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58화
저벅. 저벅.
숨이 막히는 정적 속에서, 상아탑주 베르무드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회색 장발과, 거뭇거뭇한 긴 수염. 다소 고집스러운 인상의 짙은 눈썹이 돋보인다.
상아색 로브를 걸쳤으며, 손에는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세르네와는 정말 안 닮았네.'
시몬의 감상이었다. 친부도 아닌 양부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닮은 점을 굳이 한 가지 꼽자면.
쿠구구구구구-!
특유의 위압감과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
상아탑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도시를 다스리는 인물다웠다.
다만 컨디션은 그리 좋지 않은지, 안색이 창백하고 걸음도 약간 절뚝거렸다.
"탑주님."
다니엘라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보고드립니다. 기르돈이 탑의 초대객들을 공격한 뒤, 시간의 탑으로 달아났습니다. 속히 축제를 중지하고 군대를 보내 잡아들여야 합니다."
"다니엘라."
상아탑주의 마른 입술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는 언제봐도 변함없군. 특히 그 고지식한 부분이."
"......."
다니엘라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기다렸다. 상아탑주가 지팡이를 짚고 연회장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았다.
"내빈 여러분, 상아탑에 온 걸 환영하오. 축제는 변함없이 진행될 예정이며 기르돈은 우리가 책임지고 잡아넣을 터이니 안심해 주시오."
당혹스러운 웅성거림, 그리고 시간의 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쁨의 탄성이 반반씩 터져 나왔다.
반면 다니엘라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하오나 탑주! 대량학살 혐의가 있는 범죄자가 시간의 탑에 들어갔습니다! 하마터면 그가 아이들을 죽일 뻔했습니다. 아이들을요! 하다못해 기르돈을 붙잡은 뒤에......."
"그 보고는 이미 들었네. 다니엘라."
상아탑주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칠흑이 아닌, 순수한 마나로 만든 푸른 기운이 연회장 전체로 뻗어 나갔다.
끼기긱!
딸칵!
쑥대밭이 된 연회장이 놀라운 속도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깨진 접시가 달라붙고, 부러진 상다리가 일으켜졌으며, 무너진 기둥에 파편이 살점처럼 달라붙고, 기르돈이 던진 철근이나 파이프 등은 창밖으로 띄워져 보내졌다.
"......!"
시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간.
마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연회장이 기르돈이 쑥대밭으로 만들기 이전의 모습으로 말끔하게 돌아갔다.
"선언하겠소."
쿵.
상아탑주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시간의 축제는 계속될 것이고, 탑의 병사들이 숨어든 기르돈을 찾아내 체포할 것이오. 여러분이 기르돈에게 습격당할 일은 없을 것이오. 만에 하나 기르돈 때문에 초대객들에게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가 천천히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나 상아탑주 베르무드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겠소."
부자로 보이는 한 초대객이 삐딱하게 서며 말했다.
"책임? 정확히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겁니까?"
"상아탑주 자리를 내려놓겠소."
웅성 웅성!
그 말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다소 긴가민가하던 초대객들도 '상아탑주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오로지 다니엘라의 표정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탑주님! 이건 초대객들의 안전이 걸린 사안입니다!"
"내 상아탑주 자리로도 부족하다는 겐가."
"그런 말이 아니옵고-"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초대객들에게 직접 정하게 하도록 하지."
상아탑주가 주위의 관중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상아탑은 내빈 여러분의 안전을 책임지겠소. 그러나 정 상아탑이 미덥지 못하다면, 시간의 탑에 들어갈 기회를 포기하고 돌아가도 좋소."
덜컹!
그의 지팡이가 움직이자, 밖으로 나가는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물론 한번 나가면 돌아올 수는 없소. 어떻게 하시겠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관중들이 제각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10분.
100명이 넘는 이 인원 중에서, 나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켜보던 다니엘라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봤는가, 다니엘라."
상아탑주가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도 이 축제가 중지되는 건 원치 않네. 심지어."
그의 고개가 시몬과 메리다 쪽으로 향했다.
"기르돈에게 습격당한 피해자인 저 아이들도."
"......."
시몬은 입맛이 썼다.
'다니엘라 아저씨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이번 파견평가는 '완료제'.
반드시 주어진 임무를 클리어해야 학교로 돌아올 수 있다. 현장에서 어떤 변수가 터지든 학생 본인이 해결해야 했다. 그러려고 키젠에서 내어준 수사권과 지휘권이니까.
