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76화
일의 경과는 세르네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이번 사건의 주동자는 '결사'와 상아탑주 '베르무드'.
그리고 베르무드의 협력자인 센터장과, 급진파 최측근들이 억류되어 끌려가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암흑연합에서도 이번 사건을 상아탑 전체의 의지가 아닌, '일부 과격분자'들의 일탈로 해석했다. 베르무드가 본탑에 결계를 펼쳐 사람들을 가둔 게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한 모양이다.
이번 사태의 최대 공헌자는 누가 뭐래도 세르네 아인다르크.
양아버지인 베르무드가 결사라는 것을 간파하고, 마지막까지 그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 성공했다.
파견생이라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조력자 시몬을 불러들였고, 하마터면 키젠이 무너질 뻔한 악행을 정면에서 막아냈다. 마지막에 베르무드와의 결전에서 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 세르네가 차기 상아탑주 자리를 차지하는 건 확실시되었다.
상아탑 내부의 상황을 고려해도 마찬가지. 베르무드의 몰락으로 키젠에 적대적인 급진파의 위세는 크게 꺾이게 됐고, 키젠에 우호적인 다니엘라의 온건파가 권력을 잡았다.
다급해진 급진파에서는 세르네의 상아탑주 임명식을 서둘러야 한다며 애쓰고 있다.
온건파에서도 이번 사태 최대 공헌자인 세르네가 상아탑주 자리에 앉는 것만큼은 반대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런저런 뒷이야기는 나왔다.
-권력에 눈이 멀어 제 아비를 죽인 게요!
-결사니 뭐니 하는 건 다 핑계겠지. 양아버지를 끌어내릴 구실을 찾다가 운 좋게 얻어걸린 거야.
도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시몬은 진한 분노를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커다란 희생을 감수한 사람을 저렇게 쉽게 깎아내릴 수 있단 말인가.
시몬이 그들에게 따지려고 했지만, 세르네는 그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할 필요 없어요.
-넌 화도 안 나?
그녀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우리 안의 원숭이들이 뭐라고 떠들든, 관심 없으니까요.
시몬은 세르네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었다. 앞으로는 보기 힘들어질 테니 시몬도 그녀와 더 많이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안 가, 상아탑 측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세르네 님! 한참을 찾았습니다!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암흑연합 측에서도 면담요청이.......
그녀는 현재 상아탑의 총책임자였고, 사후처리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거기에 상아탑주 즉위도 앞뒀으니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녀는 눈꼬리를 휘며 웃음 지었다.
-그럼, 언젠가 또 만나요. 시몬.
조금은 얄미웠던 저 여우 같은 눈웃음.
시몬은 처음으로 그녀의 그 미소가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 * *
날이 밝자, 시몬은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키젠으로 돌아왔다.
메리다는 판타서스를 만난 김에 같이 지내다가, 마지막 날에 딱 맞춰서 복귀하기로 했다.
메리다는 갑자기 오빠에게 좋아하는 여자 있냐며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고, 판타서스는 얘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부인했다.
시몬은 하루 내내 시달려야 할 판타서스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어쨌거나 아직 하루의 여유가 있었다. 돌아오니 2학년 캠퍼스는 무척 어수선했다.
-들었어? 상아탑주가 사실 결사 측 사람이었대!
-결사라면 그 드레스덴 왕국을 뒤엎으려던 사람들 맞지?
-키젠 내부에도 있을까?
-......에이, 설마.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시몬은 그런 이야기들을 한 귀로 흘리며 덤덤하게 뒷정리를 위해 움직였다.
우선 피어의 유적으로 돌아가서 군단의 언데드들을 풀어놓았다.
수은에 당한 아케뮤스의 상처는 하루 만에 아물었고, 폭주한 시몬을 가라앉히느라 고생한 피어도 요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화이트의 조사를 맡긴 에르제베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화이트의 파견지까지 몰래 따라가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신성 방어학 교수, 파라한도 만나러 갔다. 새끼 고양이들인 하양이 까망이와 놀아주기도 하고, 곰 신수 아칼리온과 함께 신수학 트레이닝도 했다.
그리고 기숙사에 돌아와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토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당장 내일부터 듀라한 특강이니까 늦지 않게 돌아오길 기원했다.
사각- 사각-
빈 종이에 깃펜을 움직이며 필기하던 시몬은 몇 자 적지도 못하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하아.'
어쩐지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사실 모든 게 다 잘 해결됐다. 키젠도 무사하고, '결사'의 사악한 계획도 막아냈고, 메이린과 세르네도 살아 있고, 듀라한 특강 전까지 돌아왔는데.
왜 이렇게 기분은 착잡한 걸까.
'집중하자, 집중.'
시몬이 다시금 눈에 힘을 주며 깃펜을 손에 쥐었다.
* * *
다음 날.
소환학과 강의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니.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커다란 활기로 가득했다.
