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65화
설원성.
텅!
"어째서 못 돌아간단 건데요?"
메이린이 격분한 얼굴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들썩! 하고 서류들이 한 차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그녀가 손끝에 힘을 주어 뒤를 가리켰다.
"분명 얼음 몬스터들의 심장 500개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다 모아왔다고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얼음덩어리들이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무려 3일 동안 설원성에 돌아오지 않고 야영하면서 밤샘 사냥을 한 결과였다. 일찍 돌아가서 시험공부를 하겠다는 메이린의 집념은 무시무시했다.
"메이린 학생."
그러나 그녀를 상대하는 설원성의 원로는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음 몬스터의 심장을 모아오라고 했지, 다 모아온다고 파견을 끝내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다음은 위험도 3급 몬스터 프리즈니의......."
"아니, 진짜아!"
그녀는 답답함에 테이블을 연달아 내리쳤다.
"사실 5일 만에 500개를 모으란 것부터가 말이 안 됐는데! 죽니 사니 개고생해서 모아왔는데, 이제 와서 또 새로운 임무라고요?"
"처음부터 단계별 임무를 부여할 생각이었습니다."
뻔뻔한 낯으로 그런 이야기를 중얼거리는 원로를 보며 메이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데요!"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설마 설원성주 라헤임! 1학년 때 걔 깠다고 저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성주님의 학교생활과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는 설원성이 알지도 못하고, 이번 파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키젠에 항의할 거예요! 파견지에서 부당한 요구를 받았다고!"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의 상황에 맞춰 파견내용을 일부 조정하는 건 파견자의 권한입니다."
냉정하게 내뱉은 설원성의 원로가 눈을 크게 떴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메이린 학생. 일이 끝나기 전엔 키젠으로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 * *
상아탑 세력의 본탑.
꼭대기 층, 상아탑주의 집무실.
"오늘 재미있는 보고가 들어왔더군."
펄럭.
그곳에는 긴 수염에 초췌한 얼굴의 상아탑주가 서류를 펼쳐 들고 있었다.
"68층에 갑작스러운 역사 재현이 발생. 그러나 학생회장 시몬 폴렌티아와 석차 4위 메리다 휴 이켈의 활약으로 방어에 성공. 현재는 수습 중."
그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네가 말한 대로, 대체 불가능한 아이로구나, 세르네."
휘이이잉-
눈부신 상앗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세르네가 창가에 앉아 탑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그 아이는 반드시 상아탑에 필요한 인재라고."
"하지만 너무 늦었지."
상아탑주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무명인 1학년 때 손을 썼어야 했어. 이미 학생회장까지 지냈으니 키젠에 대한 소속감은 두터울 게다. 무엇보다-"
상아탑주의 눈동자가 세르네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게 되면, 녀석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에게 칼을 겨눌 게야."
"......."
"이제는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픽 웃었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성격이 너무 나쁘신 거 아니에요? 아버지."
"세르네."
상아탑주가 냉정한 얼굴로 깍지를 꼈다.
"시간이 없다."
"알고 있어요."
"네 억지에 한 번은 넘어갔다만 이번만큼은 안돼."
그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실렸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불가피한 희생이다. 적어도 한 사람은 포기하거라."
"......."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가 내려왔다.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거죠? 저랑 메이린이 졸업할 때까지는 기다려 준다고 하셨잖아요."
"시간이 없다."
상아탑주는 재차 그렇게 말했다.
세르네의 눈동자가 집무실을 훑었다. 쓰레기통에 시뻘건 피로 적셔진 휴지가 보인다.
"건강이 악화되신 건가요?"
"이깟 병쯤은 20년 전부터 앓고 있었다. 문제는 대업의 시기야. 큰일은 본래 형편 좋게 우리 사정에 맞춰서 재단할 수 없다."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내 딸아, 우리가 증오하는 키젠을 대륙에서 지워 버릴 기회는 오로지 지금뿐이다."
"......."
키젠이라는 말에 그녀의 동공에도 다시금 불똥이 튀었다.
"놈들은 죄악의 대가를 치르고, 앞으로는 상아탑의 시대가 올 거다. 다시 옛날로, 대륙을 지배하던 상아탑의 모습으로. 모든 건 순조로울 게다."
