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575화 (575/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75화

<판타서스 오리지널 - 무아몽중(無我夢中)>

'시작됐군.'

판타서스에 대해 알고 있는 베르무드는 누구보다 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벌써부터 공기가 축축하고 무거웠다. 의복과 머리카락이 흠뻑 젖었고, 바람 대신 물살을 가르는 촉각이 느껴진다.

'무아몽중이 완전히 발현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베르무드가 허공에 손짓했다.

이에 세상이 응답하듯 100개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흑마법을 장전하고, 방향을 지정하고, 장애물에 의한 변수를 판별했다.

뒤이어 수만 갈래의 빛줄기가 찬란하게 쏟아지려는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아!

그보다 앞서 세상이 시퍼렇게 변했다.

블루 스크린(Blue Screen).

이 기술에 당한 네크로맨서들은 모두 그렇게 불렀다.

베르무드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틈 사이로 물방울 몇 개가 흘러나왔다. 기껏 만들어놨던 백 개의 마법진이 마치 물에 녹아드는 소금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믿기지 않는군.'

그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꿈을 현실에 실체화하는 저주라니.'

세계는 물에 잠겨 있었다.

베르무드는 스스로 호흡 마법을 걸고는 전방을 응시했다.

바다가 만들어지고, 바다는 생명을 잉태했다. 바다 곳곳에서 끔찍한 괴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맣게 소용돌이치는 물고기 떼, 운동장만 한 크기의 가오리, 전류를 쏟아내는 해파리, 이빨이 삐쭉삐쭉 솟아난 심해어.

마치 어린아이가 색연필을 들고 빈 도화지에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것처럼, 그 어떤 생물학적 특징도 찾아볼 수 없는 괴기하기만 한 괴물들이다.

[.......]

[.......]

그것들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만 개의 빛나는 눈으로 베르무드를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다.

'존재할 수 없는 괴기.'

만마(万魔)가 베르무드를 향해 물거품을 일으키며 밀려들었다.

'이곳은 놈의 세계다. 놈의 세계에서 내가 이기는 방법은.'

베르무드의 몸이 용광로에 달궈진 금속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안에서 내 세계를 구축하는 것뿐.'

화아아아아악!

그의 전신에서 분화구가 생겨나 용암을 내뿜었다. 검은 바다의 한복판에 태양이 떠올랐고, 몰려드는 물고기 떼는 고열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더 고통스럽게.'

베르무드의 눈이 번들거렸다.

'고통이야말로 내 원천이다!'

푸른 바다에 붉은 에너지가 점점 더 확산해 갔다. 괴어들은 생성되는 족족 용암과 고열에 휘말려 사라져 갔다.

콰콰콰콰콰콰-!

자신의 꿈에서 상대를 익사시키려는 판타서스와. 상대의 꿈에서도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려는 베르무드.

이미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괴물들의 싸움이었다.

'보고 받은 바에 따르면, 무아몽중의 가장 큰 단점.'

베르무드가 한 짝만 남은 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판타서스에게로 향했다.

'꿈을 꾸는 동안에는 움직일 수 없다.'

지금까지 베르무드가 꺼낸 마법진 중에서 가장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베르무드 오리지널 - 디아볼로스(Diabolos)>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붉고 가느다란 팔이었다.

세 손가락을 가진 악마의 팔이 가부좌를 튼 판타서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를 지키려는 고래와 괴생명체들이 막아섰지만, 디아볼로스는 상쇄할 수 있는 종류의 흑마법이 아니었다.

악마의 팔은 단지 '닿는 것'만으로 괴생명체들을 파괴했다. 함께 있던 시몬과 세르네가 대검을 휘두르고, 깃털을 날려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쿠웅―!

육중한 충돌음과 함께, 판타서스가 악마의 팔에 짓눌려졌다.

'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흐하하하하하하하!"

주위를 이루던 바닷물이 말라가고, 괴생명체들도 뼈만 남아 사라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심취한 듯 광소하고 있던 베르무드는.

스걱―!

자신의 몸에서 통증을 느꼈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피부를 뚫고 근육을 절단하며 피를 가르는 감각.

용암으로 전신을 뒤엎고 있어도, 베르무드는 새로운 통증을 인지해 냈다. 그의 모든 오감이 방금 인지한 고통에 집중하는 순간.

촤아아아아아아악!

세상이 비틀리며 바뀌었다. 마치 죽음을 연상케 하는 하얀 대검이 그의 어깨를 타고 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베르무드는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피해냈다.

