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90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몬스터들이 인간의 성을 침략하는 요새전인 경우, 높은 확률로 인간이 승리한다.
지능이 떨어지는 몬스터들에게 병기나 공성기술이 있을 리 만무하며, 성벽에 붙어서 억지로 올라오려 하다간 화살 세례에 맞아 바닥에 차곡차곡 시체로 깔릴 뿐이다.
요새라는 건, 생각보다 견고한 인류의 방어책이다.
이런 요새의 억제력은, 완력도 덩치도 속도도 우월한 몬스터들로부터 인간이 제 영토를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
따라서 몬스터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쑥대밭을 만들 수는 있지만, 영지 전역이 몬스터의 영토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요새를 바탕으로 몬스터와 인간의 접경지역이 형성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뭐야 저게에!"
이번 상대인 '흉내잡이'들은 상당히 독특했다. 노획한 충차를 가져와서 운용하거나, 인간처럼 나무를 엮어 만든 사다리를 성벽에 대고 올라오고 있었다.
정말로, 인간의 군대를 상대하는 것 같다.
"저 정도는 당연해."
로레인이 중얼거렸다.
"40개의 요새 중에 39개를 손에 넣은 몬스터 무리야. 인간의 공성 방식은 당연히 학습했겠지."
"뭔가 무섭...... 으악! 여기도 사다리가 걸렸어. 올라온다!"
"내게 맡겨!"
에슈가 용감하게 팔을 휘둘렀다.
그녀의 앙증맞은 저주인형들이 달려가 사다리를 붙잡고 내려갔다. 그러곤 중간 즈음에 멈췄다.
<디케이(Decay)>
저주인형의 체내에 새겨진 저주가 발동하며, 사다리의 중간 이음새가 썩어버렸다. 사다리들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나이스 에슈!"
시몬도 성벽을 달리며 싸우고 있었다.
퍼억!
쩍!
시몬의 현란한 발차기에 성벽을 막 올라온 흉내잡이들이 나가떨어졌다.
이어지는 그의 손짓에 따라, 뼈들이 춤을 추며 내려가 흉내잡이들의 체내를 헤집고 사다리를 지탱하는 밧줄을 잘라내 떨어뜨렸다.
아직 전투 초반인 만큼, 시몬도 친위대나 혼돈 같은 강력한 기술은 사용하지 않고 마투와 본아머 위주로 싸우고 있었다.
"시체폭발."
시몬이 중얼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자, 곳곳에서 폭음과 함께 성벽이 뒤흔들렸다. 성벽 아래로 좀비들을 내려보내 다량의 몬스터들을 한 번에 폭사시킨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시몬이 옆을 보았다.
"로레인! 좌측 성벽은 맡길게!"
"알았어."
로레인은 해골마를 타고 있었다.
칠흑으로 이루어진 말고삐를 잡고 성벽을 가로지르며, 한 손에 든 장창에 칠흑을 입혀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창이 검은 꼬리를 남길 때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흉내잡이들의 목이 날아가고 심장이 꿰뚫렸다.
해골마 또한 뒷발로 흉내잡이들을 후려 차거나, 로레인의 창격에 맞춰 편한 방향을 잡아주는 등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압!"
토토도 뒤처지지 않았다.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더니, 그 안으로 작은 데스웜들을 여러 마리 소환했다. 고정된 상태에서 부식체액을 토해내 흉내잡이들을 물리쳤다.
"Ðⴆŀº!"
"ⴆŀⴘⴝ!"
생각지도 못한 네크로맨서들 학생들의 활약에 가할족 전사들이 환호했다. 사기가 오른 그들도 더욱 악착같이 창을 내지르고 화살을 쏴댔다.
기사처럼 오러를 쓰는 정도는 아니지만,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며 싸우는 강자들도 꽤 보인다.
'우리 쪽 방비는 괜찮은 것 같은데.'
시몬이 손짓하자 날카로운 뼛조각에 몬스터들이 연달아 꿰뚫렸다.
-1-A 지원 바람!
-3-B도 위험해!
통신수정구의 통신을 들어보니 다른 조들은 위기였다.
몬스터들은 균일한 힘으로 성벽을 공격하는 게 아니다. 어느 한쪽은 공세가 강하고, 어느 한쪽은 약한 곳도 있다.
-6-D! 사다리가 열한 개 걸쳐지고 난리도 아냐!
반면 수성은 모든 방향을 막아야 하므로 균일적으로 병력을 배치한 상황.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서는, 이쪽도 전략을 바꿔야 했다.
-지금부터 내가 호명하는 놈들은 지원조다. 담당 구역을 벗어나 지원을 요청하는 구역을 우선하여 도와라.
같은 생각인 듯, 헥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몬 폴렌티아, 아세라즈 미켈, 기네비어 벤너스, 첸드라 글리비체.
헥토르는 실전에 강한 학생들을 지원조로 재편성했다.
시몬이 뒤를 돌아보자 로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여긴 우리한테 맡겨."
