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92화
전황은, 한 치 앞을 예상하기 힘들 만큼 격정적이었다.
한쪽 성벽이 무너져 내리더니, 이번에는 흉내잡이들이 성내 한복판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ⴟⴀºⴈ!"
가할족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저쪽은 여자와 아이들이 숨어 있는 위치였기에, 성벽을 지키던 전사들이 발 빠르게 내려왔다.
"오우."
스릉!
그리고 적진에서 산책하듯 유유히 걸으며 대형식칼을 휘두르는 남자.
"더! 더 강한 놈들은 없어?"
스릉!
그의 식칼이 번뜩일 때마다 가할족의 목이 숭숭 날아갔다. 그가 자세를 낮추고 허벅지에 힘을 모으더니 한 번에 뻗어 나갔다.
그의 기술 반경에 들어온 가할족 전사들이 뒤를 돌아보았고, 그대로 목이 높이 올라갔다.
"하하하! 써는 맛이 일품이구만! 응?"
저 멀리,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고 있는 검은 교복의 여학생이 보였다. 스켈레톤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키젠!"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가할족의 머리 몇 개를 주워들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누굴까! 누굴까! 백금발, 파란 머리, 백금발, 파란 머리."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어느 쪽도 아닌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그가 쩝 하고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어!"
소녀 쪽도 도살업자를 발견하고는 손끝으로 가리켰다.
"아저씨는!"
"이거 우연이군! 순록고기는 맛있었나?"
그녀는 에슈 아르젤이었다.
"맛있었다면 이쪽 고기는 어때?"
도살업자가 잘려나간 사람 머리통을 던졌다. 발 앞에 툭툭 떨어지는 머리들을 본 에슈는 눈을 질끈 감고 식겁한 비명을 질러댔다.
"정직한 빈틈 고맙다."
도살업자가 칠흑을 밟고 돌진했다.
"죽이진 않겠지만 써는 맛은 봐야겠지!"
그의 식칼이 그녀의 두 다리로 날아갔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다리가 날아갔다.
"하하하하! 음?"
광소하고 있던 도살업자의 표정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식칼을 타고 전해지는 손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역겨웠다. 결코 살을 베는 손맛이 아니었다.
펑!
잘려 나간 에슈의 몸이 볏단 인형으로 변했다.
-진짜 실망이에요! 좋은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흘러나왔다. 잘려 나간 볏단 인형의 몸통에는 저주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퍼어어어어엉!
마법진이 폭발하며 도살업자의 몸이 검은 연기에 뒤덮였다.
그사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던 진짜 에슈는 열심히 도망치며 통신수정구를 들었다.
"여기는 에슈! 여기는 에슈! 이상한 사람이 들어왔다!"
치직!
-자세히 보고 바람.
"어제 근처 마을에서 목격했음! 가할족이 아닌 제3의 인물로 추정! 나한테 막 다짜고짜 칼을 휘두......."
대앵-!
그녀의 손에 들린 통신수정구가 날아온 식칼에 부딪혀 함께 벽에 꽂혔다. 그녀가 힉! 소리를 내며 굳어졌다.
"너무한 거 아닌가? 내게 그런 끔찍한 손맛을 맛보게 하다니."
도살업자가 역정을 내며 다가왔다.
그가 팔을 뻗자 대형식칼이 다시금 손안에 들어왔다. 에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가를 좁혔다.
'분명 경련 저주를 뒤집어썼을 텐데.......'
저주의 효과는 제대로 적용되는 듯, 도살업자의 피부에는 울긋불긋한 두드러기가 생겨나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뿐. 서서히 저주의 효과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키젠이 다르긴 달라. 전쟁놀이나 하길래, 진짜 사람 목을 던져주면 오줌 질질 쌀 줄 알았는데. 도망에 반격까지 해냈어."
에슈는 뒷걸음질 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을뿐더러, 상대는 저주저항을 가진 마투의 스페셜리스트. 도망쳐도 따라잡힐 것이다.
"사람 목 따윌 겁낼 리가 없잖아요."
마침내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앞세웠다.
"학교에서 허구한 날 하는 게 시체 해부랑 조립인데."
"그래. 궁지에 몰렸으니 맞서볼 생각이냐?"
"왜 제가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시죠?"
토록- 톡- 톡-
토도독- 토톡- 토록- 톡-
도살업자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건물의 지붕과 벽면, 바닥에 새하얀 아기 정령 같은 인형들이 통통거리며 나타났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이 지역 전체가 인형으로 뒤덮여 있었다.
"궁지에 몰린 건 당신이에요."
"재밌군."
도살업자가 식칼을 휘리릭 고쳐 쥐며 이를 드러냈다.
"이번에야말로 극상의 써는 맛을 보여달라고."
* * *
검은 교복 자락을 거칠게 휘날리며, 소년은 적진을 활보했다. 그의 팔다리가 잔상을 그리며 움직일 때마다 흉내잡이들이 정신없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케에에에!
