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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561화 (561/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61화

늦은 새벽, 시몬은 홀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상아탑의 '원형계단'은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오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원래는 계단을 직접 오르기보단 이곳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마법진으로 이동하지만, 늦은 새벽이라 작동이 중지되어 있었다.

'으스스하네.'

늦은 시간에 탑을 돌아다니는 건 금지였기에 주위는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새벽바람이 쌀쌀했다.

로브자락을 여미며 시몬은 마침내 55층에 도착했다.

바로 이 층에 키젠 본부에서 요청한 자료가 있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끝장이었기에, 시몬은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55층 내부로 들어오니 적막감을 깨고 다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진짜 사람은 아니다. 낮이든 새벽이든 관계없이 탑의 이상현상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마법사들은 마나의 순수성에 대한 강박감이 있죠. 정순한 마나일수록 효과가 뛰어나다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나는 무언가를 더했을 때 진정한 시너지를 낼 수 있어요. 우리는 마나의 순수성에 집착해 중요한 걸 놓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아탑답게 강연이나 연구의 장면들이 많았고.

-이 조약은 불공정 조약이요!

-우리가 맞서 싸워야만 합니다! 일어납시다!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역사적 장면도 있었다.

과거의 회색빛 사람들이 그 시절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시간의 탑에 들어오려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비밀임무 중인 시몬은 이것들을 여유롭게 감상할 틈이 없었다.

'38호, 38호.'

방을 찾는 데 집중했다. 감히 랜턴을 켜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야맹증' 저주를 역산해 반대 효과를 내도록 맞춘 다음, 제 눈에 걸었다.

저주는 저주인지 눈이 뻑적지근했다. 이럴 때는 부작용 없이 자신을 강화할 수 있는 프리스트들의 '축복'이 부러웠다.

'......긴장되네.'

순찰을 하고 있을 상아탑 병사들은 물론, 던전의 몬스터들, 그리고 시간의 탑 어딘가에 어슬렁거리고 있을 기르돈도 조심해야 했다.

슥.

정면의 방들을 모두 체크한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저쪽으로 지나가야 할 것 같은데.'

하필이면 시몬이 가야 하는 길목에, 시간의 '이상현상'이 펼쳐져 있었다.

-가라! 왕자님을 따르라!

-드레스덴 왕국이여! 영원하라!

그것도 하필이면 전쟁의 한 장면이었다. 조잡한 장비를 착용한 병사들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적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여길 어떻게 지나갈까 생각하던 시몬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진짜 하기 싫은데.'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아공간을 열어 검을 한 자루를 꺼냈다.

부끄러움은 한순간일 뿐.

목에 힘을 주고는 힘껏 외쳤다.

"왕자님을 따르라!"

그러곤 검을 꼬나쥐고 회색빛 역사 속으로 뛰어들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역사 속의 병사들이 시몬의 외침에 호응하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시몬은 병사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좋아, 이렇게 대각선으로 달려서 빠져나가면 돼!'

-그대!

이대로 지나가려고 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시몬이 찔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움직이자 갑주 차림의 청년이 빙긋 웃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전장에 참여한 것도 자랑스러운데,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다니! 대단하군!

'모, 몰리 공주님?'

이 사람이 왕자인 것 같은데, 이목구비가 몰리와 똑 닮았다.

정말로 몰리 공주에서 머리만 짧은 느낌. 그녀의 먼 조상인 듯했다.

-그대를 내 친위대로 임명하겠네! 나와 함께 제국놈들을 무찌르세!

시몬이 이를 악물었다.

몰입하자. 몰입하자. 몰입하자. 몰입하자.

"가문의 영광입니다! 왕자님! 제 모든 것을 다해 놈들을 무찌르겠습니다!"

-하하하하하!

그렇게 시몬은 왕자와 함께 20분 넘게 달리는 시늉을 해야했다.

-적이 눈앞이다!

-놈들이 온다!

온다 온다 말만 하지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까부터 그냥 달리기만 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상아탑 측에서 보관한 기록은 돌진 장면이 끝인 듯했다. 던전의 이상현상도 없는 과거를 재현하지는 못하리라.

"왕자님!"

시몬은 머리를 굴려 새로운 변명을 떠올렸다.

"사실 서쪽 진형에 제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구하러 가고 싶습니다!"

-전장에 나온 부친을 따라오다니! 이 얼마나 충효자란 말인가!

왕자가 감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행운을 빌겠네!

"감사합니다! 드레스덴 왕국에 영광을!"