로레인이 토토와 에슈를 지켜준다면 든든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고 겨울로브를 펄럭이며 달려 나갔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4조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깜짝 놀랐다. 여기는 그야말로 함락 위기였다.
"으아아아!"
어젯밤에 같이 카드 게임을 했던 4조 조장이 애를 쓰고는 있었지만, 홍수처럼 몰려드는 흉내잡이 떼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가할족 전사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한 조원은 기절했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제일 빠른 녀석들로!'
시몬이 아공간에서 4기의 구울을 동시에 꺼내서 돌진시켰다. 흉내잡이들이 쓰러진 학생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모였다.
'집중!'
시몬이 눈을 부릅떴다.
인지가 확장되고 시간이 늘어진다.
그의 눈앞으로 네 개의 마법진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이내 집중력이 최고조에 다다르는 순간, 시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리노의 황금선!'
허공에 떠오른 네 개의 마법진이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지는 이미지.
구울들의 안광과 몸의 구멍에서 마치 증기기관처럼 칠흑을 뿜어내며 바닥을 초고속으로 돌진했고.
높이 올라간 검이 기절한 학생에게 내려오기 직전, 시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체 맹독폭발!'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백 미터를 순식간에 주파한 구울들이 폭발을 일으켰다.
예전 수행평가에서 사용했던 카바라의 독이 아니다. 1차로 일어난 시체가스가 주위의 흉내잡이들을 밀어내 버렸다.
"흐읍!"
바닥을 미끄러뜨리며 나타난 시몬이 허리 뒤로 당겨둔 두 팔을 빨래 널듯 거칠게 옆으로 휘둘렀다.
촤아아악!
촤아악!
수십 개의 하얀 조각들이 빛살처럼 쏟아져 나가며 공격당하는 가할족 전사들과, 쓰러진 학생의 몸에 착착 들러붙었다. 이내 본 아머가 그들의 몸을 움직여 포위를 뚫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
"와우!"
4조 조장도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회장! 시몬 회장이 왔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단번에 전세가 바뀌었다. 시몬이 스읍 숨을 들이마시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Ðⴆŀº!"
그 말을 들은 가할족 전사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창을 높이 들어 올리며 호응했다.
"Ðⴆŀº!!!"
와아아아아!
가할족 전사들이 다시 한번 용감하게 뛰어들어 성벽에 올라온 흉내잡이들을 제거해 나갔다.
시몬도 공간을 잡아당겨 초대형 아공간을 열었다.
"쏴! 메이지들!"
<다크 블레이즈>
아공간에서 쏟아진 검은 불꽃이 흉내잡이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간신히 한숨 돌린 시몬이 저벅저벅 4조 조장에게 걸어갔다.
"뭐야, 시몬. 혹시 쟤들 말 아는 거야?"
4조 조장의 물음에, 시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그냥 질러봤어. 쭉 관찰해 보니 저게 '싸우자'는 말인 것 같아서."
"......으, 으윽."
그때 마침 기절해 있던 학생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시몬은 그렇게 안부를 물으며 왼손을 횡으로 그었다. 흩어져 있던 뼈들이 쏜살같이 복귀해 뭉치더니, 본 스피어의 형태로 몬스터들을 연달아 꿰뚫었다.
기절했던 학생이 클클 웃었다.
"......거, 겁나 화려하네. 암튼 신세 졌다."
"너희들끼리 계속 막을 수 있겠어?"
"그럼."
한번 몬스터들을 밀어내고, 이쪽 성벽은 안정화되었다.
시몬은 통신수정구의 연락을 받고 다른 지점으로 이동했다.
* * *
성벽 밖.
"잘 싸우는구만. 잘 싸워."
두 개의 대형 식칼을 어깨에 짊어진 도살업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제 자리에서 성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넘어갈 듯 말 듯 희한하게 잘 버텨. 진짜 애들 맞아?"
"말했지 않소."
그의 파트너인 외눈 신사가 다가왔다.
"우리가 손을 썼다고는 해도, 몬스터만으로는 저들을 꺾을 수 없소."
"그래서."
도살업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한 번 더 손을 쓰겠다. 이건가."
그들의 뒤에는 한 무리의 복면을 쓴 검은 옷의 암살자들이 자세를 낮추고 숨어 있었다. 도살업자가 휘파람을 불며 식칼을 고쳐 쥐었다.
"근데, 원래는 자네와 나 둘만 들어간다고 했지 않아?"
"처음엔 그랬소."
"이런 것들은 필요 없어. 실력은 둘째치고, 누가 봐도 나 암살자들이오~ 하는 놈들이잖아. 괜히 얘들 데리고 들어갔다가 소란이 커지면......."
"그런 걱정은 필요 없소."
한쪽 동공의 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들은 품에서 물약 하나를 꺼냈다.
"결사를 위해."
"결사를 위해."
그러고는 뚜껑을 열고 망설임 없이 물약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끄윽!"
퍽!
쨍그랑!
곳곳에서 포션병을 떨어뜨린 그들이 목을 잡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침을 줄줄 흘리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꾸득!
꾸드드득!
몸 곳곳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끄, 끄아아아악!"
"아아아아아!"
