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28화
여운이 짙은 경기였다.
광신도 사태로 쌓여 있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관중들의 환호성과 동기들의 웃음에 조금이나마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시몬은 소환한 카오스 리퍼를 해제한 뒤 고개를 돌렸다.
'헥토르.'
그는 자신의 물건에 불결한 것이라도 묻은 것 처럼 시룡의 날개를 탈탈 털고 비늘들을 공중으로 띄워서 청소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몬과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확 찡그렸다.
"뭐냐."
시몬이 쓰게 웃었다.
"아니, 그냥. 고맙다고."
"닥쳐라."
감사를 표해도 저러다니.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헥토르는 시룡 파츠들을 아공간에 회수하고는 냉정하게 등을 돌려 걸어갔다.
"무슨 일에 휘말렸는지는 모르겠다만, 나한테 꺾이기 전에 함부로 뒈지지 마라."
시몬은 웃는 얼굴로 그가 경기장에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닥쳐라!"
어쩐지 질색하는 듯한 반응이라, 시몬은 소리 없이 웃었다.
* * *
경기가 끝나고 잠깐 대기실에 물을 마시러 온 사이, 10조 조원들과 피츠제럴드가 찾아왔다.
"수고했어, 시몬."
로레인이 뽀송뽀송한 흰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갓 세탁한 섬유에서 나는 포근한 냄새가 났다. 시몬이 그것을 받아들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 로레인."
"우리가 이겼다아! 이겼다구!"
에슈는 아직도 승리의 여운에 심취해 있는 듯 깡충깡충 뛰다가, 토토의 양어깨를 붙잡고 폴짝거렸다. 토토의 얼굴이 벌게지는 건 덤이었다.
시몬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옆에 서 있는 피츠제럴드에게 조용히 물었다.
"오전 경기는 어땠어?"
방금 뛴 경기가 오후 경기였고, 오전 경기는 광신도의 조사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시몬이 갑자기 빠진 만큼 소환학과는 전력에 공백이 생겼고, 그 공백을 준비되지 않은 다른 학생들이 메꿔야 했다. 일정이 여러모로 꼬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피츠제럴드는 메모장을 펼쳐 보이더니, 과장도 축소도 없이 담백하게 답했다.
"네가 빠진 오전 경기는 7위, 오늘 경기들의 성적은 전체적으로 중위권이다. 전체 순위는 3학년 경기의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3위 정도까지 내려갈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구나."
시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에이~ 너무 신경 쓰지 마! 회장!"
에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왔다.
"네가 지금까지 해준 게 얼만데! 오전 내내 양심 없이 욕하던 애들도 이번 경기를 보고 다시 생각이 달라졌을......!"
"에슈."
로레인이 눈치를 주자, 그녀가 뒤늦게 입을 착 하고 가렸다.
시몬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냐, 아냐. 내가 욕먹을 만한 짓 했지."
전체 1위로 잘나가던 소환학과에, 시몬 본인이 찬물을 끼얹은 격이었다.
하지만 로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학생회 일도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잖아? 몇몇 애들이 조금 투덜거리긴 했지만, 속으로는 네 입장을 이해해 줄 거야."
"......고마워, 로레인."
로레인의 말은 따듯했지만, 모든 학생들이 로레인처럼 이성적이고 의젓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1위를 따내지 못해 쏟아지는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너희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시몬이 주먹에 힘을 주며 각오를 다지는데, 피츠제럴드가 말했다.
"내일도 한 경기. 부탁할 수 있을까? 시몬."
"응, 물론이야."
"고맙다. 이 정도의 변수는 언제든지 있는 법. 오늘은 이래저래 헤맸지만, 내일은 어떻게든 적응해서 순위를 끌어올려 보겠다."
무뚝뚝하지만 이것도 피츠제럴드 나름의 격려였다. 에슈와 토토도 끼어들었다.
"걱정 마 회장~ 내가 애들한테 말 잘해놓을게!"
"나, 나도! 네 몫까지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안심하고 일해! 시몬."
