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63화
파견 둘째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시몬과 메리다는 60층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시작했다.
오늘 일정은 아침부터 시작이라 할당량이 많았는데, 최소 다섯 개의 핵을 청소한 뒤에야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시몬, 저기!"
덥석!
메리다가 시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시몬이 숨을 헐떡이면서 그녀에게 끌려갔다.
"뭐가 그렇게 급해? 메리다."
뒤를 돌아본 그녀가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빨리 끝내고 자고 싶어."
"밥 먹고 한 번 잤잖아!"
"더 자고 싶어."
'진짜 잠순이가 따로 없네.'
그렇게 60층 근처의 핵을 파괴하면서, 시몬과 메리다는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었다.
이번 60층대가 나름 핫플레이스인 모양이었다. 70층 위로는 기르돈 때문에 더 못 올라가기도 하고.
"감격이야! 폰쿠레 공식이 완성되는 순간을 볼 수 있다니!"
감격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
-같이 가주시겠어요?
"영광이오, 오늘이 끝나는 그 날까지 함께 하겠소."
본인이 직접 역사 속 상황에 뛰어들어 등장인물인 척하는 사람.
"안 돼! 전쟁은 절대 안 돼! 당신은 정확히 2주 뒤에 아군의 칼에 맞아 죽는다고!"
지나치게 과몰입하는 사람.
이건 역사의 한순간을 재현하는 이상현상일 뿐, 저 상황을 바꾼다고 해서 실제 역사가 바뀌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그래, 당신! 당신이 백작을 죽였어! 칼로스에서 보낸 첩자인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남자는 앞으로 일어날 역사적 사건들을 모조리 이야기해 버렸다.
설명을 듣고 있던 역사 속 사람들의 눈초리가 수상쩍게 바뀌더니, 이내 괴물처럼 흉악하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런데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나도 알고 있어.
-왜? 왜? 왜? 왜? 왜?
남자가 뒤늦게 놀란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물러나요!"
콰르르르릉!
시몬이 카오스 스피어를 던져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탑의 규칙 몰라요? 그렇게 하면 몬스터가 더 늘어난다구요!"
"나, 난 그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저분이 내 조상이야!"
"여기서 이런다고 해도 현재를 바꿀 수는 없어요."
시몬이 냉철하게 대꾸하고는 두 번째 카오스 스피어를 꺼냈다.
"메리다! 도와...... 어?"
그런데.
메리다는 햇빛이 드는 따뜻한 창가 앞에서 특유의 그 '고양이 식빵 굽는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노곤노곤한 표정으로 꾸벅거리며 조는 모습이다.
"일어나, 메리다!"
좀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는 파견이었다.
* * *
새벽이 찾아왔다.
탑에 자욱한 어둠이 깔렸고, 이번에도 시몬은 시간의 유령을 만나러 왔다.
[왔군.]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유령은 63층의 보안 마법진을 해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몬은 무사히 안으로 들어가 네프티스의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후우."
그렇게 아티팩트의 녹화가 끝나자, 시몬은 서류가방을 아공간에 집어넣고는 복잡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시간의 유령이 흘흘 웃었다.
[표정이 좋지 않군.]
"걱정되니까요."
시몬이 턱을 괴며 그를 보았다.
"그보다, 3일 뒤면 시간의 탑이 무너진다는데 너무 태연한 거 아니에요? 탑이 잘못되면 당신도 소멸하잖아요."
[태연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 걸세.]
시간의 유령이 말했다.
[나는 시간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탑에 속해 있는 존재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새까매진 탑의 미래를 바꿀 수 없네.]
그렇게 말한 시간의 유령이 시몬을 가리켰다.
[외부인이면서, 특별한 힘을 가진 자네만이 희망이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뿐이지.]
"그럼 그 메이린과 세르네의 과거를 보여줄 게 아니라,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게 더 빠르지 않아요?"
[서두를 것 없네.]
시간의 유령이 말했다.
[모든 사건은 시간에 맞춰 일어나게 되어 있으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자네가 상아탑에 대한 진실을 찬찬히 알아가는 걸세.]
다소 허술하지만, 역시 초월적인 존재는 초월적인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시작하시죠."
[알겠네.]
시간의 유령이 손을 휘저었고 시몬의 주위가 역사의 장면처럼 회색빛으로 뒤덮였다.
* * *
꺄르르륵!
아하하하!
시간이 지나 메이린과 세르네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니, 거지라고 놀리던 탑의 아이들도 세르네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그녀는 메이린의 도움으로 상아탑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아, 힘들다!"
