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71화
상아탑 10층의 벽면에는 대형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마법식.
-천 년이 지나도 완전히 해석하지 못한 마법계 희대의 미스테리.
호사가들의 칭송을 받는 이것의 정체는 100층짜리 탑 전체를 원하는 장소로 움직이는 마도시대의 기술, '이전 마법'이다.
300년 전 게이트 사태로 이 마법진 또한 손상됐지만, 이를 복원하는 건 상아탑의 숙원사업이었다. 수많은 시간과 자본을 들인 끝에 현재는 기어코 복원에 성공했다.
"열전달 수치 정상입니다!"
"정화수 충분히 넣었는지 확인해!"
시간의 탑 10층에는 '이전 마법 복원 센터'가 있다. 상아탑의 학자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마법진의 설정값을 바꿔가면서 최적의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
"여기는 이전 마법 복원 센터! 여기는 이전 마법 복원 센터! 응답해 주십시오!"
통신 수정구를 든 채 열심히 통신을 시도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센터장님! 탑주님과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탑 밖으로 나가신 게 아닌지......."
이곳의 책임자가 표정을 굳혔다.
"그럴 리가 있나. 분명히 100층에 계셨는데."
"시간의 탑 결계가 외부의 통신망을 차단하니 그런 추측밖에는...... 계속 시도해 보겠습니다!"
센터장이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우웅! 웅!
그때 새로운 통신 수정구가 울렸다. 상아탑주 베르무드에게 통화를 시도하던 학자가 얼른 새로운 통신구를 손에 들었다.
치직!
-여기는 세르네 아인다르크. 응답하세요.
연락을 받은 학자는 물론, 주위의 학자들까지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상아탑주의 딸이자, 악명 높은 공식 후계자 세르네의 통신이었다.
"여, 영광입니다 세르네 아가씨! 여기는 이전 마법 복원 센터입니다!"
-아버지의 지시입니다. 계획대로 키젠의 로크섬으로 시간의 탑을 이전하세요.
통신을 받은 학자가 뒤를 보며 손짓하자, 다른 동료들이 허겁지겁 자리로 되돌아갔다. 학자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예.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
멀찍이서 연락을 듣고 있던 센터장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왜 상아탑주 본인이 아니라 딸이 지시를 내리는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아직도 세르네가 살아 있는 거지?'
이곳의 학자들은 부분적인 사실들만 토막 내어 알고 있을 뿐, 대부분은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이다.
하지만 센터장은 상아탑주가 직접 심어놓은 심복.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본래는 메이린을 희생시킬 생각이었지만, 세르네 본인이 자처해서 '절대봉인'을 해제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 가지 더.
세르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로크섬 내 이전 좌표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죠?
"키젠 교정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좌표 위치를 변경하도록 하세요. 교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금지된 숲'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금지된 숲의 중앙구역으로 좌푯값을 변경하세요.
통신을 받은 학자가 의아한 듯 눈을 끔뻑거렸지만, 말단인 그가 높으신 분들의 결정에 의문을 품는 건 사치였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결과에 따른 책임도 그들이 질 것이다.
"알겠습......."
"잠깐, 내가 받지."
센터장이 직접 다가와 수정구를 받아들었다.
"이전 센터장 헤시온입니다. 세르네 아가씨."
-아, 오랜만이에요. 헤시온.
"상아탑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왜 아가씨가 지시를 내리고 계시는지요?"
-기르돈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아버지께서 제게 지휘를 맡기고 잠깐 내려가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지만, 센터장 헤시온은 더더욱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데 대놓고 얼어붙은 시계니, 당신이 어떻게 살아 있느니 하는 걸 물어볼 수는 없다.
"아가씨, 상아탑주님과의 연락이 갑자기 끊겼습니다."
-전투 중이신가 보네요. 기르돈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니까요.
"우리 센터는 상아탑주님의 명령만을 따릅니다. 상아탑주님이 돌아오시면 그때 다시 연락을......."
-아버지가 기르는 개 따위가.
센터장이 움찔했다.
통신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릴 뿐이지만, 그녀의 음성에는 거스르기 힘든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아버지가 조금 귀여워해 줬다고, 사리분별도 못 하고 감히 이를 드러내? 내가 당장 10층으로 내려가면, 그때도 그렇게 고개 쳐들고 꽥꽥 떠들 수 있는지 볼까요?
주위의 학자들이 식겁한 표정으로 센터장에게 그만두라는 사인을 보냈다.
세르네의 잔혹한 성격이야 상아탑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찍혀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가, 허름한 할렘가 같은 곳에 폐인으로 발견됐다는 이야기는 흔했다.