그를 급습한 건 다름 아닌 시몬이었다. 어깨에는 세르네가 깃털을 모아 만들어준 인공 날개를 달고 있었다.

'살짝 얕았어!'

시몬이 입술을 깨물었다.

화르르륵!

베르무드도 용암으로 검을 만들어 휘둘렀다. 시몬도 지지 않고 파멸의 대검을 휘둘렀다.

까앙! 깡! 채애애앵!

백색과 적색의 궤적이 정신없이 부딪히며 굉음을 터뜨렸다.

'믿을 수 없군.'

베르무드가 인상을 구겼다.

정신을 차리니 무아몽중은 여전히 발동 중이었고, 악마의 팔은 애꿎은 바닥을 때리고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판타서스와 그 옆에 서 있는 세르네는 한참을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판타서스를 죽였던 기억은 단순히 '꿈'에 불과했다.

'내가...... 졸았다고?'

전신에 2천 도가 넘는 용암을 끼얹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졸음을 느끼고 잠을 잔다는 게 가능한가?

까아아아앙!

중앙에서 거칠게 검을 부딪친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세르네!"

시몬이 외침에, 깃털 날개에 광채가 번뜩였다. 시몬의 몸이 하얀 꼬리를 남기며 원을 그리듯 우회하더니 단번에 오른쪽으로 치고 들어왔다.

베르무드도 그 움직임에 집중하며 눈으로 훑었다.

아직 아기 군단장이라지만 군단장은 군단장. 방심하면 순간에 당한다. 번거로운 용암검은 없애 버리고는, 손바닥 앞으로 대형 마법진을 펼쳐서 다가오는 시몬을 향해 겨누었다.

파슥-!

그런데 오른쪽이 아니라 왼팔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페이크!'

베르무드는 이번에도 고통을 이용해 꿈에서 빠져나왔다.

시몬은 왼쪽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베르무드가 시몬의 칼날의 진행방향을 예측하고 몸을 비틀어 검격을 빗겨냈다.

'이게 인간의 반응속도야?'

시몬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썩어도 상아탑주는 상아탑주. 괜히 한 세력의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화르르르르륵!

시몬이 다급히 파멸의 대검을 앞세워 베르무드가 반격으로 내뿜는 용암을 받아냈다.

"크윽!"

용암을 파훼한 파멸의 대검이 선명한 녹색으로 변했다.

"부탁해 칼!"

시몬이 힘껏 대검을 휘둘렀다.

<칼 오리지널 - 이매망량(魑魅魍魎)>

커엉!

컹! 컹!

시몬이 검을 휘두른 방향으로 극독의 맹견들이 수십 갈래로 뻗어 나갔다.

베르무드는 정면만 가리는 방어 마법진을 펼쳤다가, 이내 칠흑을 더 들여 전신을 감싸는 방어 마법진을 만들었다.

퍼어어어엉!

퍼어엉!

이번엔 방향이 정면이 맞았다. 독이 방어 마법진을 훑으며 녹아내리는 사이, 시몬이 다시 공중으로 치솟았다.

"하아아아아!"

그러고는 고속으로 하강하며 머리 위로 치켜들었던 대검을 내리그었다.

'위에서? 아니면......!'

반격 마법을 장전한 베르무드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때.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뒤!'

화아아아아아아악!

그의 왼손에서 용암이 뻗어 나가 후방을 불태웠다.

-바보~

세르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2천 도에 달하는 대량의 용암은 그의 허리에 달라붙은 깃털 한 장을 불태울 뿐이었다.

-몇 번을 속는 거예요? 아버지.

'망할!'

통각에만 의존하고 있는 걸 세르네에게 읽혔다.

베르무드가 급히 몸을 옆으로 젖혔지만.

촤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제대로 적중했다. 베르무드 하나 남은 왼팔까지 파멸의 대검이 내리그으며 날아갔다.

"끄아아아아아악!"

고통스러워하던 베르무드가 절단된 두 팔에서 피를 철철 쏟아내며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시몬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

팔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만 여기서는 승산이 없다.

이제 무아몽중은 물론, 이 던전의 지속시간도 다 끝나갈 터.

밖으로 나온 뒤에 싸워야 했다.

"크윽!"

시몬이 얼른 위로 도망치는 베르무드를 쫓았지만 베르무드의 속도가 더 빨랐다.

'이 기술만 깨지면 이길 수 있다.'

