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60화
어떻게든 빠져나왔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의 탑을 겪어보니 묘한 재미가 있었다.
통신 수정구가 만들어지는 역사의 현장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고, 그 순간을 함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나 학자들이 와서 이런 역사적 순간을 목격했다면, 아마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간의 탑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역사의 장면들이 '이상현상'으로서 가득했다. 왜 기르돈 같은 위험한 살인마가 있어도, 초대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오려 했는지 시몬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메리다. 이쪽이야."
그녀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쫄래쫄래 잘도 따라왔다.
졸면서도 말은 알아듣는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 안 가.
'찾았다.'
일거리를 발견했다.
탑의 벽면 한쪽이 마치 검은 페인트칠을 한 듯, 새까만 밤하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조금 멀리서 보면 마치 탑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다.
그리고 저 밤하늘의 중앙 부근.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꿈틀대는 붉은 살덩이 같은 게 보인다.
탑에 나 있는 저 종양처럼 생긴 걸 '핵'이라고 부르는데, 저걸 파괴해야 던전에 흘러나오는 몬스터들을 차단할 수 있다. 상아탑에서는 이를 '청소'라고 부른다.
"메리다, 준비됐어?"
시몬은 아공간에서 도끼를 꺼내 손에 들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이 도끼는 핵을 파괴할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상아탑 측에서 제공했다.
"응."
메리다도 이제 제대로 눈을 뜨고 칠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역할을 분담했다.
시몬이 이 '아티팩트 도끼'로 핵을 파괴하는 역할을, 메리다가 밀려오는 던전 몬스터들을 막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아마도 핵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이 근방에 있는 모든 던전 몬스터들이 몰려올 것이다.
"간다."
시몬이 손에 쥔 도끼를 머리 뒤로 보내며 기우뚱- 몸을 기울였다. 그러곤 단번에 앞으로 나오며 힘껏 핵을 내리찍었다.
쩍!
생각보다 단단했다.
핵의 겉껍질이 파였지만, 깊게 들어가진 않았다.
시몬이 다시 도끼를 들어 올리는데.
-츠즈즈즈즈즈즈!
-츠즈즈즈즛!
던전의 몬스터들이 여기로 몰려들고 있었다. 힐긋 옆을 본 시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게 뭐야?"
기본적으로 몬스터라는 건, 대륙 식생과 동식물의 영향을 받아서 어느 정도는 익숙한 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달랐다.
여섯 개의 날카로운 다리. 얼굴은 없고 이목구비도 없지만 보랏빛 구체 같은 게 몸통 중앙에 딱 박혀 있었다.
몬스터가 아니라, 마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외계생명체를 보는 것 같았다.
'저게 바로 시간의 탑의 몬스터구나.'
"계속 때려, 시몬."
메리다가 팔을 치켜들었다. 머리 위로 준비해 둔 마법진들이 펼쳐지더니 포격처럼 저주를 발사했다.
가지각색의 저주폭우가 쏟아지는 모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저주에 얻어맞은 몬스터들이 휘청하는 모습이 보인다.
"응?"
메리다가 눈을 깜빡였다.
시간의 탑 몬스터들은 한번 휘청했을 뿐 아무렇지 않게 몰려오고 있었다.
"저주가 안 먹혀."
그녀는 당황한 것 같았다. 시몬이 도끼로 연신 핵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저주저항이야?"
"아니, 효과는 적용받아. 그냥 저주가 걸려도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아."
탈진저주 이그저스트, 멀미저주 시크니스, 실명저주 블라인드, 석화저주 페럴라이즈 등등.
어떤 몬스터에게도 잘 먹히는 저주들이 저 외계생명체처럼 생긴 몬스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스륵!
핵을 공격하고 있는 시몬의 머리 위로도 몬스터가 내려왔다. 방해를 받은 시몬이 옆으로 비켜선 다음, 어깨로 강하게 밀쳐서 놈을 날려 버렸다.
"그럼 사물에 직접 적용하는 저주를 쓰면 안 될까? 기르돈과 싸울 때 보여준 거!"
"......말처럼 쉬운 게 아냐."
저주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몬스터 등, 생명체를 상대로 싸우기 위한 기술이다.
물론 사물에 직접 적용되는 저주도 있기는 하다만,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효과나 지속시간에도 손해가 크고, 무엇보다 칠흑이 무지막지하게 소모된다.
메리다가 중력 관련 저주를 걸었는지 외계 몬스터 몇 마리가 공중으로 떠올랐지만, 그걸로는 택도 없었다.
숫자가 너무 많다.
"그럼 역할 교체야!"
빠아아악!
시몬이 칠흑을 휘감은 주먹을 몬스터의 중간에 박혀 있는 원통에 꽂아 넣었다.
퍽! 소리와 함께 파란 피가 철철 쏟아져 나왔다. 기름에 식초를 섞은 것 같은 냄새가 난다.
