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38화
진실과 거짓.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삶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친모에게 버려지고, 도시의 하수도를 전전하다가 마약 재배범 부부에게 팔려 나간 이 모든 게, 진정으로 진실된 세상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녀는 죽음의 위기에서 종종 유체이탈을 경험했다.
무거운 육신을 벗어던지고 날아올라 마을을 내려다보고, 산과 바다를 굽어보고, 마침내 하늘의 구름과 하나가 됐을 때.
날개 달린 천사들이 나팔을 불며 그녀를 즐겁게 해줄 때.
그녀는 비로소 이것이 '진실한 세상'이라고 여겼다.
구더기 끓는 음식, 가혹한 노동과 학대, 냄새나는 하수구가 자신의 세상일 리가 없다. 그녀는 점점 더 잦은 유체이탈을 경험하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부정했지만.
결국, 그 끝은 현실이었다.
아무리 즐겁고 황홀한 시간을 보냈어도 마지막에는 허름한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천국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약 재배에 동원되어 픽픽 쓰러져 가는 또래 아이들, 그 속에서 그녀는 하늘을 보며 언젠가 천사들이 자신을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길 바라며 버텼다.
-에버. 분명 천국은 너무 행복하니까, 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서 시간이 걸리는 걸 거야.
하나뿐인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버티자. 여기서 살면서 불행을 쌓아나가면서 버티면, 그 불행들이 차곡차곡 모여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되어줄 거야.
-살아남아, 에버.
하나뿐인 친구는 그다음 날, 마약 밭에서 입에 흰 거품을 물며 쓰러져 폐기되었다.
에버 키레는 그 유언대로 이 가짜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이제 곧 빛나는 현실로, 하늘 너머에 있는 천국에 올라갈 일이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에.
그러나 끝은 오지 않았고, 그녀의 목숨은 질겼다.
'.......'
지쳤던 그녀는 소원을 빌었다.
너희가 그토록 내 목숨을 끊어주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언젠가 가게 될 천국을 조금이라도 보여달라고.
-나의 딸.
그러자 어떤 목소리가 응답했다.
그것은 여신의 목소리라고 에버 키레는 확신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사명을 내렸고, 그 뒤 그녀는 천국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그녀는 마약 밭을 자신이 좋아하는 민들레 꽃밭으로 만들었다. 분노해서 날뛰는 어른들과 자신을 막대하던 친구들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민들레 꽃밭과 함께 불에 태웠다.
그녀만의 천국.
가짜뿐이던 삶에, 드디어 자신만의 작은 천국이 생겨났다.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천국행 티겟을 만들 거야.'
진짜 천국에 가기 위해.
이 가짜에서 자신만의 천국을 만들기로 했다.
* * *
화아아악-!
눈부신 신성이 에버 키레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그녀는 성의를 몸에 걸쳤으며, 복부에는 성녀의 정수를 빼앗긴 진짜 '수확의 성녀'의 팔이 축 늘어진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흉악하고 괴이한 모습으로, 에버 키레는 맨발로 바닥에 발을 디뎠다.
싸아아아아아아아-
경기장 전역에 밀들이 점점 더 높게 올라와 바람에 흔들렸다. 어느새 이 경기장 전체가 노을을 머금은 듯한 황금빛 밀밭으로 변해 있었다.
[아주 좋아.]
에버 키레는 새롭게 얻은 자신의 힘이 만족스러운 듯 밀밭을 훑어보았다.
"당신......!"
레테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선배의 힘을 쓰는 검까?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당신에 로크섬에 와 있는 거죠?"
에버 키레가 들썩거리며 웃었다.
[나는 처음부터 로크섬에 있었다.]
에버 키레의 목적은 네크로맨서들의 심장부인 키젠의 파멸이었다.
그녀는 발케제 일족을 조종했고, 현실을 조작했다. 돌려보내졌어야 할 발케제 경기장을 로크섬에 남겨 16번째 경기장으로 만드는 등 착착 계획을 진행했다.
모든 건 순조로웠지만.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했다.
바로 수확의 성녀.
그녀는 성녀의 권능으로 신성 사용자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그나마 에버 키레의 입장에서 다행스러웠던 건, 자신이 아닌 준비해 둔 '더미'가 먼저 들켰다는 점이었다.
더미는 발각 사실을 에버 키레에게 알렸고, 에버 키레는 신성을 흐름을 역산해 수확의 성녀를 찾아냈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성녀의 힘을 봉인하고 있던 그녀를 기습하여 마침내 이능으로 베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수확의 성녀의 머릿속을 읽었다.
신성연방의 이스라필이 전쟁을 막기 위해 암흑연합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수확의 성녀가 이대로 당하면, 다음에는 더더욱 강력한 탐지 능력을 가진 성녀를 보낼 거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다음에 올 성녀는 별의 성녀, 사르데나.