그가 손바닥을 펼쳤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세르네."
"......."
그녀는 천천히 양아버지의 벗겨진 손을 붙잡았다.
* * *
시몬과 메리다의 고무적인 활약이 끝나고, 새벽이 찾아왔다.
탑에는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스윽. 슥.
시몬은 오늘도 역시, 발에 칠흑을 모아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탑에 온 이후 어느 때보다 긴장한 얼굴이었다.
다음 키젠의 임무 목적지는 76층.
무려 대량학살자 기르돈이 숨어 있는 지점이다.
현재 상아탑에서는 70층에서 90층까지 봉쇄하고 있다. 시몬은 상아탑의 방비를 뚫고 들어가, 기르돈을 피해서 76층의 목적지까지 도달해야 했다.
시몬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피온'일 때 쓰던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선은 원형계단을 타고 70층 근처까지 가보았다.
'아.'
70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벽으로 틀어막혀 있었다. 근처에는 '접근금지' 줄이 마구 처져 있고, 곳곳에 방어 마법진도 보인다.
오갈 수 있는 틈은 딱 마법진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수 있는 공간 정도. 그 위로는 경비들이 빽빽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시몬은 일단 상황만 파악한 후, 한 층 아래의 69층으로 들어왔다.
[도련님.]
푸드득!
아케뮤스가 창가를 통과해 날아왔다. 그러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70층부터 90층까지 모든 창문이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드나들 틈도 없습니다.]
"......역시 그런가 보네요."
기르돈은 공간계 흑마법이 특기인 네크로맨서다. 자신의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으니, 상아탑에서는 아주 약간의 틈이라도 차단했으리라.
더불어 아케뮤스는 바깥에 탑을 감싸는 형태의 '거대 결계'가 펼쳐져 있다고 보고했다. 창밖으로 날아갈 수는 없고, 탑의 벽면에 붙어서 이동하는 정도만 가능하다고 했다.
[통신은 물론, 텔레포트도 차단하는 결계입니다. 외부에서의 간섭은 불가. 오로지 탑 내부에서의 통행만 가능합니다.]
보고를 들은 시몬이 팔짱을 끼며 고민에 빠졌다.
"밖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고.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피어."
[크흐흐, 기르돈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는 건 어떤가?]
피어의 분신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르돈이 그렇게 앞뒤 안 가리기로 유명한 놈이라면, 놈의 악명을 역으로 이용해 경비들을 흔드는 거다.]
시몬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 발상이 좋은데요? 계속 말씀해 주세요!"
* * *
70층.
상아탑의 경비들이 70층의 출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들은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오늘도 철야구먼."
"시간의 축제라서 연차도 냈는데, 이게 대체 뭔 꼴이야."
기르돈 사태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만 고생하고 있었다.
경비들이 푸념을 늘어놓으며 투덜거리고 있는 사이, 질서정연한 발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교대다."
드디어 자러 갈 수 있다.
경비를 서던 사람들은 피곤한 얼굴로 장비를 챙겼다. 교대자 몇몇은 가볍게 잡담도 나누었다.
"아직 놈을 잡았다는 소식 없어?"
"어, 그래. 꼭꼭 숨어버린 모양이야. 방 하나하나 전부 뒤지고, 벽면의 빈틈이나 무늬마저 훑어보고 있다는데 쉽지 않다더군."
"그것참."
"조심해, 피투성이로 실려 간 사람들이 꽤 되니까."
경비들이 전파사항을 주고받고 근무교대를 하려는 그때.
콰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바닥이 뒤흔들렸다.
"무슨 소리지?"
"어디서 폭발실험이라도 하는 이상현상이라도 나왔겠지 뭐."
쿠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아앙!
그런데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70층을 지키는 경비대장의 눈이 부릅떠졌다.
"기르돈이다!"
"예?"
"제기랄, 뭐겠나! 놈이 바닥을 부수고 탈출하려는 게 틀림없어!"
기르돈이란 말에 모두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경비대장이 지팡이를 뽑아 들었다.
"입구를 지키는 최소한의 인원만 빼고 모두 따라와!"
"예!"
경비대장과 병사들이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남은 경비들은 긴장한 얼굴로 70층의 출입구를 지켰다.
