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12화
꺼진 조명.
창가를 단호하게 가린 검은 커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실루엣이 꿈틀대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드디어 키젠 땅을 밟는군."
"오랫동안 이날만을 기다려 왔소."
방 안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울려 퍼졌다.
"일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그리고 가운데의 한 신형이 몸을 일으켰다.
"상대는 키젠이야. 빈틈없이 준비해."
* * *
시몬은 그동안 키젠에 다니면서, 이렇게 많은 외부인들이 학교를 돌아다니는 건 처음 봤다고 생각했다.
외부인들이 많이 온 경우라고 해봐야 행사 관람객들이나 방학식 때 학부모들이 온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관람객도 아닌 암흑제를 준비하러 온 기술자들, 상인들, 외부인사들의 숫자만 세어도 그 기록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본격적인 암흑제가 시작되게 되면 어떨까?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똑딱 똑딱!
로크섬 전역에서 바쁜 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노점이나 작은 건물들은 상인들이 직접 자재를 가져와 현장에서 조립했고, 경기장처럼 커다란 건축물은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건물째로 이전하기도 했다.
물론 이 경우, 외부의 건축물이 바로 로크섬에 넘어오는 것이기에 세밀한 점검과 조사가 필요했다.
시몬도 학생을 대표하는 학생회의 일원으로서 조사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학생회실은 잠시 딕과 카미바레즈에게 맡겨두고, 부회장인 메이린과 함께 현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나 이상한 곳 없어?"
메이린은 문득 그렇게 묻고는, 시몬을 돌아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하늘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살짝 학생회 완장을 잡는 포즈를 취했다.
물결치는 하늘빛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윤기가 흘러넘쳤고,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는 동그랗게 떠진 채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넋 놓고 보고 있던 시몬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엔 없어 보여. 평소랑 같......."
순간 메이린의 눈이 가늘어지며 새초롬한 표정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정답이 아니었던 모양.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진 시몬이 급히 덧붙였다.
"......으면서도 다르네! 그 뭐라고 하지? 꾸민 듯 안 꾸민 듯."
"진짜?"
다행히 메이린은 그 한마디에 넘어가 주었다.
그녀는 오늘 컨디션이 좋은 것 같았다. 뛸 듯이 살짝살짝 걸어가던 메이린이 서류판을 들어 올렸다.
"너도 알다시피, 키젠에서는 텔레포트 마법으로 암흑제에 쓸 경기장을 대여하고 있어. 오늘은 총 세 곳이야."
키젠의 스케일은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위원회 사람들이랑 같이 경기장 소유주들을 만나고, 경기장 안전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해 볼 거야."
"이해했어."
시몬도 학생회장 코트를 가볍게 털고는, 메이린과 발을 맞추어 걸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잠시 업무는 머릿속에서 비우고, 이렇게 풀 향기를 맡으며 공원을 걷고 있으니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있지, 시몬."
"응."
그녀는 흘러내리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베베 꼬더니, 쑥스러운 듯 살짝 시선을 발끝으로 돌렸다.
"나 학생회에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학생회를 멱살 잡고 끌고 가고 있는 최고 주역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다소 아이러니했지만, 최근 메이린의 감정 상태가 극심히 흔들렸던 걸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시몬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넌 최고야, 메이린."
메이린이 움찔하더니 얼굴이 벌게졌다.
"누, 누가 그런 소리 해달라고! 난 진지하게 묻는 거였......!"
"3학년을 포함해 그 누가 부회장이 됐더라도."
시몬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만큼 해내진 못했을 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메이린의 눈이 대굴대굴 굴러갔다. 귀 끝은 살짝 빨개져 있었다.
"모, 몰라!"
그녀가 앞장서서 휙 걸어가 버렸고, 시몬도 웃으며 뒤따랐다.
이내 두 사람은 마차도로 쪽으로 나왔다. 마침 직속 하수인인 모조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회장님, 부회장님. 모시겠습니다."
암흑제는 로크섬 전역이 무대다. 경기장들도 교정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마차는 모조가 직접 몰았다. 시몬과 메이린은 간만에 마음 놓고 마차 여행을 즐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경기장 앞에 있는 어른들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완벽한 핏의 정장, 절제된 단발, 그리고 차갑고 냉랭한 얼굴.
키젠 부총장이자, 이번 암흑제 위원회장인 제인이었다.
"제인 교수님!"
