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39화
에버 키레의 몸과 머리가 분해된 채 바닥에 떨어졌다.
처억.
뒤이어 시몬이 칠흑의 망토를 휘날리며 공중에서 내려왔다. 대검을 바닥에 꽂은 채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손에 감각이 확실했어.'
세상 모든 종류의 재생과 회복을 막는 파멸의 대검으로 에버 키레를 직접 베었다.
끝났다.
시몬은 주먹을 말아쥔 채 여운을 느꼈다.
"괜찮아요?"
레테가 다가왔다. 시몬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에버 키레는?"
레테는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몸과 머리가 분해된 에버 키레가 쓰러져 있고, 바닥에는 흘러나온 벌건 핏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뱃속에 들어가 있던 '수확의 성녀' 또한 추락의 충격으로 멀찍이 튕겨 나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성녀님!"
"제가 보겠슴다."
레테가 그녀의 앞에 꿇어앉아 상태를 세밀히 살펴본 뒤 말했다.
"성녀의 정수는 빼앗겼지만 살아 있어요. 의식을 잃었을 뿐임다."
마침 죽은 에버 키레의 몸에서 성녀의 정수로 추정되는 빛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입고 있던 성의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성녀의 정수는 성녀가 사망하면, 적합한 후보자를 찾기 위해 대륙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에버 키레는 확실히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 같아 시몬은 안도했다.
'하지만 한 가지 찜찜한 건.'
아직 이 에버 키레가 만든 왜곡된 세상이 무너지고 있지 않다는 것.
수확의 성녀의 정신도 돌아오질 않고 있다.
[그래. 그래.]
'!'
시몬은 움찔하며 대검을 강하게 붙잡았다.
[재미있는 여흥이었다.]
쫘아아아아아악-!
바닥에 흥건하던 피가 파도치며 되돌아가고 에버 키레의 머리와 몸은 다시 붙었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듯, 누워 있던 에버 키레가 똑바로 서서 목을 뻐근한 듯 매만졌다.
시몬의 입이 벌어졌다.
"어, 어떻게! 분명 재생은 불가능할......!"
[재생 따위가 아니야.]
에버 키레가 히죽 웃었다.
[내가 검에 베였다는 사실을 없던 일로 한 거지.]
그녀가 웃었다.
마치 이 세상을 비웃듯이.
쩌어어어억!
그 순간, 하늘에서 빛의 창이 날아와 에버 키레의 등에 구멍을 뚫었다. 레테가 싸늘한 표정으로 팔을 휘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헛소리도 정도껏......!"
[정말로.]
레테의 눈이 부릅떠졌다.
시체가 되어 있어야 할 에버 키레가, 어느새 레테의 앞에 나타나 그녀의 턱을 붙잡은 채 끔찍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헛소리라고 생각하니?]
레테의 몸이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레테!"
부아아앙!
즉시 시몬이 달려와 파멸의 대검을 휘둘렀고, 에버 키레는 마치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젠장!"
레테가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본인의 턱을 소매로 마구 문질렀다. 에버 키레가 싱긋 웃었다.
[나는 또 하나의 신.]
그녀가 두 팔을 뻗어 하늘로 향했다.
[위대한 데바 여신이 자신의 살갗을 떼어내어 직접 창조한, 동등한 격의 존재.]
그녀가 황홀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내가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데바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지. 사명이 있었거든.]
어린 시절.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져 하수도를 전전했고, 폭력과 학대에 노출되어 마악을 재배하며 서서히 죽어가던 그 시기.
에버 키레는 한때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준 데바 여신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깨달았다.
[사실은 그 모든 게 원죄였어! 이 세상은 신인 내게 원죄를 쌓고 있었던 거야! 내가 거리낌 없이 세상을 심판을 할 수 있도록!]
그녀가 심취한 표정으로 두 손가락으로 얼굴을 훑어내렸다. 손톱이 얼굴 가죽을 벗기고 피를 짜내며 쭈우욱 내려갔다.
[모든 건 위대한 데바 여신의 안배였어! 그래! 그랬던 거야! 우선 너희들, 더러운 죽음을 섬기는 네크로맨서들과 키젠을 무너뜨리겠다! 다음은 여신의 뜻을 왜곡하여 눈먼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에프넬을 나의 교리로 흡수해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겠어! 세상을 정화하고, 새로운 낙원을 건설하는 거지! 어때? 여신의 아이야.]
그녀가 레테를 보며 손을 뻗었다.
[아직 늦지 않았단다. 눈을 뜨렴. 네 눈을 가리고 있는 에프넬의 가르침은 이제 잊고 내 계시를 섬기렴. 그리하면 내 너를 반신, 그 이상의 자리에.......]
하아.
레테가 한숨을 푹 쉬고는 중지 손가락을 보였다.
"엿이나 먹어."
에버 키레가 안타깝다는 듯 한탄했다.
[그래, 결국 너도 왜곡된 가르침에 오염되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녀가 천천히 두 팔을 좌우로 펼쳐 들었다.
[나의 죄가 크다.]
그녀의 두 팔이 허공에 고정되듯 하더니, 이내 붉은 십자가가 나타났다.
다시 한번 에버 키레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공으로 치솟았다.
[이 마귀들의 섬을, 나의 낙원으로 삼아 심판하겠노라.]