그녀에 대한 정보를 확보한 에버 키레는 계획을 바꾸었다. 수확의 성녀를 집어삼켜 그녀의 힘을 일부 흡수한 뒤, 자신의 모습을 수확의 성녀와 똑같이 바꿔서 당한 척했다. 현실을 조작해 주위에 밀들을 자라나게 한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더미에게는 섬을 빠져나가라고 지시했다.
키젠 측 요원들은 수확의 성녀가 에버 키레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안전한 동굴로 옮겼다. 그들은 섬을 빠져나간 더미를 추적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그사이 별의 성녀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대비는 끝났다. 섬 전역의 신성을 감지해도 수확의 성녀의 신성만 감지할 수 있었으리라.
"그럼......!"
시몬이 입술을 깨물었다.
"동굴에 내내 있었던 건!"
[바로 나야.]
에버 키레가 입가를 찢으며 웃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면 모든 게 이루어져. 내가 결정하면, 모든 인간은 이에 따를 수밖에 없어. 대륙의 그 누구도, 이 '신의 힘'에 대항할 수 없지!]
싸아아아아아-
밀들이 점점 크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음의 마녀와 싸우기 전에, 너희들을 정리하는 데 굳이 신의 힘을 소모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녀가 손끝을 뻗었다.
[새로 얻은 성녀의 힘을 시험해 볼까.]
팟!
그 순간, 충혈된 눈의 시몬이 거칠게 돌진하고 있었다.
"시몬! 진정해요!"
레테가 외쳤다. 시몬은 밀밭을 가르며 돌진하는 동시에 아공간을 열었다.
촤르르르르르!
아공간에서 피어의 뼈가 날아와 시몬의 몸을 뒤덮었다. 이내 피어의 팔뼈로 덮인 오른손을 뻗자, 새하얀 대검이 날아와 척! 하고 붙잡혔다.
순식간에 피어를 입고 해골 기사가 된 시몬이 몸을 한 바퀴 돌리자, 등에 입혀진 무형의 망토 또한 펄럭이며 시몬을 따라 회전했다.
"하아아아!"
까아아아아아앙!
맹렬한 궤도를 그리며 휘둘러진 하얀 칼날이 뭔가에 막혔다.
'파멸의 대검이......!'
카가가가각!
그녀의 앞에 보호벽처럼 펼쳐져 있는 결계에 막혀 있다.
이건 에버 키레의 이능이 아니다. 신성, 아니, 성녀의 권능으로 펼쳐진 보호벽.
'수확의 성녀의 힘인가!'
에버 키레가 히죽 웃었다. 시몬은 즉시 바닥을 걷어차며 뒤로 물러나 초대형 아공간을 열었다.
"메이지들! 쏴!"
<다크 블레이즈>
아공간 안에서 스켈레톤 메이지가 발사한 검은 화염이 연달아 보호벽을 두들기고.
<블라인드>
<페럴라이즈>
시몬이 검을 쥐지 않은 왼팔로 연속 저주를 쏘아 보냈지만, 저주마저도 보호벽을 뚫지 못했다.
물리력, 칠흑 원소마법, 저주까지.
모든 게 통하지 않는다.
시몬이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났다.
[키젠이 어마어마한 걸 숨기고 있었구나.]
에버 키레가 히죽 웃었다.
[일개 학생이 사실은 군단장이었다니. 아주 재미있어.]
그녀가 팔을 휘두르자, 허공에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진 빛의 마법진에서 섬광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큭!"
시몬은 제자리에서 거칠게 대검을 휘둘러 그 공격들을 쳐냈다. 그러나 변칙적으로 들어온 섬광이 칼날을 피해 굴절되어 시몬의 어깨로 향했다.
파앙!
그 순간, 눈발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레테가 발차기로 백마법을 걷어차며 나타났다.
"레테!"
"섣부르게 들어가지 마십쇼."
레테가 바닥에 내려오며 말했다.
"수확의 성녀는 성녀들 중에서도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함다. 그녀가 바닥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저 보호벽을 뚫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시몬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바닥에 발을 딛는 게 조건이야?"
"네. 발을 떼게 해야 하는데 그게 쉬울 리가......."
"해봐야지."
척!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들어 올렸다. 검푸른 칠흑이 검신을 물들였다.
레테 또한 시몬 쪽으로 등을 기울이며 초크 목걸이의 봉인을 온전히 해제했다. 별빛이 튀어 오르며 거대한 신성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에버 키레가 웃었다.
각자 검은 힘과 하얀 힘을 쏟아내는 소년과 소녀가 자신을 향해 맹렬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군단장과 성녀가 힘을 합치다니 말이야.]
"가자! 레테!"
"네!"
두 사람이 각각 칠흑과 신성을 밟으며 돌진했다. 이에 에버 키레가 손을 아래에서 위로 들어 올렸다.