그들은 정면이나 좌우, 위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꽈아아아앙!
폭발은 뜬금없이, 아래의 69층 쪽 입구에서 터졌다. 순식간에 주위가 폭연으로 뿌옇게 뒤덮였고 경비들은 콜록거리며 혼란에 빠졌다.
"뭐야? 갑자기!"
촤아아아악-!
찰나의 순간, 깃털 뭉치처럼 생긴 뭔가가 입구에서 폭연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경비들은 그것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바, 방금 봤어?"
"뭘?"
"뭔가 새까만 게......!"
그 순간.
천장의 자욱한 어둠에서 기둥이나 가구 따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비들이 일제히 방어 마법진을 펼쳤다.
"기, 기르돈이다! 기르돈이 확실해!"
"공간계 마법으로 입구를 공격하고 있다! 지원 요청을!"
콰콰콰콰쾅!
쿠쿠쿵!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사이 시몬은 날개를 펼친 아케뮤스의 품에 안긴 채 날아가고 있었다. 방금 아공간에서 떨어뜨린 건 아래층에서 구한 기물들이었다.
바닥에서 난 소음도 사실, 아래층에서 좀비를 붙여넣고 시체폭발로 터뜨렸을 때 나는 소리였다.
"계획대로 성공했네요, 피어!"
[크흐흐흐! 하지만 70층의 경비가 더 삼엄해질 거다.]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죠."
시몬은 아케뮤스의 힘으로 고속비행하여, 순식간에 목적지인 76층까지 도달했다.
"지원 요청! 지원 요청!"
"70층에서 기르돈의 습격입니다!"
76층을 수색하던 경비들도 아래의 소란을 듣고 알아서 빠져주었다.
시몬은 기둥 뒤에 숨어서 그들이 갈 때까지 기다린 뒤,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엄청 어둡네.'
주위는 조명 하나 없이 새까맸다. 이런 곳에서 아케뮤스의 비행은 힘들어 보였다.
"여기서부턴 저 혼자 움직일게요."
[예, 도련님.]
아케뮤스가 내뿜는 강력한 칠흑은 탐지마법에 들킬 염려가 있었다.
그를 아공간에 들여보낸 시몬은 홀로 어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음.'
76층.
시꺼먼 어둠.
일말의 인기척도 없는 까마득한 정적.
무엇보다 기르돈이 있는 구간이라는 생각에 괜히 긴장하게 된다.
시몬은 최대한 살금살금 걸어갔다.
'76층 10호 방이라고 했지?'
시몬이 시간을 들여 구석구석 방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
바닥에 노란 액체가 고여 있는 게 보였다.
또옥.
똑.
천장에서도 그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뭔가 고약한 냄새가 났다.
'어, 잠깐. 이거.......'
시몬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액체가 떨어지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천장에 뭔가 새까맣게 붙어 있다.
시몬은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벽면에 찰싹 달라붙었다.
'기, 기르돈?'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다행스럽게도 기르돈은 아니었다. 천장에 붙어 있는 건 시간의 탑 몬스터의 시체였다
안면 부분이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다.
'아니, 누가 저걸 천장에 박아 넣었.......'
[키젠.]
쇠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났다.
[냄새가 난다.]
천장이 아니라 벽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시몬은 등골에 오르는 오한을 느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쿵! 쿵! 쿵!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입술을 꾹 깨물며 칠흑을 일으켰다.
'끄응, 군단의 힘을 쓰면 싸울 순 있긴 한데!'
지금 여기서 싸우면 들킬 수밖에 없다. 상아탑 측 경비들이 모조리 이리로 몰려올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몬이 이를 악물고 전투를 준비하려는데, 뭔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벽면에 토끼 가면이 걸려 있었다.
'시간의 유령이 보내는 신호야!'
시몬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가면이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면은 마치 방향을 알려주듯, 벽면을 타고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쿵! 쿵! 쿵! 쿵!
그러나 시몬을 뒤따라오는 발소리도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따라잡힌다.
시몬이 칠흑을 밟고 뛰어올라 좁은 길목으로 들어온 순간.
'?'
촤아아악!
동시에 벽면에서 튀어나온 두 개의 손이 시몬의 입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