메이린이 반가움에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시몬도 뒤따라가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왔습니까. 학생회장. 부회장."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을 바로 호칭으로 부르는 제인이었다. 그녀처럼 공과 사가 확실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며 시몬은 속으로 웃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위원회 쪽 사람인지 콧수염을 길게 기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다소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소개해 드리죠."
제인이 그들에게 시몬과 메이린을 소개해주었다.
그들이 이 경기장의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인데, '발케제 일족'이라고 불렸다. 나름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것 같았다.
'음.'
시몬은 퍽 믿음직스럽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듯 연신 힐긋힐긋거리며 주위를 살피는 모습부터가, 꼭 죄지은 사람들 같았다.
그들과 인사를 마친 시몬은 이제야 시선을 움직여 경기장을 보았다.
고대의 유적인 걸까. 딱 봐도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콜로세움이다.
석조 건축물이었고, 손바닥으로 훑어보니 표면이 울퉁불퉁했다. 콜로세움의 벽면은 창문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는데 곳곳에 풀이나 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모든 경기장이 이렇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 깔끔하고 현대적인 경기장도 많이 있을 텐데, 이런 경기장을 대여한 이유는 시험에 관련된 사항일 것이다.
물론 제인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걸음을 옮기면서, 제인은 경기장을 소유한 발케제 일족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날렸다. 그때마다 발케제 측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워낙 스케일이 큰 키젠이니 자잘한 문제는 쿨하게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건물의 보존 상태나 보수 비용까지 깐깐하게 지적하는 제인의 압력에 발케제 일족은 결국 보수비까지 자신들이 충당하기로 했다.
그런 제인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는지, 메이린은 눈을 빛내며 제인의 질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첩에 기입하고 있었다.
이내 그들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메이린이 입을 벌렸다.
"여기 수영장이었어요?"
콸콸콸-!
경기장 중앙의 동상에서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경기장 바닥은 푸른 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전 좌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다 내려다볼 수 있었다.
'와.'
시몬도 감탄했다. 대단히 오래된 고전 수영장 겸용 경기장.
멋진 곳이긴 했다. 귀족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이 관중석에 잠깐이라도 앉아보려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럼,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제인이 위원회 사람들과 시몬, 메이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경기장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의 경기에 방해나 위협이 되는 요소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물에 잠겨 있는 부분까지 꼼꼼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때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저희는요?"
시몬과 메이린은 교복 차림이었다. 제인이나 위원회 사람들이야 어떻게든 흑마법을 써서 물에 젖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 아직 두 사람은 그런 흑마법까진 배우진 못했다.
제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학생회도 예외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수영복으로 환복하고 조사를 시작하십시오."
"네에에?"
메이린이 경악했다.
"저희 수영복 안 가져왔는데요!"
"모조."
제인이 고개를 돌리며 모조의 이름을 불렀고, 두 사람의 시선도 돌아갔다.
그곳에는 모조가 세상 태연하게 두 사람의 수영복을 들어 올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아악! 내 수영복이 왜 저깄어어!"
얼굴이 벌게진 메이린이 마구 팔을 휘저으며 달려갔다.
* * *
시몬은 근처에서 수영복 바지로 갈아입고 나왔다.
제인과 위원회 사람들은 이미 조사를 하러 떠난 모양이다.
그리고.
"......."
메이린은 시뻘게진 얼굴로 쪼그려 앉은 채 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수영복 갈아입고 나온 이후로 한마디도 없이 쭉 저 상태다. 시몬이 쓰게 웃었다.
"여기서 기다릴래?"
"가, 갈 거야!"
메이린이 빼액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 나도 키젠의 부회장이니까."
"......새삼 왜 그래? 같이 수영복 입고 해변에 간 적도 있었잖아."
1학년 시절, 바다에서 하는 BMAT를 대비한답시고 해변에서 다 함께 흑마법을 연습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는 사람도 얼마 없고, 그때 메이린이 입었던 수영복에 비해 노출도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때는 해변이었으니까!"
벌게진 얼굴의 메이린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리고 공평하게 다 벗은 게 아니라 우리 둘만 수영복 입고 있잖아!"
"......하하."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부끄럽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시몬은 저 멀리서 힐끔거리고 있는 발케제 일족들을 한번 눈으로 쭉 노려봐 준 다음,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차라리 빨리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나 먼저 갈게."
"어, 어?"
시몬은 코를 막고는 물이 가득한 경기장 안으로 힘차게 뛰어들었다.
풍덩!
커다란 물줄기가 솟구치며, 시몬의 몸이 꼬르륵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오.'