뒤로 돌아온 흉내잡이가 시몬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시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지와 중지를 붙인 채 받아냈다.
"흉내 내는 거야? 미안하지만."
쩍!
시몬의 몸이 재차 회전하며 그의 안면을 걷어찼다.
"어설픈 흉내는 안 하니 만도 못 해."
쿠당탕탕!
흉내잡이가 나무집의 벽면을 부수며 나가떨어졌다. 시몬이 다리를 내려놓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이상해.'
저 수많은 흉내잡이 중에서, 이상할 만큼 강한 녀석들이 섞여 있다.
'바로 이 녀석처럼!'
시몬이 팔에 칠흑을 둘러 가슴으로 내질러지는 검을 막아냈다.
'그리고 날 죽이려고도 하지 않아.'
깡!
시몬이 검을 쳐냈다. 흉내잡이는 공중에서 삼 회전하며 자세를 맞바꾸더니 다시 벽면을 박차고 돌진했다.
시몬은 이를 악물고 오른손에 칠흑을 끌어올렸다.
<홍펭 오리지널 - 착검>
촤아아아아아악!
주위에 선이 그어지며, 접촉면에 맞닿은 흉내잡이들이 모조리 녹색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공중에서 내려온 흉내잡이는 그 와중에 검을 비틀어 막아낸 모습이다.
'역시, 전투기술이 다른...... 응?'
시몬의 눈이 커졌다.
방금 '착검'이 스친 흉내잡이의 어깨 상체에서 붉은 피가 솟았다. 흉내잡이들은 모두 녹색 피를 흘리고 있었다.
-케에에에에에!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주위를 가득 뒤덮은 흉내잡이들이 시몬을 포위하며 뛰어들었다. 붉은 피를 흘린 흉내잡이도 조금 거리를 두고 시몬을 노리고 있다.
시몬은 왼발로 가볍게 바닥을 두어 번 디뎠다.
'개문.'
촤르르르르르륵!
바닥의 아공간에서 나타난 오버로드의 칼날이 시몬의 신발 밑창을 들어 올린 채 그대로 치솟았다.
시몬은 단번에 천장을 덮은 볏짚을 뚫고 지붕 위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지붕에는 시몬이 미리 뿌려둔 좀비들이 어슬렁거리며 올라가 있었다.
시몬은 오버로드를 밟고 한 번 더 공중으로 도약했다.
"시체(Corpse)―"
좀비들이 기다렸다는 듯 지붕을 찢고 아래로 파고들었다. 시몬은 고공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폭발(Explosion)."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맹렬한 폭음. 주위의 몬스터들은 깔끔하게 쓸려내려 갔다.
시몬도 지상으로 내려와 폭발이 난 곳으로 다시 들어가 보았다.
곳곳에 몬스터들의 잔해가 남아 있는 가운데,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흉내잡이가 보였다.
심지어 몸의 절반이 인간 형태로 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몬스터로 변해서 침입한 건가.'
시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가 허우적거렸다.
"자, 잠깐......! 나는 아직 싸울 수-!"
한동안 몸을 들썩들썩하다가 이내 추욱 늘어졌다.
시몬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몸 내부에 저주가 발동한 것 같았다.
'결사.'
시몬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유난히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곳.
시몬의 앞에 커다란 공간이 열려 있었다.
'워프 게이트다!'
주위에 누가 없는지 확인한 시몬이 얼른 팔을 뻗었다.
"피어!"
[기다렸다!]
아공간이 열리고, 피어의 대검이 빠져나왔다. 시몬은 그것을 붙잡고는 힘껏 휘둘렀다.
와아아악!
워프게이트가 닫히고, 요새 밖에서 몰려오는 몬스터의 공급이 마침내 끊겼다.
* * *
"하하하하하!"
도살업자가 양손에 든 식칼을 미친 듯이 휘두르고 다녔다. 어느새 세상에 흰 눈이 온 것처럼 저주인형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디 있나! 잡히면 꽤 아프게 썰릴 줄 알아라! 하하하!"
그리고 건물 뒤편에 숨은 에슈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빠져나가야 했다.
"찾.았.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가 등을 대고 있던 집의 창문에서 도살업자가 '까꿍'하고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꽝!!
그 즉시 집채만 한 곰돌이 인형이 달려와 냅다 도살업자의 안면을 강타했다.
"어이쿠."
벽에 강하게 밀어 붙여진 도살업자가 킥킥댔다. 조금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깜찍한 흑마법이네."
에슈의 곰돌이 인형이 돌진했고, 도살업자가 식칼을 미려하게 휘둘렀다. 인형이 단번에 여섯 조각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흠."
인형 속에 든 솜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솜에도 당연히 저주효과가 있었지만 도살업자의 몸에 혈관이 붉게 일어나더니 바로 저주에서 벗어났다.
"으으! 뭐 저런 게 다 있어어어어! 누가 좀 살려주세요!"
에슈가 비명을 지르며 내달렸다. 도살업자는 바로 몸을 날려 지붕을 몇 번 딛고 뛰어올랐다.