실컷 뛰어논 두 소녀가 풀밭에 벌러덩 누웠다.
멍하니 하얀 구름을 올려다보던 그녀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보았다. 이내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눈을 마주치고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오늘 수업 재밌었지, 세리."
"응응. 장래의 모습을 그리는 게 재밌었어. 메이린은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
메이린이 씩 웃었다.
"난 커서 멋진 여성 상아탑주가 될 거야!"
"와아!"
"그래서 누구보다 탑을 번영하게 만들겠어! 다시 탑 밖의 사람들이 우리를 우러러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키젠의 시대잖아."
"키젠보다 더 높이, 더 위대하게!"
메이린이 구름을 향해 손을 쭉 뻗어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아탑의 영광의 시대를 되찾겠어!"
상아탑의 아이들이 가장 많이 받는 교육은 '역사'였다.
2,000년의 세월, 상아탑의 위대함.
이곳의 아이들은 누구나 탑에 대한 드높은 자부심을 가졌다.
"응응. 메이린은 훌륭한 상아탑주가 될 수 있을 거야."
세르네가 말했다. 메이린은 갑자기 낯부끄러워진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세르네가 쿡쿡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세웠다.
"약속할게. 메이린."
"뭘?"
그녀가 메이린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내가 널 상아탑주로 만들 거야."
"......응, 고마워. 세리."
훈훈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멀찍이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시몬은 옆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옛날에는 저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지금은 어쩌다 앙숙이 된 거지?'
샤아아아아-
주위가 회색빛으로 차오르며 장면이 전환되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는지 메이린과 세르네 둘 다 꼬마티는 벗고, 어엿한 숙녀의 느낌이 나고 있었다.
"하아. 하아."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그녀들의 앞에 놓인 건 하얀 구슬.
메이린은 숨을 헐떡이며 구슬을 보았다. 겉면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해냈어......!'
그녀가 흐르는 땀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마법을 가르치던 선생님도 빙긋 웃었다.
"대단한 재능이에요, 메이린 아가씨. 그 나이에 벌써 이 구슬을 얼음으로 뒤덮을 정도라니요."
메이린이 고개를 홱 들었다.
"대단한 거 맞죠? 그쵸?"
"그럼요. 이 구슬은 '빙제의 구슬'이라고 한답니다. 단순히 빙결 마법의 수준이 높다고 이 구슬을 얼릴 수는 없어요. 오로지 정령의 가호를 받은, 선택받은 사람만이 이 구슬을 얼릴 수 있죠."
어린 시절, 메이린은 이 구슬을 얼려서 자랑하고 다니면서 탑의 모든 어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메이린은 이 구슬이 좋았다.
선생님이 옆에 앉아 있는 세르네를 보았다.
"그럼 세르네 아가씨도 해볼까요?"
"네."
그녀는 태연하게 구슬에 손을 올렸다.
촤르르르르르륵!
선생님이 휘둥그레진 얼굴로 '허억!' 소리를 내더니 바닥에 나자빠졌다. 주위에 아이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빙제의 구슬이, 마치 빙하처럼 삐쭉삐쭉 솟아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코어를 개방한 성인 네크로맨서들도 불가능한 일을......!'
세르네가 고개를 들었다.
"됐나요?"
"......대, 대단하십니다."
세르네는 태연했지만, 그 모습을 보는 메이린은 잔뜩 부러운 듯한 시선으로 세르네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세리, 대단하다."
메이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르네가 눈을 깜빡이더니 빙긋 웃었다.
"별거 아냐. 조금만 연습하면 메이린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사실 세르네의 재능은 마법을 배운 순간부터 폭발하고 있었다.
영재 교육을 받은 메이린의 마법 수업 진도는 상당히 앞서 있었지만, 세르네는 1년도 안 되어 뛰어넘었다. 곧 코어를 개방해서 마법에 칠흑을 입힐 수 있게 되면 그 격차가 훨씬 더 벌어질 거라고 말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세리!"
이대로 뒤처질 수는 없었다. 메이린이 두 주먹을 앙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네가 받은 빙결 마법 과제 말야. 나도 가르쳐 주면 안 될까? 지금 바로!"
"응?"
세르네가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나한테 배우려고? 하지만 메이린은 상아탑 후계자잖아."
"에이, 그게 뭐가 중요해! 가르쳐 줘! 나도 더 잘하고 싶어!"
"아. 응.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고마워 세리!"
메이린이 세르네를 와락 끌어안았다. 세르네도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럼 어디서 할......."
"세르네 아가씨!"