"내가 몬스터들을 막을게. 메리다 네가 도끼로 핵을 파괴해 줘!"
"나 마투는 잘 못 해."
그녀가 당당하게 양 허리에 손을 얹었다.
"1학기만 듣고 그만뒀어."
'자랑이냐!'
전체 4위란 녀석이 묘하게 약점이 많다.
오빠인 판타서스는 마투만으로 죄다 때려눕힐 정도의 육체파였는데 말이다.
-츠즈즈즈즈!
이제는 몬스터들이 밀려오던 방향에 더해 반대편 방향에서도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몬스터의 수를 줄이지 않으면 위험했다.
"흐읍!"
쩍!
이 상황에서도 시몬의 마투는 명품이었다. 발등으로 몬스터의 안면을 으깨고 날아올라 공중에서 메리다를 덮치려는 두 마리의 몬스터들을 걷어차서 날려 버렸다.
놈들은 벽면에 처박히자마자 퍽! 소리와 함께 으깨지며 파란 피가 튀었다.
바닥에 내려온 시몬이 즉각 아공간을 열었다.
"나와! 스켈레톤 나이트!"
시몬의 선택은 스켈레톤 나이트였다.
나이트는 아공간에서 나오자마자 휘리리릭 회전했다.
"아니, 아니! 그거 하려는 거 아냐! 멈춰!"
시몬의 명령에 스켈레톤 나이트가 멈춰섰다. 돌지 않고 멈춰 있으니 오히려 어색한 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만족스럽다는 사념을 시몬에게 보냈다.
"거기 바닥에 도끼 집어!"
스켈레톤 나이트가 도끼를 집었다.
"빨간 거 파괴해!"
스켈레톤 나이트가 도끼를 휘둘렀다.
쩍!
나름 풀스윙으로 핵을 때리긴 했지만, 허리가 세 차례쯤 돌아가며 빙빙 돌았다.
이쯤 되면 회전중독 증세였다.
'너희들 오늘따라 왜 이래?'
파트너나 소환수나 상태가 이상하다. 홀로 고군분투 중인 시몬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메리다는 저주가 안 통하는 상대를 만나서 그런지 기가 팍 죽어 있었다. 그래도 4위라는 실력이 어디 가는 게 아닌지, 그다음으로 잘하는 칠흑역학 쪽으로 틀어서 원소마법을 일으키고 있었다.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젖지도 않아."
판타서스처럼, 칠흑수류계 마법으로 파도를 만들어 몬스터들을 뒤로 밀어낸 메리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뒤로 밀어낸 만큼 한 번에 더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메리다! 슬립은 써봤어?"
시몬의 말에 메리다가 인상을 구겼다.
"7종 세트랑 반중력 저주도 잘 안 먹히는 것들이 잠을 잘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바닥에 슬립을 펼쳐 가까이 있는 몬스터의 몸에 툭 가져다 대보았다.
"!"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몬스터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혹은 전원이 꺼진 것처럼 그대로 정지한 것이다.
"진짜로...... 자?"
시몬이 몬스터를 걷어차며 외쳤다.
"아니, 자는 건 아닌 것 같아!"
일반적인 슬립은 생명체를 직접 재우는 '수면의 룬'을 채용하지만, 판타서스와 메리다, 그리고 시몬의 슬립은 '진정의 룬'을 채용한다.
저 몬스터들은 외부에서 오는 변화에 대한 억제력이 상당한 편이나, 부정적인 변화가 아닌 판타서스의 슬립은 몬스터의 시스템에서 공격이 아닌 다른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추측건대 일종의 휴면(休眠)상태. 혹은 명령 대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좋아."
메리다는 비로소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다녔다.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타닷. 탓. 하고 손바닥이 닿는 소리가 들리더니 몬스터들이 멈춰 섰다.
갑자기 전열의 몬스터가 멈춰 서며, 뒤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들 사이에서 정체 현상이 일어났다.
"잘하고 있어!"
역시 메리다가 이 탑에 파견 온 이유가 있었다.
시몬도 측면을 지키며, 마투와 슬립을 섞어 사용했다. 밤하늘 같은 벽을 등지고, 소년과 소녀가 정신없이 전장을 활보할 때마다 몬스터들의 시간이 멈춰 나갔다.
"하압!"
시몬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우글거리는 몬스터 무리의 한복판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그의 손바닥이 회색빛으로 일렁였다.
<바힐 리메이크 - 슬립퍼즈>
샤아아아아-
회색연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자 주위의 몬스터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열심히 싸우고 있던 메리다가 깜짝 놀라며 시몬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진정의 룬 버전으로 광범위 슬립? 어떻게 한 거지?'
다소 놀란 반응을 보이던 메리다도, 질 수 없다는 듯 두 팔을 세워 들었다.
촤아아아악!
그녀의 옷 소매가 펄럭였다. 소매에서 긴 이불이 뻗어 나가 주위의 몬스터들을 엮어내더니 빨랫감처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그녀는 즉시 손바닥을 꼬며 저주를 발동했다.
