냐는 건지. 고개만 갸웃했다.
이쯤 되니 시몬도 조금 화가 났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번에는 메리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다가 눈에 꽉 힘을 주었다.
"감히. 흐으음- 내게 그 기술로...... 승부해?"
"네가... 먼저... 시작...... 했잖아."
"봐주는 거...... 없어어어......."
그리고 계단 아래에 숨어 있던 여학생들은 입을 틀어막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무, 무슨 기술로 승부하는 건데?'
'뭘 먼저 시작했다는 건데!'
도저히 대화의 수위를 견디지 못한 그녀들은 더 엿듣는 것을 포기하고 시뻘게진 얼굴로 도망쳐 버렸다.
"하아. 하아."
그사이 메리다와 시몬은 사이좋게 4스택씩 건 채 검지를 서로의 이마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졸...... 리지? 그냥...... 자도...... 되는데."
시몬이 흐릿해진 동공으로 애써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할...... 소리."
메리다가 눈꺼풀을 끔뻑이며 말했다.
시몬은 전신의 칠흑을 폭발시키며 몸을 각성상태로 만들어 버티고 있었다. 메리다도 마찬가지인 듯 몸에서 칠흑이 뭉게뭉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이불에서 두 남녀가 포개어진 채 칠흑만 뿜어내는 광경이었는데, 괴기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은, 결국 이대로는 둘 다 여기서 자버릴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자각했다.
"하나...... 둘, 셋 하면 풀자."
"......좋아."
"하나...... 둘 셋."
"......."
"......."
"왜 안...... 풀어?"
"너야...... 말로."
두 사람 다 이성이 증발하기 직전이었다. 결국 조금 더 이성적인 시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 어. 내가 먼저 풀...... 테니까. 너도 해."
이미 한계에 봉착한 듯, 눈꺼풀이 반쯤 감긴 메리다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두 팔을 들어 힘겹게 손뼉을 짝 쳤다.
짝!
손뼉 소리가 나기 무섭게, 메리다의 눈이 부릅떠졌다.
"됐어."
바닥에 깔려 있던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시몬이 무방비로 쓰러지고 그녀가 그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내가 이겼어."
그리곤 총구를 겨누듯 손끝을 시몬의 이마에 댔다. 시몬이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약속이 다르...... 아니, 그 전에...... 막 올라가지 마......! 좀!"
그녀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시몬의 이마에 겨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을 신호로 졸음이 귀신같이 날아갔다.
"여기까지 할게."
메리다가 손을 내리며 말했다. 칠흑을 쥐어 짜내던 시몬이 비로소 안심하며 축 늘어졌다.
흠. 흠.
그런데 옆에서 들린 기침 소리에 시몬의 고개가 돌아갔다.
서류를 챙겨 들고 가려던 본부직원이 묘하게 미소 띤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망했다.'
* * *
다행히 본부직원은 특별히 뭐라고 하진 않았다.
차분하게 시몬과 메리다의 다툼을 타이르고는, 기숙사로 가라며 돌려보냈다.
'제발 학교에 이상한 소문만 안 났으면.'
시몬이 그렇게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뒤늦게 셔츠 주머니에 삐쳐 나온 명함 한 장이 보였다.
아까 본부직원이 몰래 넣어둔 거였다. 명함 뒤편을 보니 글귀가 적혀 있었다.
[번거롭겠지만, 다시 응접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혼자서요.]
어쩐지 쉽게 쉽게 넘어간다 했다니.
어른한테 걸려서 혼날 것 같다. 최악의 상황에는 교수님들에게 알릴지도 모른다.
사실 지은 죄는 없지만, 시몬은 괜히 제 발 저리며 터덜터덜 아까 갔던 응접실로 돌아갔다.
"오셨군요. 앉으시죠."
본부직원은 처음 봤던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시몬은 얼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제 해명을 좀 들어주세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 청춘이란 좋군요."
본부직원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나이에는 누구든 그렇습니다. 저도 그랬지요. '맹독학과 그녀'와의 밀담이 떠오릅니다. 첫 만남은 결투평가 상대였던 그녀가 제 식사에 설사약을 탔을 때부터 시작......."
"관심 없거든요!"
시몬이 고개를 전력으로 흔들며 엑스자를 그렸다. 학생 시절 이야기를 풀려던 본부직원은 아쉽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그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갑자기 주위가 새까만 막으로 둘러싸였다.
여러 겹의 방음 및 차단 마법진이 응접실을 한가득 휘감는 게 보였다.
"조금 보안에 신경을 써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일급기밀입니다."
공기가 바뀌었다.
본부직원이 아공간을 열더니, 서류가방에서 새까만 봉투를 꺼내 시몬에게 내밀었다.
"이 이야기는 파트너인 메리다 학생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시몬에게만 맡기는 임무였다.
"상아탑에서는 5년에 한 번 열리는 '시간의 축제'에 두 학생을 파견 명목으로 초대했다. 키젠에서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학생은 시간의 탑에서 파견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시몬은 직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짝 긴장한 얼굴로 검은 봉투에서 빳빳한 흰 종이를 꺼냈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본부에서 학생회장에게 맡기는 비밀임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