고도를 높이는 베르무드의 주위로, 던전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

짜악!

귓가에 울리는 손뼉 소리가 함께 세상이 거꾸로 바뀌며 역전되었다.

"좋은 꿈을 꾸었소?"

판타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느새 베르무드는 하늘이 아닌, 지면을 향해 스스로 낙하하고 있었다.

방향이 거꾸로 된 것이다.

그리고 정면에는 판타서스가 떡 하니 서 있었다.

베르무드는 판타서스를 향해 스스로 다가가는 꼴이었다. 가속 중이라 갑자기 멈출 수도 없었다.

"이젠 피할 수 없소!"

판타서스가 자세를 낮추며 손을 펼쳐 들었다.

"차라리 잘됐군!"

베르무드가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다시 한번 악마의 팔이 튀어나왔다.

<베르무드 오리지널 - 디아볼로스>

내친김에 이 힘으로 상대를 여기서 죽이면 그만이었다. 판타서스의 손에 칠흑이 휘감기는 모습을 본 베르무드가 말했다.

"무아몽중도 해제한 이상, 내게 슬립은 통하지 않네!"

"꼭 저주가 아니더라도 상대를 잠재우는 방법은 다양하오. 그중에서 으뜸은 이것!"

판타서스가 커다란 손바닥을 불끈 주먹 쥐더니, 굽힌 무릎을 펴고 날아올랐다.

"슬리이이이이입-!"

악마의 팔이 공중에서 판타서스를 향해 내려왔다. 판타서스가 허리를 비틀며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펀치!"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판타서스의 주먹에 악마의 팔이 수수깡처럼 꺾이고 그대로 베르무드의 안면에 꽂혔다.

베르무드의 안면이 일그러지더니 굉음과 함께 빛의 속도로 처올라간다.

그 충격파로 인근의 모든 모래가 하늘과 땅을 뒤바꾸듯 공중으로 치솟는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할 정도였다.

"하하하하하!"

바위만 한 주먹을 움켜쥐며 판타서스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퍼펙트-!!"

주먹 한 방에 누구든 100% 확률로 걸리는 슬립. 물론 영원히 잠에서 깨지 못하게 되는 슬립이었다.

하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몬은 어처구니가 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니...... 저 선배는 왜 슬립이 주 무기인 거야?'

* * *

모래의 세계의 지속시간이 끝나며, 다시 시몬 일행과 베르무드는 밖으로 돌아왔다.

대자로 뻗은 베르무드는 얼굴이 찌그러진 채 엎어져 있었다. 다리나 팔도 엉망으로 꺾인 상태였다.

몸을 유지하고 있던 흑마법도 모두 사라졌다.

"상아탑주. 베르무드 아인다르크."

판타서스가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좌우에는 시몬과 세르네가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길 말이 있소?"

"흐...... 흐흐...... 흐흐흐."

베르무드가 고개를 돌려 세르네를 바라보았다.

"역시...... 널...... 거두는 게...... 아니었......."

"남을 이용할 땐, 본인이 이용당할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하죠."

세르네가 빙긋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잘 가요, 아버지."

그녀의 깃털이 식어가는 베르무드의 위로 내려앉았다.

"당신의 자녀라서 엿 같았고."

깃털은 천 조각이 되어 얼굴을 가렸다. 다른 깃털은 꽃이 되어 그의 몸을 덮었다.

"다시는 보지 말아요."

세르네다운 마무리였다. 그녀는 등을 돌려 먼저 걸음을 옮겼다.

던전에서 빠져나온 뒤, 해는 완전히 떠오르고 있었다.

* * *

베르무드 아인다르크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사실 미래의 시몬의 공격을 받아 복부에 구멍이 뚫린 뒤로,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고통으로부터 오는 힘을 써서 억지로 연명했을 뿐이다.

아마도 그렇게 무리한 건 시몬을 붙잡아 결사에 가져다 바치기 위함이었겠지만, 판타서스의 등장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후, 상아탑 본부를 감싸고 있던 결계가 걷히고 그곳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무너진 시간의 탑과, 죽은 베르무드를 보고는 격노했지만 다행히 정신을 차린 다니엘라 빌렌느가 진술했다.

-모든 건 상아탑주의 계획이었습니다.

그가 메모리얼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10층의 이전 센터에서 손에 넣은 물건이었다.

-이번 사건의 관련자들을 모두 없애겠다. 초대객들은 물론, 키젠에서 온 꼬마들과 상아탑 키즈, 시간의 탑에서 일하는 경비들과 학자들까지 전부.