"......일은 일입니다. 아가씨."
센터장도 몸이 떨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상황이 너무 수상했다. 절대 물러설 수는 없었다.
-센터장 헤시온.
"예."
-대면 보고를 위해 직접 100층으로 올라오도록 하세요. 마법진 엘리베이터의 사용은 금지합니다.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계단을 올라오세요.
"......!"
센터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주위의 부하들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런 종류의 권력다툼에 얽히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명령이에요.
"......알겠습니다."
센터장이 통신 수정구를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까 통신 받았던 분?
한 학자가 식겁하며 달려와 통신 수정구를 들어 올렸다.
"예, 예! 말씀하십시오!"
-임시 센터장으로 임명합니다. 탑의 이전에 성공하면 그 자리는 앞으로도 당신의 것이겠죠.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물들었다.
상아탑 내에서도 가장 미래가 창창하다는 세르네 라인에 들 기회, 이건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학자는 저기 네발로 기어가고 있는 선배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장 탑을 이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대기하세요.
"예!"
과연 정신계에 특화된 네크로맨서답게, 그녀는 깃털도 쓰지 않고 혓바닥만으로 조직과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센터는 세르네의 지시에 움직였다.
"출력 최대로 높였습니다!"
"정제마법 가동 준비 완료!"
"언제라도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학자가 통신 수정구를 들고 보고했다.
"여기는 이전마법 복원 센터! 세르네 아가씨, 지시만 내려주시면......."
콰아아아아아아앙!
갑자기 시뻘건 용암의 파도가 밀려들어 통신 수정구를 든 학자를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렸다.
쏴아아아아!
용암은 10층을 순식간에 뒤덮으며 마법진에 손대고 있던 학자들을 모조리 휘감아 없애 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던 학자들도, 지팡이를 꺼내던 자들도, 모두 용암에 뒤덮여 녹아 사라졌다.
"허, 허어억!"
센터장 헤시온이 식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10층 전체가 용암바다로 변했다. 벽면까지 올라온 용암에서는 뱀의 머리 같은 게 혓바닥을 내밀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헤시온.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상아탑주, 베르무드였다.
"타, 탑주님!"
"계획이 틀어졌다."
베르무드가 입을 열었다.
"키젠의 학생회장, 시몬 폴렌티아가 '얼어붙은 시계'를 장악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방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세르네가 그에게 협력했던 모양이군. 세르네는 배신자다."
그가 부글부글 끓는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할 것도 없다. 얼어붙은 시계는 만만한 힘이 아니야. 시몬 폴렌티아가 정말로 그 힘을 흡수했다면 오래 견디지 못하고 폭주할 거다."
베르무드가 고개를 돌렸다.
"시몬 폴렌티아가 폭주하면 계획대로 폭탄이 된 놈을 시간의 탑에 방치한 채 로크섬에 던져놓는다. 내가 명령하면, 너는 이전 마법을 원래 좌표로 작동시키고 빠져나와라."
그가 새로운 통신 수정구를 던져주었다. 그것을 붙잡은 센터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시몬 폴렌티아가 폭주하지 않거나, 그 전에 세르네가 그를 죽인다면."
베르무드가 싸늘한 눈으로 읊조렸다.
"이번 사건의 관련자들을 모두 없애겠다. 초대객들은 물론, 키젠에서 온 꼬마들과 상아탑 키즈, 시간의 탑에서 일하는 경비들과 학자들까지 전부."
"그, 그러면......."
센터장이 덜덜 떨며 말했다.
"세르네 아가씨는......."
베르무드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세르네는 내 손으로 심장을 뽑아내어 잘근잘근 씹을 것이다."
화아아아아악!
그의 전신이 용암처럼 물들더니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순식간에 천장을 박살 내고 11층으로 올라가더니, 12층, 13층, 14층까지 계속해서 천장을 박살 내며 전진해 나갔다.
'......역시 대단하군.'
상아탑주가 가는 길에, 거대한 용암의 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 * *
100층.
세르네가 들고 있는 통신수정구에는 용암이 들끓는 소리만 들렸다. 이내 저쪽의 통신수정구도 파괴됐는지,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아깝네요."
세르네가 혓바닥을 달싹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성공이었는데."
"상아탑주가 우리 예상보다 빨리 들어왔으니까, 어쩔 수 없지."
바닥에 꽂은 파멸의 대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시몬이 말했다.
"일단 탑 전역의 원형계단을 틀어막았어. 시간 끌기 정도는......."
세르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사람이라면 그냥 천장이라도 뚫고 올 거예요."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시간의 유령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몬이 그를 돌아보았다.