물이 너무 파랗길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수질은 좋아 보였다. 시몬은 잠시 임무도 잊고 신나게 물장구를 쳤다.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훌훌 날아가는 것 같았다.
"메이린! 너도 들어와! 시원하고 너무 좋아!"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시몬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메이린이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 씨, 나도 몰라아!"
그러곤 멋들어진 다이빙 포즈로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풍덩!
메이린도 무사히 들어왔다. 생각보다 시원해서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부끄러워하던 건 까맣게 잊고 사뿐사뿐 헤엄치며 주위를 돌아다녔다.
두 사람이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며 노는 것도 잠시, 먼저 임무를 상기한 메이린이 앞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호흡 마법을 걸고는 수영장 전체를 돌아다니며 경기장의 상태를 점검했다.
고대 경기장은 보기엔 고풍스럽고 좋았지만, 오래된 만큼 곳곳에 삐쭉 튀어나온 날카로운 부분도 꽤 보였다.
경기를 뛰는 학생들이 여기에 닿으면 살이 찢어지거나 크게 다칠 수도 있었기에, 시몬은 빠짐없이 체크했다.
슥슥-
그때 더 아래에 있던 메이린이 시몬의 발끝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
하늘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아름답게 흩어진 메이린의 모습은, 말 그대로 동화 속의 인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시몬이 잠시 멍해 있자, 그녀가 팔을 마구 흔들며 화내는 시늉을 하고는 아래를 가리켰다.
바닥이 벗겨지고 산화라도 된 듯 붉은 뭔가가 나오는 게 보였는데, 물이 깊어서 큰 변화는 없었지만 이것도 위원회 측에 알리기로 했다.
두 사람은 조사를 끝낸 뒤에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푸하!"
"후우!"
시몬이 먼저 올라가 메이린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열변을 토했다.
"아니, 너무 막장 아냐? 경기장 보존 상태 완전 개판이야! 특히 물밑에는 손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아."
"응. 정리해서 제인 교수님께 말씀드리자."
메이린 아공간에서 체크리스트를 꺼냈다. 물 밖에서 확인한 부분들을 다시 작성한 다음, 바로 물에 들어갔다.
남은 시간을 고려한다면, 이번이 마지막 잠수였다.
꾸르르륵!
워낙 깊고 넓은 곳이라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메이린은 수영에 재미가 들렸는지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도 일이지만, 나름 재밌는데.'
남들은 한창 공부하고 있을 시간에 텅 빈 경기장에 둘이서 수영이라니. 살짝 일탈 같기도 해서 묘하게 즐거운 경험이었다.
[소년.]
그때 수영복 주머니에 넣어둔 피어의 분신이 말을 걸어왔다.
'왜 그래요? 피어.'
[근방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상한 기운? 피어가 허튼소리를 할 언데드는 아니었기에 시몬은 바로 움직임을 멈췄다.
'어디에요? 바로 가볼게요.'
[여기서 조금 더 아래다.]
시몬은 단숨에 물살을 가르며 바닥까지 내려왔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저기 기둥 같은 걸 지나야 한다!]
피어의 안내에 따라 계속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경기장의 수로까지 도달했다.
이 경기장이 원래 지역에 있을 때는 근방의 강물을 이용했다고 했다. 즉, 이곳만큼은 365일 늘 물에 잠겨 있는 곳이다.
대충 보면 그냥 휙 지나칠 수 있는 구간이었지만, 시몬은 피어의 안내에 따라 벽면의 이끼를 벗겨냈다.
'!'
경기장 벽면에, 마치 해저동굴을 연상케 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냥 휙 보고 갔으면 무조건 지나쳤으리라.
시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구멍 안을 들여다보았다.
'통로가 위로 뚫려 있네. 어디로 올라가는 거지?'
마침 메이린이 시몬이 걱정됐는지 헤엄쳐 오고 있었다. 시몬은 곧장 구멍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렸고, 두 사람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통로를 따라 쭉쭉 헤엄쳐 위로 올라갔다.
"푸하!"
"하아!"
이내 두 사람이 수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느새 주위는 동굴이었다.
"뭐야 여기!"
메이린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시몬도 휘둥그레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 같은데. 경기장에 이런 구조가 가능한가?"
경기장 내부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자연동굴.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젠의 학생회로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 칠흑을 일으킨 채 천천히 앞으로 가보았다.
"!!"
그때 옆에서 잘 걷던 메이린이 창백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래?"
"시, 시몬! 저기......!"
동굴 바닥에 뼈가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사람의 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