시몬은 그렇게 외치며 달려나가, 마침내 회색빛 역사에서 빠져나왔다. 빠져나오자마자 바닥에 엎드리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쌌다.

'......부, 부끄러워.'

누가 안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몬은 다시 멘탈을 가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돌아갈 때도 다시 이 짓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아찔해졌지만, 날이 밝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상현상을 지나서 보이는 복도 끝에 있는 방.

여기가 38호다.

-츠즈즈즈즈즈.

'!'

그때 시간의 탑 몬스터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있는 건가?'

시몬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38호 문의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이, 일단 들어가서.......'

[나라면 손대지 않을 걸세.]

시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빨리 칠흑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반갑군!]

누군가 있었다.

키가 작았고, 얼굴에는 토끼 가면을 쓴 남자였다. 전신이 흐릿하고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있었다.

'이상현상으로 만들어진 존재!'

다행스럽게도 상아탑 측의 경비병들이 아니었다.

시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애써 웃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이 사람은 어떤 역사적 인물일까.

당장에 배경정보는 없지만, 아까 왕자를 만나서 수습했던 것처럼 일단 아무 말이라도 해보기로 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토끼 가면은 낄낄 웃으며 손에 쥔 지팡이를 휘리릭 돌렸다.

[피차 초면인데, 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나?]

"그, 그랬죠, 참."

[젊은 친구가 재밌구만.]

몰리를 닮은 왕자에게 시달렸다가, 이번에는 토끼 가면이라니.

임무 하기 참 어렵다고 생각하며 시몬은 애써 웃음 지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시나요?"

일단 어떻게든 이 인물의 배경정보를 알아내야 했다.

[그런 화제는 별로 재미없지.]

하지만 토끼 가면은 가뿐히 빠져나왔다. 시몬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물었다.

"그럼 뭐가 재미있는......."

[자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맞혀볼까?]

토끼 가면의 입가가 길게 벌어졌다.

[키젠에서 온 소년. 상아탑의 정보를 캐가려고 온 게지?]

촤아악!

눈 깜찍 할 사이에 허리춤에서 카오스 스피어를 뽑아 든 시몬이 창끝을 겨누었다.

"......당신은 누구죠? 단순한 이상현상은 아닌 것 같은데."

[안목이 좋군.]

그렇게 대답한 토끼 가면이 뒷짐을 지고 걸어갔다. 시몬도 팔을 움직여 창끝을 돌렸다.

[나도 던전의 이상현상으로 존재하는 개체인 건 사실이지만, 저기 멋대로 떠드는 바보들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

혼란스러웠다.

탑의 이상현상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만약 자신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폭주한 몬스터처럼 주위의 인간들을 공격한다.

그런데 이 토끼 가면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도 몬스터화되지 않는다. 심지어 시몬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 무서운 건 좀 치워주면 안 되겠나? 그래도 방금 자네를 한번 구한 은인이거늘.]

토끼 가면이 느물거리듯 말했다. 시몬은 눈에 힘을 주었다.

"......절 구했다구요?"

[만약 자네가 38호 문을 당겼다면.]

그가 손끝으로 벽면을 가리켰다.

[보안 마법이 작동했을 게야. 자네는 전격에 감전되고, 곧장 상아탑의 경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겠지.]

"......!"

[한번 확인해 보시게.]

시몬은 긴가민가했지만, 토끼 가면에게 창을 겨눈 채 벽면을 눈으로 훑었다.

'!'

정말로 있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벽면과 똑같은 은폐색으로 숨겨져 있었지만, 틀림없이 마법진이다.

[내 말이 맞지? 학생인 자네가 풀기엔 어려운 수식이겠지만.]

토끼 가면이 요술을 부리듯 손을 휘저었다.

[내가 도와주지.]

그러자 정말로 마법진의 테두리가 헐거워지더니, 이내 대기 중의 마나로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마법진의 시간을 움직여, 지속시간을 끝내 자연 해체한 거라네.]

비로소 시몬이 창을 내렸다.

"당신은 누구죠?"

[흣흣흣! 시간의 유령이라고 불러주게!]

그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며 신사처럼 인사했다.

[일단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않겠나?]

* * *

시간의 유령.

적인지 아군인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몬스터의 울음소리에 놀라서 당장 38호 문을 열었다면, 상아탑에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다른 건 제쳐두더라도 당장은 그가 시몬을 구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38호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쓰지 않는 창고 같은 방이었다. 시간의 축제라고 해도 여기까지 청소를 해두진 않았는지, 곳곳에 거미줄이 가득하고 먼지가 쌓여 있었다.

[자, 편하게 일하게나.]