"돌아왔다아!"
"으으으- 죽을 것 같아! 새벽에 딱 맞춰왔어."
"파견 어땠어?"
"내가 진짜 와, 어떻게든 이 악물고 오늘까지 온다고, 막 온몸에 피 칠갑하고 진짜. 무슨 말인지 알지?"
무사히 특강 시작 전에 맞춰 돌아온 학생들은 신이 나서 와글와글 떠들었다.
시몬도 자리에 앉았다.
"안녕 회자앙!"
같은 10조 조원인 에슈가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시몬도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들었어 들었어! 난 나 들었지!"
그녀가 후다닥 달려와 시몬의 책상 위에 대뜸 걸터앉았다.
"너 이번 파견지가 상아탑이었다며? 대-박! 이번 상아탑 사태에 휘말린 거야?"
시몬이 쓰게 웃었다.
"뭐, 그렇게 됐어."
주위의 몇몇 학생들이 관심을 보였다.
"상아탑 사태가 뭔데?"
"그것도 몰라? 어제 암흑연합 전체가 발칵 뒤집혔는데!"
"방금 일하다 복귀했는데 어떻게 알아."
전날이나 오늘 복귀한 학생들은 아직 상아탑 사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호사가 성향이 짙은 에슈가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상아탑주가 '결사'였다고?"
"우리 학과 세르네의 아빠잖아!"
"회장! 상아탑주 얼굴 본 적 있어? 어떻게 된 거야?"
학생들의 관심이 시몬에게 집중되었다. 이번 상아탑 사태의 산증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으음, 괜히 어디 가서 이상한 이야기하지 말랬는데.'
이미 본부 측으로부터 입단속 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 뒤였다.
시몬이 흥분한 친구들을 진정시키려는데.
"미안한데, 잠깐만."
시몬을 둘러싼 학생들 사이로 불쑥 흑발의 소녀가 다가왔다.
로레인의 등장에 주위의 학생들이 갈라지는 파도처럼 물러섰다.
"나 좀 봐, 시몬."
"그래."
다른 학생들은 근질거리는 입을 억누르고, 강의실을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로레인은 시몬을 한적한 강의실 밖으로 데려왔다. 로레인은 근처의 작은 교내노점에서 커피를 받아오더니 시몬에게 건넸다.
"마실 거지?"
"응. 고마워."
두 사람은 마실 걸 하나씩 들고 한적한 건물 뒤편으로 들어왔다.
시몬은 간신히 한숨 돌리며 넥타이를 고쳐 맨 다음, 커피를 마셨다.
"?"
커피가 아니었다.
엄청나게 달았다. 정확히는 딸기맛 나는 음료였다.
"윽."
로레인 쪽도 혀를 내밀며 이마를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미안, 바뀌었어. 정신이 하나도 없네."
"쓴 커피는 잘 못 마시는 거야?"
시몬이 큭큭 웃으며 음료를 교환했다. 그녀가 웃지 말라는 듯 눈에 힘을 주자, 시몬은 슬쩍 딴청을 피우며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상아탑 건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좋아."
로레인은 시몬이 군단장인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대부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세르네와 메이린의 프라이버시 쪽은 제외하고, 일의 경과 위주로 간략하게 설명했다.
"......결사. 생각보다 더 위험한 자들이었네."
로레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간의 탑을 폭주시켜서 로크섬에 던지려고 했다니."
시몬이 팔짱을 끼며 말을 받았다.
"혈천교, 타라도스, 드레스덴 왕국, 그리고 이번 상아탑까지. 대륙의 뒤편에 숨어있던 결사가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고 생각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신성연방의 성녀들?"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프리스트들은 아냐. 결사가 지원하던 혈천교가 신성연방의 열차를 납치하기도 했었잖아."
"그건 그렇네."
"결사 쪽 사람들은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뭔가 짐작 가는 사람 없어?"
그녀가 턱을 짚으며 고민했다.
"어르신이라는 말로는...... 너무 추상적이네. 암흑연합 측 원로들일 수도 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봤지만, 아무리 암흑연합의 차기 지배자와 현역 군단장이라도 결사에 대한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시몬은 화제를 돌렸다.
"세르네는 학교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겠지."
로레인이 말했다.
"상아탑 내 베르무드 파벌이 다 끌려갔잖아? 남은 급진파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당장 세르네를 상아탑주 자리에 앉히려 할 거야."
"......."
"그리고 무엇보다."
로레인이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세르네는 이 학교를 싫어했잖아. 본인이 키젠에 돌아오고 싶지 않아 할걸."
"그렇...... 지."
세르네는 키젠에 강제로 특례입학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볼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학년 때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킨 것도, 자를 테면 잘라봐라. 같은 느낌이 강했다.