키젠은 융통성이 없는 기관이었다.
물론 기르돈이라는 범죄자가 엮여 있으니, 성적 최하점을 각오하면 어느 정도 진정의 여지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몬은 본부로부터 임무까지 받은 상황.
절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럼 돌아갈 사람은 없는 걸로 알고."
상아탑주가 지팡이를 움직이자 밖으로 나가는 문이 닫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르돈이 앞서 들어갔던 시간의 탑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시간의 탑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겠소."
* * *
상아탑주와 다니엘라가 떠나고, 한 무리의 무장한 상아탑 병사들이 먼저 시간의 탑으로 들어갔다.
앞서간 기르돈의 흔적을 추적하고, 그를 잡기 위해서였다.
참가객들의 차례는 두 시간 뒤였다. 다소 지루한 기다림 끝에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모두가 큰 소리로 환호했다.
시몬이 쓰게 웃었다.
'기르돈이든 뭐든,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들어갈 생각뿐이었네.'
5년에 한 번뿐인 시간의 축제.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 했지만, 직접 탑으로 들어갈 수 있는 100명의 초대객이 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상아탑 세력에 자금이든 조력이든 꾸준히 대가를 지불해야 리스트에 오르니까.
거기에 초대객 본인도 시간의 탑 에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네크로맨서여야 했다.
아무리 안전한 아래층을 돈다고 해도 던전은 던전이다. 전투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그럼 출발하시겠습니다!"
그렇게 초대객 전원, 연회장의 문을 지나 내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의 탑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상아탑의 '고향'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장소이기도 하죠."
내탑으로 향하는 길에, 초대객들을 이끄는 상아탑 소속의 안내자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한동안 상아탑의 유구한 역사에 대해 찬양하듯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2,000년의 역사를 기록해 후세에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잊힌 역사와, 마도기술의 분실 같은 사고는 한 번이면 족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법과 술식, 역사를 탑에 새기고 쌓아 올렸습니다. 하지만 단지 책이나 글자로 기록하기에는 분실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의 마법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마력촬영기나 메모리얼 수정구가 없었기에, 까다로운 초대형 마법진을 이용한 기록 마법을 만들어냈다.
처음엔 실린더 레코드나 축음기와 흡사한 '타임 아티팩트'라는 원시적인 기술이었지만, 점점 시간을 붙들어 고정시키려는 마법사들의 노력이 있었다.
상아탑 전체가 시간 마법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그 열기가 최고조에 이를 즈음.
"던전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집착과 오만이 이런 특수한 던전을 부르기라도 한 걸까. 그 던전은 상아탑의 모든 마법과 재료들을 빨아들였으며, 점점 더 커져갔다.
"던전은 막을 수 없이 강성해졌습니다! 대륙은 커다란 위기에 빠졌지만, 당시 상아탑주였던 빙백의 마도사와 그 제자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시간의 지옥으로부터 대륙을 구했습니다!"
설명을 듣던 시몬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본인들이 사고 친 거 수습한 거 아닌가.'
그때 한 참가객이 손을 들었다.
"그냥 현 상아탑의 힘으로 던전주와 던전을 제거하면 안 되는 겁니까?"
"이 던전은 대륙에 너무 오래 존재했습니다. 이제는 이 탑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면 시공간이 비틀어지고 막대한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경고하고 있죠."
사실 이게 바로, 상아탑 측에서 자신들의 생존과 필요를 대륙에 어필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우리는 대륙의 시공간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상아탑은 지금도, 그 끔찍한 시간의 괴물을 탑에 가두어놓고 있습니다! 시간의 탑은 지금도 대륙의 시간을 빨아들이며 기록하고 있죠! 고귀한 희생을 치른 빙백의 마도사와 그 제자들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계속 이곳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적당히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쯤, 탑 안에 도착했다.
한때 상아탑의 본진이었던 시간의 탑은 1층부터 100층까지 존재한다. 게이트가 열린 꼭대기층에 가까워질수록, 던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연회장이 있는 1층에서, 20층까지는 평범한 박물관으로 꾸며놨다. 여기서는 던전 몬스터의 공격을 받거나 이상현상을 보는 것도 힘들다.
20층부터는 하루에 2~3회 정도 이상현상이 일어나고, 30층부터 이상현상을 관찰하기 딱 좋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100층 꼭대기에는 그 유명한 던전주, '얼어붙은 시계'가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90층부터 100층까지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다.