"!!"
밀밭을 가르며 돌진하는 두 사람의 앞으로 커다란 짐승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시몬이 급히 파멸의 대검을 앞으로 보냈다.
카가각!
짐승의 송곳니와 대검이 부딪혔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시몬이 밀리며 물러섰다. 레테도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집채만 한 빛의 사자가 밀밭 위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갈기는 희고, 이빨은 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자는 바닥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았는데, 마치 밀밭 위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신수? 아니야, 이건......!'
성녀의 권능으로 만든 피조물의 일종이었다.
촤아아아아-
촤아아아-
빛의 사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을 딛고 달리는 게 아니라, 마치 주위의 밀밭을 파도처럼 타면서 큰 원을 그리다가 급속도로 쇄도했다.
시몬의 입장에서는 그냥 빛이 훅 하고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반사적으로 대검을 앞으로 세우자, 꽝! 하고 마차에 부딪힌 충격과 함께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
시몬이 바닥에 착지하는 것보다, 빛의 사자가 밀밭을 타고 그의 등 뒤로 돌아오는 게 더 빨랐다.
'에버 키레에 시선을 돌릴 틈도 없어!'
간발의 차이로 등 뒤로 대검을 휘둘러 사자의 공격을 튕겨냈다.
싸아아아-!
그때 경기장 전역에 자욱한 밀들이 흔들렸다. 이내 신성으로 이루어진 듯한 밀알이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하고, 밀알들은 바닥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우우웅!
에버 키레가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녀를 보호하던 방어벽이 더더욱 거대해지고, 빛의 사자들 또한 그 덩치가 커지며 갈기에 눈부신 섬광이 감돌았다.
"더 강해졌어?"
"저게 수확의 성녀가 까다로운 이유임다."
레테도 사자 한 마리를 상대하며 시몬 쪽으로 다가왔다.
"저 밀 하나하나가 프리스트랑 같아요. 대기와 대지의 마나를 빨아들여 신성의 밀알로 맞바꾸고 그 힘은 모조리 수확의 성녀와 그녀가 다루는 피조물의 힘이 되죠."
크르르르르!
벌써 세 번째 사자가 나타났다.
수확의 권능을 상대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전세가 불리해진다.
"나도 조금 놀랐슴다. 선배의 힘을 빼앗은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기억을 읽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권능을 잘 쓰다니."
"이제 어쩌지?"
"한 번에 쏟아내 몰아붙이면 됨다. 맡겨주십쇼."
그 순간.
레테의 등 뒤로 밀을 타고 두 마리의 사자가 뛰어들었다. 시몬이 눈을 부릅떴다.
"레......!"
그리고.
돌진한 사자의 등 뒤에서 두 개의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투콰아아아아악!
두 개의 별이 사자들을 끌어안고 밀밭을 가르며 나아가다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레테가 이어서 차분한 표정으로 손끝으로 휘저었다.
휘오오오오!
사방에서 연달아 별들이 떨어지며 밀밭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밀밭이 초토화됐고 에버 키레를 감싸고 있던 방어벽이 약해지며, 사자들의 크기도 줄어들었다.
그녀가 세상 태연하게 말했다.
"나도 일단은 성녀인데요."
시몬이 씩 웃으며 대검을 뒤로 보냈다. 이번엔 자신의 차례였다.
'공간째로......!'
파멸의 대검이 웅웅 떨렸다. 이내 피어의 힘과 칠흑을 실어 바닥에 대고 휘둘렀다.
'베어내는 감각!'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산더미만 한 참격이 바닥을 가르며 나아갔다. 무수한 밀밭이 반으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뻗어 나온 검은 참격이 단번에 에버 키레의 보호벽에 부딪혔다.
[소용없어.]
에버 키레가 말했다.
"아뇨."
어느새.
레테가 앞으로 쭉 뛰어 들어와 바닥을 짚고 있었다.
"대지의 신성을 순간적으로 소모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함다."
우웅!
순간적으로, 에버 키레의 소유였던 대지에 레테의 방대한 신성이 스며들었다.
[뭘 하려는 거지?]
"잠시 동안만 이 행성의 이 구간만 내 '별'로 만드는 검다."
그녀가 손끝을 위로 향했다.
"별을 떨어뜨리는 데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함까?"
별의 성녀의 진짜 권능.
그건 바로.
<그래비티 필드>
중력이었다.
에버 키레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며 그녀의 발이 바닥에서 떠올라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녀의 발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으로 보호벽도 사라졌다.
그리고.
타앗!
함께 공중으로 떠오른 시몬이 대검을 치켜든 채 에버 키레에게 다가왔다.
"잠깐 빼앗은 힘으로는!"
[아!]
시몬의 대검이 내려왔다.
"우릴 못 이겨!"
쩌어어어어어어어억!
파멸의 대검이 에버 키레의 머리를 가르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