로레인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막상 그 말썽쟁이를 못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후련한 것만은 아니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세르네는 키젠의 파멸을 원한다. 그것만큼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베르무드의 계획에 동조했었으나, 베르무드가 결사의 끄나풀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시몬의 목숨까지 요구하자 베르무드를 배신했다.
세르네는 결사에 이용당하길 거절하고 시몬과 메이린을 구하기 위해 일을 벌였을 뿐이지만, 어쨌거나 키젠을 구한 셈이 됐다.
그녀와 적대하던 로레인의 입장에선 기분이 뒤숭숭할 것이다.
"시몬! 로레인 님!"
그때였다.
창밖으로 에슈가 소리치고 있었다.
"데이트하는 중에 미안한데, 우리 강의실 위치 바뀐대! 옆옆 강의실이야! 이제 곧 수업 시작해!"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줘서 고마워! 에슈!"
딸기 우유를 빨아 마시던 로레인이 입술을 삐쭉였다.
"데이트 같은 거 아닌데."
두 사람은 건물로 돌아와 새로운 강의실로 들어갔다.
마침 조교들이 칠판을 꾸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풍선이 달려 있었고 중간에는 현수막이 보였다.
<듀라한 특강 - 아론 교수, 그레리온 교수, 린&룬 교수>
시몬과 로레인이 좋은 자리를 고르려는데, 마침 강의실에 앉아 있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아, 시몬! 나 왔어!"
"토토!"
시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등교하기 전까지 토토가 도착하지 않아서 걱정하던 참이었다. 같은 10조인 에슈와 로레인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자리는 순식간에 가득 채워졌다.
산만한 덩치의 헥토르도, 최근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아세라즈도,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는 화이트의 모습도 보인다.
"......."
시몬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자리들이 빠르게 채워지고 있는 가운데, 시몬의 뒷자리만 텅 비어 있다.
일명 세르네 전용석.
그녀는 늘 시몬의 뒷자리에 앉는 걸 즐겼다. 저기 앉아봐야 세르네에게 찍히고 쫓겨날 뿐이었기에, 학생들은 이제 알아서 자리를 비워놓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네는 오지 않는다.
그녀는 상아탑주가 됐으니까.
"아론 교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조교가 말했다. 시끌벅적하던 학생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달칵.
오늘도 세상 편한 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아론이 등장했다. 그간 좀 쉬어서 그런지 말쑥하던 얼굴이 조금은 나아져 있었다.
학생들의 정적 속에서 강단에 올라선 그가 고개를 들었다.
"파견은 잘 다녀왔나."
네에에에!
커다란 대답과 함께 비로소 곳곳에서 자축하는 환호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론도 기쁨을 만끽하는 학생들을 막지 않고 잠시 기다려 주었다.
"특강을 시작하기 전에 출석을 부르겠다."
아론이 출석부를 들었다.
"맷 코머."
"네!"
"라우벨 브엔머스."
"넵!"
아론이 나른한 목소리로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갔고, 학생들이 손을 들며 대답했다.
딕의 말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파견평가는 10명 정도 늦는 게 보통이라고 했는데, 놀라운 복귀율이었다.
그만큼 아론이 인질로 내건 '듀라한 특강'의 위력은 대단했다. 학생들 모두 파견지에서 죽을 둥 살 둥 파견임무를 수행해 냈다. 토토처럼 집념으로 새벽에 일을 끝내고 기어이 오늘 아침에 도착한 학생들도 많았다.
그렇게 호명이 계속되다가 문제의 이름이 나왔다.
"세르네 아인다르크."
활기 넘치던 강의실에 순식간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론은 그저 '음.' 하고 출석부에 체크하고는 다음 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세르네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의 이름이 불렸다.
"우수한 성과로군."
아론이 출석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52명 중에 51명 복귀. 소환학과가 이번에 최고기록을 세운 건 확정적이다."
하지만 이번엔 환호하는 학생들이 없었다. 아론이 학생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들어보니, 파견자한테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떼쓰고 울고불고한 녀석들도 몇 명 있는 것 같은데......."
에슈를 비롯한 몇몇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협상력의 일환으로 인정하겠다. 파견자들이 거는 민원은 너희들이 감당하도록."
아론이 교과서를 펼쳐 들었다.
"그럼 교과서 160페이지를......."
"늦어서 죄송해요~"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몇 분 늦은 걸로 결석은 아니죠?"
"?!!"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웅성 웅성 웅성 웅성!
상앗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강의실로 들어온 소녀의 모습. 몇몇 학생들은 환호성을 터뜨리기도 했다.
'세르네!'
그녀의 교복 차림을 또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론은 픽 웃으며 다시 출석부를 펼쳤다.
"앞으론 늦지 마라."
"네에~"
세르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와 전용석인 시몬의 뒷자리로 걸어왔다. 시몬은 여전히 얼이 빠진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너......."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상아탑주 자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말문이 떨어지질 않았다.
"우후후."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우선순위에 따른 결정? 이라고 해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