"다들 고마워. 열심히 할게."
학생회장이 됐고, 이 정도의 상황은 각오했다.
지금은 그저 이 학교를 어떻게든 지키고 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 *
경기장에서 빠져나온 시몬은, 다시 네프티스의 측근들이 모인 베이스캠프인 그레리온 교수의 동굴로 돌아왔다.
한 경기 뛰고 온 사이에 경계가 상당히 강화된 모습이다.
동굴 곳곳마다 네크로맨서 요원들이 빠짐없이 지키고 있었고, 결계는 삼중 사중으로 쳐져 있었다.
복잡한 보안 절차를 거쳐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그곳에서는 여전히 얼굴의 1/3만 남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수확의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으음.'
다시 봐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얼굴이 날아갔지만, 성녀의 권능은 새어 나오는 듯 동굴 곳곳에 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왔나, 시몬."
요원들과 이야기 중이던 카쟌이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어서 오게, 학생회장."
네프티스 최측근인 까마귀 요원, 알레이스터도 반겨주었다.
시몬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 걸어왔다.
"앉게나."
"넵."
알레이스터는 잔에 찻잎을 우리고 있었다. 거칠고 억세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차를 우리는 솜씨가 익숙했다.
시몬은 그가 건넨 찻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사건에 좀 진전이 있었나요?"
"잠깐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
시몬의 옆자리에 털썩 걸터앉은 카쟌이 피곤한 표정으로 제 목을 짚었다.
"우선 암흑제는 계속 강행될 것 같다."
카쟌과 알레이스터를 비롯한 네프티스의 측근들은 '키젠 본부' 전체를 온전히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알리면 필연적으로 정보가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에버 키레가 가진 이능에 대해서. 특히 신성연방의 이스라필 측과 협력해서 로크섬 한복판에 '수확의 성녀'를 데려온 사실은, 다른 본부 측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붙잡은 프리스트의 경우, 까마귀이자 바힐의 동기인 '퀸터'에게 들키기도 했으니 키젠 본부 측에 구금 사실을 알렸다.
키젠 본부와 암흑연합은 로크섬에 들어온 프리스트를 잡았다며 기뻐하고는 암흑제를 강행한다는 것 같았다.
"그나마 에버 키레가 로크섬에 들어왔다는 확실한 증거는, 현실이 조작된 죽음을 맞이한 저 성녀의 모습뿐이다만."
카쟌이 검지로 얼굴 없는 수확의 성녀를 가리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성녀를 공개할 수 없다."
"그렇죠."
이 건은 신성연방과 암흑연합 피차가 모르는, 이스라필과 네프티스 사이의 비밀거래다.
적대국 측과 내통했다는 게 알려지면 또 다른 파국이 일어난다. 이건 아예 공개하지 못하는 카드가 맞다.
"그런 것 보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네."
알레이스터가 그렇게 말하며 새로운 1급 기밀을 봉투에서 꺼냈다.
"에버 키레에 대한 소식일세."
그가 서류를 평평한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류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작동해서 마나 스크린을 펼쳤다.
"우선 수확의 성녀 곁에 발견된 다량의 혈흔들. 제일 먼저 현장을 발견한 요원들이 혈흔이 완전히 모래에 스며들기 전에 채집해서 조사한 결과, 프리스트의 것으로 확인됐네."
그가 고개를 돌려 시몬을 보았다.
"그 혈흔은 수확의 성녀의 것도, 이번에 포획한 프리스트의 것도, 파라한 교수와 그 조교들의 것도 아니었다네."
"그렇다면 에버 키레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있네. 그리고."
촤륵!
알레이스터가 차트를 펼쳐서 시몬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키젠 항구에 정박한 배들의 목록일세. 요약하자면, 정박한 배 중에서 한 척의 배가 더 빠져나갔다네."
그랬다. 오늘 오후에 26척의 배가 로크섬을 떠났다고 등록되어 있는데, 남은 배들을 조사해 보니 1척이 더 떠난 것으로 보인다.