시간의 유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토끼 가면이 그렇게 말했다. 시몬은 빤히 그를 응시했다.

"그 전에 당신이 누군지, 조금 더 명확하게 알고 싶은데요."

아까 마법진을 풀고 도와준 건 맞지만, 함정일 수 있다.

사실은 도와주는 척하면서 결정적인 증거를 포착해 붙잡으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의심이 많은 성격이군. 좋네.]

그가 천천히 등을 기울이자 몸이 허공에 뜬 채 둥둥 떠올랐다.

[300년 전, 상아탑에서 일어난 던전 게이트 사건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나도 그 시절의 사람이네.]

오호.

시몬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게이트 사건 당시엔 뭘 하셨는데요?"

[나는 그때.]

시간의 유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타임머신에 타고 있었다네!]

잔뜩 집중해서 듣고 있던 시몬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아, 네. 타임머신이요."

[뭔가 그 반응은! 아무튼 그렇다네. 당시 상아탑에서는 시간 마법 연구가 유행이었고, 나 또한 타임머신이라는 특수한 아티팩트를 발명했었지.]

그거 대단하네요. 시몬이 건성으로 답했다.

[하지만 동료들은 나를 바보 취급하고 상아탑주가 주도하는 마법 프로젝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네. 나는 내 성과를 증명하기 위해 직접 타임머신에 탔어! 그런데!]

시간의 유령이 손에 든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하필 그 타이밍에 던전 게이트가 열린 걸세!]

상아탑의 꼭대기 층에 열린 던전은, 당시 상아탑이 개발하고 있던 모든 시간의 마법들을 홀라당 집어삼켰다. 마침 타임머신에 타고 있던 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 게지.]

그가 큭큭 웃으며 두 팔을 펼쳐 보였다.

[나는 틀림없이 던전의 이상현상으로 존재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네! 동시에 타임머신의 영향을 받아서 탑 내부에 흐르는 '시간'을 볼 수 있게 됐지. 나 같은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게야!]

시몬이 팔짱을 꼈다.

"영원히 존재하는 건 고역 아닌가요?"

[그럴 리가! 그건 육체란 짐을 짊어진 자들이 하는 착각이지!]

그가 심취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수명의 한계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주제를 끝없이 사색하고 연구하는 걸 즐기네! 이곳의 사람들에게 정체를 드러내진 않지만, 가끔 창가에 내 연구성과를 두고 가기도 한다네. 그걸 또 매일 와서 받아먹고 자기 연구랍시고 등록해 상아탑의 최상위에 오른 자도 있지! 뭐, 그러려니 한다네! 하하하!]

자꾸 이야기가 딴 길로 새자 시몬이 화제를 돌려 잡았다.

"그럼 이 탑 안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할 당신이, 제가 상아탑의 정보를 캐러 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안 거죠?"

[말하지 않았나? 나는 시간을 볼 수 있다고. 자네가 이 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탑에 나갈 때까지, 자네의 시간을 모두 볼 수 있네.]

시간을 '본다'라.

생소한 개념이었다.

[내 눈에는 보인다네. 자네는 오늘 55층에서 어떤 '아티팩트'를 작동해 정보를 손에 넣고, 내일은 63층에 가겠지.]

"......!"

정확한 사실이었다.

몇 층 몇 층에 가는지, 심지어 아직 꺼내 보이지도 않은 '아티팩트'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거기에 그는 임무를 끝내고 숙소에 돌아가면 잠꼬대하는 소녀의 저주에 맞을 거라는 이야기까지 했다.

"......무슨 예언 같은 건가요?"

[어허, 예언이라니! 인간들이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는 4차원 시공간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이 세상을 인식하기 위한 허구의 개념일 뿐이네! 사실 시간은 무한히 펼쳐져 있지!]

이건 뭔 소리야? 시몬이 이마를 짚었다.

"어려운 개념은 됐고, 탑 안에서 제 미래가 보인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럼 당신의 목적은 뭐죠?"

잠시 침묵하던 토끼 가면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어느 시점부터, 이 '탑'의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됐네.]

"......네?"

[탑의 시간이 새까매져서 볼 수가 없어졌어!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 시간의 탑에 뭔가 큰 문제가 생긴다는 거겠지! 상아탑주가 이 탑을 이용해 뭔가 수상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시몬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그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언제인데요?"

토끼 가면이 손가락을 펼쳤다.

[4일 뒤.]

시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으로부터 4일 뒤라면, 시몬의 상아탑 파견 마지막 날이었다.

[얼마 안 가, 이 탑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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