<슬립 링크>
이불에 엮어 바둥거리던 몬스터들이 모조리 축 늘어졌다. 전부 슬립 효과를 받고 있었다.
이번엔 시몬이 속으로 감탄했다.
'저걸 저렇게도 응용하는구나. 역시 저주 전공은 달라!'
시몬과 메리다의 활약이 빛나고 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싸우면서도 서로의 슬립을 힐긋거리며 공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에 살점 파괴를 맡겼던 시몬의 스켈레톤 나이트도.
퍽! 퍽! 퍽! 퍽! 퍽!
비로소 감을 잡은 것 같았다.
나이트는 도끼를 양손으로 쥔 채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고 있었다. 도끼가 핵을 치고 회전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치고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핵이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자, 잘하는데!"
너무 회전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결과만 좋다면 괜찮았다.
파트너와 소환수가 살아났고, 그렇게 잠시 후.
꽝!
스켈레톤 나이트가 비로소 도끼로 핵을 연달아 다져대서 파괴했다.
그것이 파괴되는 동시에, 가득하던 외계 몬스터의 몸이 과자처럼 흩어져 박살 났고 밤하늘처럼 변해 있던 벽과 바닥이 걷혀가며 서서히 일반적인 벽으로 돌아왔다.
"해냈어!"
시몬이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메리다도 손을 털며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수고했어."
"너도."
두 사람이 하이파이브로 손바닥을 맞부딪히는 순간.
휘청-
졸음이 쏟아진 시몬이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메리다!"
"아, 미안."
메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버릇 됐어."
* * *
첫 '청소'는 다소 애를 먹었지만, 두 번째부터는 감을 잡고 빠르게 해냈다.
시몬과 메리다는 50층 전체를 돌아다니며 할당량인 두 개의 핵을 모두 부수는 데 성공했다.
50층은 이제 깨끗해졌다. 어떤 핵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두 사람 모두 안전지대인 숙소로 들어왔다. 메리다는 문을 열자마자 후다닥 뛰어가 침대로 다이빙했다. 그러고는 고양이 식빵 굽는 자세 그대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메리다, 씻고 자야지."
시몬이 한숨을 쉬며 교복 재킷을 벗었다.
"내가 먼저 씻을 거야."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의 교복이 휙휙 날아다녔다.
시몬은 움찔하며 얼른 뒤돌아섰다. 벽에 퍽! 하고 그녀의 스타킹이 부딪히는 모습이 보였다.
"너, 조심성을 좀......."
그 말은 가뿐히 무시하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간 그녀는 대충 씻고 나와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침대에 편안하게 누웠다.
잠옷, 수면 양말, 수면 모자에 껴안는 베개까지 꺼낸 그녀는 아주 본격적이었다. 잠에 대한 본인의 강한 지론 같은 게 느껴졌다.
"아."
그녀가 누운 채로 시몬을 보았다.
"나 잠버릇 있어."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잠버릇은 어쩔 수 없었다.
"코골이? 아니면 이갈이?"
"아냐, 잠꼬대 같은 거."
난 또 뭐라고. 시몬이 미소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알았으니까 먼저 자."
얼른 옷 좀 갈아입고 싶었다.
메리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맨날 잤으면서, 무슨."
그렇게 시몬은.
그녀의 잠버릇을 과소평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 * *
시몬은 아직 메리다가 제대로 '숙면'을 취하는 건 보지 못했었다.
사실 벤치나 연회장에서 누워 눈을 붙이던 건 그녀가 제대로 자는 게 아니었다.
메리다는 평소에는 꾸벅꾸벅 조는 게 기본 상태였다.
그리고 밤에 침대에 누워 제대로 '숙면'을 취할 때는.
퍼어어어엉!
퍼어엉!
잠버릇이 무지막지한 편이었다.
"음냐 음냐. 판타서스 오빠아."
그녀는 베개를 껴안고 침대에서 대굴대굴 굴러다니다가 마구 팔을 휘저으며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저주가 펑펑 쏘아져 나가 바닥에 부딪히고, 벽에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아아.......'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 올린 시몬은, 오늘 잠은 다 잤다고 생각했다.
'그 오빠에 그 동생.......'
두 사람 다 잠버릇이 고약했다.
물론 잘 때마다 주위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판타서스에 비해서는 귀여운 수준이지만, 그걸 겪고 있는 당사자인 시몬은 죽을 맛이었다.
'어차피 뭐, 임무도 해야 했고.'
시몬은 잠든 지 세 시간 만에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몇 방 저주를 난사하더니 메리다는 다시 엎드린 채 쿨쿨 자기 시작했다. 시몬은 흐트러진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가 제대로 자고 있는지 몇 번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왔다.
'해가 뜨기 전에 서두르자.'
시몬의 진짜 '임무'는 지금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