상아탑을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결사의 지시를 듣는 꼭두각시라는 이야기에 상아탑의 사람들은 극도로 분노했다.

거기에 다른 네크로맨서들과 초대객들의 증언까지 이어지며 베르무드의 악행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뒤이어 기다렸다는 듯 키젠의 요원들이 등장했고, 뒤이어 암흑연합에서 보낸 조사관들까지 들어와 수사를 시작했다.

시몬과 세르네도 조사에 응하느라 하루 내내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네프티스와 상아탑 본부 측에서 학생 대변인을 보내왔고, 두 사람은 간신히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두 사람은 나란히 공원 벤치에 앉아 무너진 탑의 잔해 쪽을 응시했다.

잠시 말이 없던 시몬이 물끄러미 그녀를 보며 말했다.

"다시 봤어."

"......뭘요?"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키젠을 도와 베르무드와 싸운 거요?"

"그것도 그렇지만."

시몬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특히 메이린 문제 말야."

세르네는 말없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해. 진심으로."

상아탑주를 만들어주겠다는 세르네의 약속은 하마터면 가장 슬픈 방식으로 이어질 뻔했다.

세르네가 '절대봉인'을 풀다가 희생당했다면, 자연스레 메이린이 다음 상아탑주가 됐을 것이다.

의외였다.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하는 그녀는 폭군이었다. 언제나 고고하고 프라이드가 높았지만, 동시에 제멋대로였고, 사람의 자유의지를 믿지 않았으며, 정서적으로 구멍이 뚫려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도 한 명의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순순히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

키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자신의 가장 큰 야망을 내려놓고, 누군가를 지키려고 결단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학교에 돌아가면, 내가 책임지고 메이린의 오해를 바로잡을게."

시몬이 말했다.

"메이린도 네가 했던 일들을 알게 된다면, 다시 사이가 좋아질 거야."

"아뇨."

하지만 세르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말아주세요."

"어, 어째서?"

그녀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에요."

시몬의 표정이 굳었다.

"메이린이 이대로 널 계속 오해해도 괜찮다는 거야?"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처럼 돌아가는 건 힘들지도 모르더라도, 적어도 메이린이 세르네를 증오하는 그런 관계가 이어져야 한다는 건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럼 질문."

세르네가 다리를 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린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당연히 멘탈이 갈기갈기 스크래치 나겠죠? 나한테 막 나쁜 말 했던 거 하나하나 다 떠오를 거고, 밤마다 몸서리칠 거예요. 앞으로 제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나 있을까요? 예전처럼 서슴없이 대하고 욕하고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숨 막힐 만큼 어색해질 것 같은데요."

"......."

"무엇보다, 메이린이 진실을 알면 날 꺾겠다는 명확한 인생의 동기도, 키젠에 들어간 이유도 사라져 버려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지금이 좋아요. 당당하게 마주 서서 날 꺾겠다고 열의를 불태우는 메이린이, 내게 당하면 분함에 울먹울먹하는 메이린이, 눈으로 욕하는 메이린, 땍땍대는 메이린, 얼굴 벌게지는 메이린. 그리고."

세르네가 천천히 시몬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시몬이 움찔하며 굳어졌다.

"이렇게, 시몬이랑 조금만 오붓한 척해도 길길이 날뛰는 메이린의 모습이. 저는 좋아요."

"......."

시몬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세르네의 희생은 당사자의 허락을 구하지 않은 그녀의 독단이다.

그것은 숭고한 희생인 동시에-

비틀린 애정이다.

메이린의 성격이라면, 차라리 세르네가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주는 쪽을 원했으리라.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냐며, 이런 짓을 하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며. 그렇게 희생하고 죽어버리면 내가 행복해질 것 같았냐며.

메이린은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동안 세르네의 말과 행동이 메이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도 사실이다.

지금이 좋다.

그런 세르네의 말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알았어. 네 뜻대로 할게."

"고마워요."

"그러니까......."

시몬이 망설이듯 입술을 들썩이다가, 이내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거지?"

정적이 일었다.

시몬은 잔뜩 긴장한 채로 그녀를 보았다. 시몬의 어깨에 기댄 채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세르네가 눈꺼풀을 내렸다.

"......그건,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상아탑주 베르무드가 죽었다.

그리고 차기 후계자는 그녀, 세르네.

그녀가 이제 상아탑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