"참,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됐어요? 탑의 미래가 보여요?"
[음? 아, 그래. 조금씩 어둠이 걷혀가고 있는 것 같으이.]
"다행이네요."
[그보다, 자네. '얼어붙은 시계'의 힘을 쓰고 있는데 정말로 몸에 문제는 없나?]
시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어지럽고 매스꺼운 것 빼면, 특별히 없는 것 같은데요? 예전에 이 기술을 썼을 때랑 비슷한 증상이에요."
[......흐음.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만.]
시몬이 대검 손잡이를 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내가 던전을 움직여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볼게. 세르네, 그동안 넌 최대한 회복에 전념해 줘."
세르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노력해 볼게요."
절대봉인을 풀고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만, 여기서 세르네의 지원이 없다면 오래 버틸 수 없다.
"일단 던전을 통제해서 막아보고, 안 되면 군단을 꺼내서라도......."
핑-
갑자기 시몬의 시야가 거꾸로 뒤집혔다. 세상이 세 갈래로 흩어져 보이더니,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시몬?"
[......역시 그렇군. 그토록 큰 힘을 다루는데 문제가 없을 리가 없지.]
시간의 유령이 얼른 앞으로 다가왔다. 시몬은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서 그 검에서 손을 떼게! 지금 던전을 통제하는 게 문제가 아니야!]
"그, 그게......!"
시몬이 눈을 부릅뜬 채 헉헉 숨을 내쉬었다.
"아, 안 떼져요! 손이 검에 달라붙은 것처럼......!"
키이이이이이잉!
파멸의 대검에 황금색 원이 연달아 펼쳐졌다. 대검이 파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빛 스파크를 튀겼다.
"시몬?"
"가까이 오지 마!"
시몬이 버럭 소리 질렀다.
온 힘을 다해 대검을 손에서 떼어내려고 했지만, 황금색 원이 대검을 지나 시몬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우듯 휘감았다. 이내 황금색 원이 시몬의 머리와 가슴, 팔다리까지 점령했다.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시몬의 전신에서 시곗바늘 소리가 들렸다.
"윽, 아아아아아악!"
시몬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마구 흔들리는 앞머리 사이로, 그의 두 동공이 시계의 형상으로 바뀌며 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시계다! 놈이 검 안에서 폭주하면서 시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야!]
시간의 유령이 외쳤다.
피어도 즉각 나섰다.
[소년! 내 말 들리나? 사념을 이용해라! 내게도 부담을 양분해!]
피어가 사념으로 시몬을 케어했지만, 얼어붙은 시계의 폭주는 강인한 군단장의 정신력으로도 버티기 어려웠다.
"크으윽!"
쿠구구구구구구!
100층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돌파편이 떨어지고 바닥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네! 지금 당장 던전주의 권한으로 이 탑을 파괴하게!]
시간의 유령이 소리쳤다. 시몬이 고통을 견디면서도 그를 보았다.
"하지만 이 탑을 파괴하면......!"
[어쩔 수 없네! 이대로는 나는 물론 자네들까지 모두 죽을 걸세!]
"시몬!"
크읍!
시몬이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던전을 파괴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다.
치직!
칙!
시몬의 몸이 이상현상처럼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어갔다. 그가 고통스럽게 고갯짓을 하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잔상이 마구 일어났다.
"아!"
세르네의 눈이 커졌다.
잔상이 점점 크고 심해지더니, 시몬의 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키 작은 꼬마 시절의 시몬, 나무를 캐는 순박한 시골소년 시몬, 키젠 1학년 시절의 시몬도 보였다. 심지어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 시몬의 모습도 있었다.
"시몬의 시간이......!"
이대로는 위험했다. 세르네는 회복을 중단하고 뭐라도 해보려 깃털을 뽑았다.
-기다려.
"!"
제삼자의 목소리에 세르네의 동작이 멈췄다.
파직!
지지지직!
사방에서 자줏빛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시몬의 상태를 제어했다. 폭주하던 시몬의 상태가 거짓말처럼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갓난아기 시몬, 산골소년 시몬 등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며 마지막으로 남은 건 시몬의 본체. 그리고 키가 큰 남자였다.
-여기 시간의 탑이지? 이럴 줄 알았어.
세르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시몬과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힘.
'......이 남자.'
그냥 강하다는 수준이 아니다. 온몸에 전율이 일고 소름이 끼쳤다.
세르네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 얼이 빠져서 말했다.
"누구......신가요?"
-아.
깎아내린 듯한 푸른 머리카락의 미남자는 세르네를 보고는 놀란 듯 눈이 커졌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인걸, 세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