"솜이랑 볏짚 써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그의 안광이 번뜩였다.
도살업자의 몸이 일직선으로 에슈를 향해 내려오는 순간.
"?!"
회색 스커트 자락이 눈앞에서 휘날리는 듯하더니, 그의 안면에 구둣발이 틀어박혔다.
쩌어어어어억!
도살업자의 몸이 직선을 그리며 뻗어나가 벽에 꽂혔다.
"아아악!"
무너진 집 너머로, 그가 처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이 들렸다.
"이 학교는 죄다 까버리는 게 유행이냐!"
차악.
에슈의 앞으로, 검은 머리를 휘날리는 한 소녀가 내려왔다. 에슈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로, 로레인 니이이임!"
로레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니? 에슈."
"네! 괜찮아요!"
"에슈!"
토토도 뒤따라 달려왔다.
"성벽 위에서 널 발견하고 바로 데스웜으로 따라왔......."
터업.
토토의 얼굴이 벌게졌다. 에슈가 흐물거리며 토토의 품에 쓰러진 것이다.
"으아아, 다, 다리에 쥐 났어. 긴장 풀려어."
"토토."
로레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지금 당장 에슈를 데리고 여기서 물러나."
"으, 응!"
토토가 손짓하자 바닥에서 데스웜이 튀어나와 커다란 입이 벌어졌다. 데스웜은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을 집어삼키고는 땅굴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아."
그때 부서진 건물 잔해 속에서 도살업자가 탈탈 털며 일어났다.
여전히 아무런 타격도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백금발, 파란 머리, 백금발, 파란 머리. 뭐야, 둘 다 아니잖아."
"......."
로레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파란 머리?"
"어어, 걔한테 볼일 있으니까 넌 그냥 가면......."
고오오오오오오오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초크 목걸이에 걸린 봉인을 해제했다. 그녀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불꽃처럼 떠올랐다.
"그럼 지금부터는 제가 당신에게 볼일이 있겠네요."
그녀가 허공에 손짓하자, 허공이 괴물의 입처럼 쩌어억 벌어지며 그 안에서 그녀의 눈과 똑같은 붉은 눈동자들이 번쩍였다.
"오, 오우."
그 모습을 본 도살업자가 엉거주춤 자세를 고쳤다.
"......뭔가 좀 잘못 걸린 느낌인데."
* * *
"꺄아아악!"
"뭐야? 뭐야 방금!"
성벽을 지키던 학생들이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성벽 아래의 새까만 웅덩이가 이동하며 학생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아니군. 이자도 아니다.'
그는 도살업자와 함께 들어온 외눈 신사였다.
'이미 너무 많은 소란을 피웠어. 키젠 교수들이 우릴 찾아내기 전에, 시몬 폴렌티아를 잡아야 한다.'
그의 하나뿐인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이며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시몬 폴렌티아와 세르네 아인다르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선 성벽을 모두 둘러보.......'
쩍!
갑자기 그의 안면이 찌그러지더니, 공중으로 쳐올라갔다.
쿠당탕탕!
웅덩이 속에 있던 외눈 신사가 볼품없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무슨......!'
인지하지 못할 만큼의 힘과 속도로 걷어차였다.
그가 눈동자를 굴려 전면을 보았다. 두 손을 교복 주머니에 찔러넣은 소년이, 다리를 들어 올린 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용의 비늘이 군데군데 흐물거리며 붙어 있었고, 등 뒤에는 축 늘어진 용의 날개가 보였다.
"너 뭐냐."
소년의 눈에는 피로감이 가득해 보였다. 외눈 신사의 하나뿐인 동공이 굴러갔다.
'헥토르 무어. 분명 도청한 내용으로는 학생 지휘관이라고 했나. 그렇다면.'
꾸르르르륵.
외눈 신사가 인형처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몸에서 방대한 양의 칠흑이 가시처럼 방사되었다. 저주의 효과가 담긴 칠흑이 뻗어 나가며 주위의 학생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공포의 저주.
공포는 인간을 다스리기에 가장 좋은 감정 중 하나였다.
"학생을 노리는 외부인이냐."
다리를 내려놓은 헥토르가 여전히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또한 단번에 외눈 신사의 힘을 깨달은 듯했다.
[파란 머리 소년을 찾고 있소.]
헥토르의 눈썹이 꿈틀했다.
"파란 머리?"
[그렇소. 그만 내어준다면 물러가.......]
쩌어어어어어억!
그러나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커다란 용의 앞발이 대뜸 외눈 신사의 머리를 바닥에 거칠게 처박았다.
쿠구구구!
주위가 들썩이며 성벽의 잔해가 떨어져 내렸다.
"X발. X발! 개나 소나 시몬 폴렌티아! 시몬 폴렌티아!!"
헥토르의 눈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일그러졌다.
[잠깐......!]
"그놈을 조지는 건 나다!"
꽈아아아아앙!
그의 반대쪽 팔이 외눈 신사의 뒤통수를 바닥에 짓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