퍼억!
퍽!
피부가 벗겨지고 얼굴이 뒤틀리며, 몸이 가늘어지고 팔다리가 줄어들었다.
"허, 맙소사."
도살업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럼."
외눈 신사가 모자를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계획을 설명하겠소."
* * *
"하하하하! 시원하군!"
처억!
키메라를 입고 요새 밖에서 한바탕 날뛰며 몬스터의 개체수를 대폭 줄여놓은 그레리온이 다시 요새 안으로 복귀했다.
건물 지붕에 내려온 그가 복부의 삐쳐나온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키메라의 살점들이 꾸르륵 소리와 함께 벗겨져 나왔다. 이내 원래의 가방 형태로 돌아왔다.
"벌써 근육이 이렇게 빠졌나. 또 몸을 만들어야겠군."
그레리온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전의 그 부담스럽게 우락부락한 체격일 때보다는 전체적으로 말라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레리온 교수님."
아론이 그에게 다가왔다.
"여전하시군요."
"하하하하! 그럼, 그럼! 요새 내부는 별일 없지?"
"예,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아론이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다른 요새의 몬스터들까지 몰려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관측된 적 없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을 보이는 흉내잡이들도 있습니다. 이건 역시......."
"자네는 교수 노릇 하면서 어디까지 봐왔나."
"예?"
그레리온이 털썩 지붕에 걸터앉아 클클 웃었다.
"나 때는 말이야. 바닷가에 야외수업을 하러 갔는데, 갑자기 20m 높이의 쓰나미가 몰아치더군."
"......."
"칼로스 왕국과 볼드윈 왕국이 사이가 안 좋을 때였어. 칼로스에서 마법사들을 동원해 볼드윈의 황태자를 없애려고 한 게지. 그는 반 칼로스 왕국 파벌의 중심이었고, 이대로 졸업해서 볼드윈의 핵심이 되면 위험하니 미리 제거하려 든 거야."
"자연재해로 위장한 겁니까."
"암살자를 100명이나 학생들의 외부숙소에 보낸 적도 있었지. 키젠은 그런 곳이야. 요즘은 평화롭다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하룻밤으로는 부족해."
그레리온이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명심하게. 키젠은 강하지만, 완전한 조직은 아니야. 키젠 내부에도 무수한 파벌과 갈래가 존재하지. 그들 모두가 네프티스 님의 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조직이 굴러가는 것뿐, 구성원들의 목표도 이익도 원하는 것도 모두 달라."
아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4대 왕국과 17개 세력. 이들을 강제로 묶은 암흑연합이라는 체제. 동상이몽입니다.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종교를 기틀로 신성연방이란 제국을 만든 교황이 영리하긴 해. 사실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이단 심판이니 뭐니 문제는 많은 것 같지만...... 아무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레리온이 턱에 손을 올렸다.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한 게 아니란 거야. 자연재해가 올 수도 있고, 몬스터를 부추겨 더 많은 몬스터들이 이리로 향할 수도 있지. 직접 암살자들이 올 수도 있고."
"......."
"우리는 그걸 대비하고, 이겨내야만 해."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에 연락하겠습니다. 가할족은 힘들겠지만, 키젠으로 복귀할 수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 허가를......."
"칼로스에서 100명의 암살자를 보냈다고 했을 때 말일세."
그레리온이 씩 웃었다.
"70명은 내가 죽이고, 10명은 근처에 돌아다니던 학생들이 죽이고, 남은 20명은 황태자가 단독으로 죽였지."
"......."
"키젠답게 행동해. 키젠의 이름을 걸고 온 이상, 우리는 이곳에서 민간인을 두고 손을 뗄 수 없어. 교수직을 유지하고 싶다면 학생들에게 눈을 떼지 말게. 그리고."
그레리온이 새로운 가방을 꺼내 몸에 붙였다.
"자네가 가르친 학생들을 믿게."
* * *
"허억! 후우!"
시몬이 정신없이 성벽을 내달리고 있었다. 벌써 두 군데나 더 돌면서 위험한 구역을 지원하고 있었다.
-회장! 미안하지만 11조에도 와줄 수 있을까?
"지금 가!"
시몬이 통신수정구를 들고 그렇게 말한 뒤, 또 다른 통신수정구를 켜고 외쳤다.
"토토!"
-응! 지금 떨어져도 좋아!
그 말을 들은 시몬이 성벽을 박차고 요새 내부를 향해 날아올랐다. 그의 몸이 빠르게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고.
쿠콰콰콰콰콰!
바닥에서 토토의 심복, 데스웜이 튀어나와 시몬을 꿀꺽 집어삼켰다. 데스웜은 그대로 바닥을 타고 고속으로 이동했다.
-반대쪽 성벽까지 5분이면 갈 거야.
"땡큐."
토토의 소환수는 여러모로 유용했다. 냄새가 조금 난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시몬은 칠흑으로 방어막을 펼쳐서 타액이 묻지 않도록 한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
그런데 데스웜을 타고 가던 시몬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방금 뭐지?"
데스웜의 것이 아니다.
지하에서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