한 척이 그냥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전 선박의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 중이던 로크섬에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에버 키레가 간섭한 건가.'
시몬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도 방금 보고 받은 건이지만, 그 배는 랭거스틴 외곽 항구에서 발견됐네. 그리고 '수확의 성녀'의 주변에 발견된 혈액과 똑같은 혈액이 발견되었네."
"즉."
카쟌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추측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다. 수확의 성녀를 잡으려다가 큰 상처를 입은 에버 키레가 이미 로크섬을 빠져나갔다. 혹은―"
"에버 키레가 그렇게 믿게 하려고 꾸몄거나. 라는 거죠?"
"그래, 이해가 빠르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알레이스터가 팔을 내리며 걸어갔다.
"나는 전자의 경우에 무게를 두고 있네."
"음."
"지금부터는 내 추측일세. 에버 키레는, 신성과 권능을 봉인한 채 쉬고 있던 수확의 성녀를 베었네."
시몬의 머릿속에, 광신도 에버 키레가 수확의 성녀의 얼굴을 이능으로 절단하는 모습을 떠올랐다.
"그녀를 처치한 에버 키레는 방심했겠지. 증거를 지우고 수확의 성녀를 데려가기 위한 이동마법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잘린 성녀는 여전히 성녀의 권능을 쓸 수 있었다네."
알레이스터가 손을 뻗어 동굴 곳곳에 자라난 밀들을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성녀가 싸울 수 있을지 몰랐던 에버 키레는 기습에 당해 큰 상처를 입었고, 뒤이어 우리 네크로맨서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성녀를 내버려 두고 도주했네. 그리고 경비가 삼엄해지기 전에 로크섬에서 빠져나갔겠지. 여기까지가 내 추측일세."
묵묵히 듣고 있던 시몬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너무 낙관적인 흐름 아닐까요? 광신도란 자가 그렇게 쉽게 자신의 목적을 꺾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에버 키레는 프리스트들이 '여신과 가장 가까운 딸'이라고 칭송하는 성녀를 죽이려 했네. 직후, 믿음이 무너져내리며 자신의 신성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었지. 프리스트들에게는 의외로 흔한 일이니."
잘 가다가 이게 무슨 소리야? 시몬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성 슬럼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말이 안 돼요! 애초에 에버 키레가 성녀를 무력화시키려 했던 건 자신의 계획에 성녀가 방해됐기 때문이잖아요!"
이렇게 프리스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가.
하긴, 이게 대륙의 평균이었다. 네크로맨서나 프리스트나 자신의 영역에서는 절대적일지 몰라도 서로에 대한 이해도는 절망적이었다.
"지금은 예측만으로 옳고 그른 걸 판단할 때가 아닙니다."
카쟌이 끼어들었다.
"정확한 결과가 나온 뒤에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알레이스터는 고개를 끄덕였고, 시몬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결과라뇨? 뭔가 또 나올 게 있어요?"
"직후, 신해의 성녀에게 연락이 왔었다."
카쟌이 눈 밑에 난 흉터를 슥슥 긁으며 말을 이었다.
"수확의 성녀가 어떻게 됐는지 들은 그녀는, 사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다며 추가 지원을 약속했다."
시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여기서 수확의 성녀만 데려가고 손을 뗄 줄 알았는데.
"추, 추가 지원이라구요? 누가 오는데요?"
* * *
암흑연합.
이름 없는 숲의 텔레포트 마법진.
"네, 준비는 완벽해요."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통신 수정구를 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뒤이어 통신 수정구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소녀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명심할게요."
그녀의 주위에는 팔라딘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바닥에 박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네, 일 끝나고 연락할게요."
착.
통신을 마친 검은 로브를 걸친 백발의 소녀가 가방을 어깨에 가볍게 둘러멨다. 로브 안에 흰 머리를 매만지자 검게 물들며 찰랑이는 듯한 잿빛으로 변했다.
가볍게 구두를 툭툭 바닥에 대보고는 목에 맨 초크 목걸이를 훑어본 그녀가, 팔라딘들을 쓱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다녀오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