상아탑의 마법사들이 헐레벌떡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탑의 장로들께서 찾으십니다."
"아, 그래요?"
세르네가 메이린을 돌아보았다.
"미안해서 어쩌지."
"......아, 아냐!"
메이린이 애써 웃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얼른 갔다 와, 세리!"
"응. 갔다 올게."
최근 세르네는 어른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절대적인 재능이었으니 당연했다.
-천재라는 말도 아까울 지경이군!
-이 마법! 이건 해볼 수 있겠느냐!
-세상에! 정말로 해냈어. 돌아가신 스승님! 보고 계십니까!
하나를 가르쳐 주면 스물을 깨달았다.
그녀의 재능은 가히 하늘에 닿았다.
그리고 자연히 이런 이야기도 들렸다.
-물론 후계자인 메이린 아가씨도 훌륭하지만.......
-상대가 나쁘군.
-비교하는 게 우스울 지경이오.
세르네가 처음 들어왔을 때, 밑바닥 출신이라며 혀를 찼던 어른들은 그녀의 재능에 매료되고 있었으며.
-세르네! 안녕!
-잘 지냈어? 같이 도시락 먹으러 갈래?
세르네를 거렁뱅이 출신이라고 놀리던 아이들은 이제 세르네만을 따랐다. 남자아이들은 누구나 그녀를 짝사랑했고, 여자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마음을 열고 세르네를 받아주었던 메이린 곁에는 이제, 세르네뿐이었다.
"어르신들이 불러서 갔는데, 별거 아니었어."
세르네가 쿡쿡 웃었다.
"그냥 또 마법시연이더라."
"......그, 그래?"
메이린은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모든 건 세르네의 실력이 뛰어나서 벌어진 일일 뿐이다. 세르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메이린은 자기 자신만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있지. 세리."
"응."
"상아탑주 자리 말야."
"응."
"어른들이......."
그녀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나보다 세리 네가 더 어울린다고......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
덥석.
세르네가 메이린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메이린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약속했지?"
세르네가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말, 기억나?"
"......아, 응."
"뭐라고 했지?"
메이린이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날 상아탑주로 만들어준다고."
"맞아."
세르네가 비로소 빙긋 웃었다.
"어른들이 뭐라 하든, 상아탑주는 너야. 메이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기할 것도, 질투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고. 상아탑주로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진정으로, 누구보다 응원해 주는 아이였다.
"고마워, 세리."
메이린은 울음을 터뜨리며 세르네를 끌어안았다.
* * *
다음 날 아침.
메이린은 총총걸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어른들에게 심부름을 하나 받았다. 상아탑주에게 책을 전해주고 오라는 거였다.
메이린은 내심 좋았다. 이런 식으로도 탑의 지배자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아버지와 사이가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엄연히 탑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자고, 자신을 후계자로 내세운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상아탑주님은, 날 후계자로 만든 걸 후회하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상아탑주의 딸 세르네는, 상아탑 2,000년 역사를 통틀어 역대급이라고 불리는 천재였으니까.
'사실.'
메이린도 마음 한편으로는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세르네가 더 상아탑주로 적합하다는 걸.
어른들도 그렇게 말했고,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한번 정해진 후계자 자리는 바꿀 수 없지만, 세르네를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해 탑의 법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도 오가고 있었다.
-약속할게. 내가 널 상아탑주로 만들 거야.
-어른들이 뭐라 하든, 상아탑주는 너야. 메이린.
세르네라면 믿을 수 있다.
만약 탑의 법이 바뀌고 세르네가 후계자가 된다면, 메이린은 인정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상아탑주 후계자 자리를 거절하는 세르네를 자신이 설득할 생각도 있었다. 이번엔 이쪽에서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널 상아탑주로 만들 거야. 라고.
'하아.'
메이린은 뒤숭숭한 마음을 정리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그런데 상아탑주의 방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 와 있나?
메이린은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갔다.
"어째서죠? 아버님!"
날카롭게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 메이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리?'
언제나 기품 있고 차분하던 세르네가 저렇게 분노해서 소리 지르는 건 처음이었다.
호기심을 느낀 메이린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메이린은 그럴 실력이 안 돼요!"
쿵!
메이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거 보세요! 제가 빙제의 구슬을 이만큼 얼렸다구요! 메이린은 이렇게 못 해요!"
타이르는 듯한 상아탑주의 목소리가 한번 이어지더니, 세르네가 거칠게 외쳤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요!"
그날 메이린은.
"제가 상아탑주가 될 거예요!"
자신의 마음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게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