"현재 기르돈은 70층을 지나 80층에 머무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상아탑 측 책임자가 말했다.
"70층부터 89층까지 봉쇄에 들어갔으며, 기르돈을 잡을 때까지 그 층으로 올라가는 건 금지됩니다."
"에이, 뭐야?"
"70층부터가 하이트라이트인데!"
실력에 자신 있어 보이는 초대객 네크로맨서들이 아쉬움을 표출했다.
"그럼 90층은 풀어주는 거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로브차림의 네크로맨서가 말했다. 책임자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VIP 여러분들이라도 90층 이후의 층들은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올해는 심심하겠군."
초대객 네크로맨서들은 익숙한 듯 주위로 흩어졌다.
"안녕! 너희들은 내가 안내해 줄게!"
상아탑 아카데미 소속의 미르드가 시몬과 메리다에게 다가왔다.
"시간의 탑은 처음이지? 따라와!"
두 사람은 초대객이 아니라, 엄연히 상아탑의 일을 도우러 온 파견생 신분이었다. 그들이 갈 곳은 50층이었다.
그렇게 미르드를 따라 탑에서 옆으로 쭉 가면, 끝도 없이 계단이 펼쳐진 공간이 나온다.
이 계단으로 층과 층 사이를 오르내릴 수 있는데, 무려 100층까지 있으니 상아탑에서는 마법진으로 만든 엘리베이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시몬 일행은 물론, 다른 초대객들도 그 위에 올라탔다.
'흠.'
시몬은 다른 초대객들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했다.
박물관부터 둘러보려는 듯, 2층에서 바로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 초보자들은 20층에서 내렸다.
30층, 40층 구간도 인기가 많은 듯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렸다.
그리고 50층부터는 인원이 반 이하로 쭉 떨어졌는데, 시몬과 메리다, 그리고 미르드는 여기서 내렸다.
"숙소는 반드시 지정된 장소만 써야 해. 자다가 던전의 몬스터에 덮쳐지기 싫다면 말야. 아. 허가 없이 다른 방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고."
숙소 쪽으로 안내하며 미르드는 정신없이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상아탑에서 물건을 발견하면 보고해 줘. 포상금을 줄 거야. 함부로 가져가면 절도인 거 알지? 그리고 상아탑에서 안내한 규칙 같은 건 다 숙지했을 거라고 생각해."
엘리베이터 근처에 숙소로 보이는 방이 있었다.
이곳은 안전구역.
더 들어가면 던전의 영향력을 받는 구간이라 몬스터가 나올 수도 있다.
"여기가 너희 숙소야. 무슨 일 있음 이걸로 연락하고."
그녀가 통신 수정구 하나를 건네주었다.
"됐지? 그럼 난 오후 수업이 있어서 가볼......."
"미르드."
그때 메리다가 입을 열었다. 마법진 엘리베이터로 가려던 미르드가 물음표를 띄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안내 고마워."
메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미르다가 '아'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별말씀을."
그러고는 메리다의 손을 맞잡는 순간.
피잉-
전신에 졸음이 쏟아졌다.
'어? 어'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내 메리다의 저주가 연달아 꽂히며 미르드는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허윽!"
미르드가 잠이 깨어났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후우! 후우!"
그녀의 동공이 마구 돌아갔다.
방금.
제대로 기억은 안 나지만 끔찍한 악몽이라도 꾼 것 같았다.
온몸이 근육통으로 뻐근했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바닥에 떡하니 누워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긁적이는 시몬이, 그리고 정면에는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메리다가 보였다.
"너, 너희들 이게 무슨 짓이야? 죽고 싶어?!"
"너. 아까 연회장에서."
메리다가 말을 이었다.
"일부러 기르돈을 우리한테 유인한 거지? 그에게 들리도록 계속 '키젠'이라고 강조하면서."
"X발! 빨리 이 저주 풀어! 키젠 이 미친 새끼들......!"
거기까지 말한 미르드의 고개가 푹 내려갔다.
다시 슬립이 먹힌 것이다. 뭔가 끔찍한 악몽을 꾸는 건지, 미르드의 전신 관절이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딱.
메리다가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미르드의 눈이 뜨였다.
"일부러 우리한테 기르돈을 유인한 거지?"
"자, 잠......!"
미르드가 충혈된 눈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잠깐만......! 말로 해! 말로!"
"대답해."
메리다가 다시 슬립을 장전하며 말했다.
"누가 시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