그렇게 말한 그녀의 몸이 십자가와 함께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조심하십쇼! 어디서 올지 모름다!"
"그래."
시몬과 레테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주위의 지면이 뒤흔들렸다. 바위와 파편 등이 공중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야?"
레테가 방호벽을 펼치며 말했다. 주위를 훑던 시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섬이......!"
떠오르고 있다.
쏴아아아아아-!
쏴아아아아!
바다가 거세게 요동친다. 돌풍이 사방에서 몰아친다. 뭔가가 뜯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섬이 두둥실 떠올랐다.
콰콰콰콰콰!
약한 지반과 암벽들이 무너져 내리고, 가장 커다란 덩어리인 로크섬이 점점 더 높은 고공으로 치솟았다.
마치 에프넬의 하늘섬처럼.
'이런 것까지 가능하단 말야?'
시몬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며 회색 구름을 넘어섰다. 새하얀 벼락이 내리친다. 에버 키레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시몬."
그때 레테가 떨리는 손끝으로 앞을 가리켰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아, 앞을 봐요."
"어디? 아무것도 없는데."
"바로 앞이 아니라 더 멀리."
시몬의 눈이 뒤늦게 커졌다.
섬에 있는 게 아니었다.
끝없이 치솟은 상공.
회색 구름을 뚫고 갈라진 하늘의 틈에서,
'아.'
사람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다른 차원의 사람.
그것은 빛바랜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기이할 만큼 긴 팔을 늘어뜨렸다.
시몬은 그녀가 누군지 깨닫고는 레테를 보았다. 레테는 이미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듯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저건 분명......!'
여신이었다.
시몬도 각종 조각상이나 성물의 형태로 봐왔다.
틀림없는 데바 여신이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세상을 굽어보았다. 시몬은 여태까지 느껴본 적 없는 태양과도 같은 신성을 느꼈다.
'진짜로 신인가?'
인간이 상상하고 찬미하던 신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한 것과도 같은 형태.
하반신은 허공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았고, 그 거대한 상반신만이 섬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있었지만 동공은 나락처럼 새까맣기만 했고, 머리카락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레테!"
레테는 괴로운 듯 주저앉았다. 어깨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내 온몸의 신성이."
그녀가 헛구역질을 하며 목을 붙잡았다.
"말하고 있어요."
"뭘?"
"저건......."
그녀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신을 바라보았다.
"가짜가 아니라고."
여신이 두 팔을 벌리자 어두운 구름 사이로 광명이 내리쬈다. 이 세상에 신성이 흘러넘치고 있다.
"나는 저걸 공격할 수 없어요."
"정신 차려, 레테!"
시몬이 소리쳤다.
"너도 알잖아? 저건 에버 키레가 만든 인위적인 존재일 뿐이야!"
하지만 시몬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만 있었다.
[별의 성녀가 저러는 건 당연하다.]
에버 키레가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은 위대한 여신으로부터 발현된 힘이다. 신성 사용자라면 느낄 수밖에 없지.]
에버 키레가 히죽 웃었다.
[근원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쿠구구구구구구구구!
여신의 거대한 손이 회색 구름을 뚫고 섬으로 다가오는 모습은 극도로 공포스러웠다.
[품으로 오렴. 여신의 아이야.]
손바닥이 벌어지며 레테를 집어삼키려 했다.
이에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휘둘러 참격을 날려 보냈다. 뻗어간 검푸른 참격이 여신의 손바닥에 부딪히는 사이, 시몬은 레테의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손바닥이 빈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것만으로 멀찍이 떨어진 학교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지형이 뒤바뀌었다.
시몬은 고개를 내려 그녀를 보았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신성 슬럼프 증세!'
성녀인 레테마저 저렇게 만들 정도로 프리스트에게는 극도의 상성이었다.
시몬이 바닥을 미끄러뜨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검은 하늘에 묻혀, 구름 사이에 몸을 드러낸 여신의 모습.
너무 거대했다. 피어의 힘만으로는 저렇게 거대한 걸 벨 수 없다.
이런 끝도 없이 거대한 상대야말로 레테의 별을 떨어뜨리는 권능이 제격이겠지만, 그녀의 정신 상태는 위태로워 보였다.
"하아, 하아."
레테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숨결을 내뱉었다.
"레테! 일단 물러나 있어!"
"얕보지 마십쇼. 이 정도쯤은......!"
그녀가 팔을 높게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이내 내리긋듯, 그녀의 손이 하늘에 실선을 그었다.
하늘에 신성이 발동되고, 거대한 별들이 연이어 여신에게 떨어졌다.
신성 슬럼프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말도 안 되는 정신력이었다.
하지만.
츠스스스스스스!
별은 여신에게 닿는 순간, 신성의 입자로 바뀌어 여신의 몸에 빨려 들어갔다. 시몬과 레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감히 신성을 내린 어머니를 신성으로 공격하려 하다니.]
에버 키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광경을 본 레테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무릎을 꿇으렴, 어린 성녀야.]
에버 키레가 팔을 벌렸다.
[네 신에게 경배하는 거야.]
레테의 몸이 귀신 들린 것처럼 천천히 내려갔다.
바로 그 순간.
"레테!"
시몬이 버럭 소리 지르며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강하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얼굴을 그 앞으로 가져다 댔다.
"나를 봐!"
"?!"
레테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붕어빵이 된 얼굴로 시몬을 응시했다.
"고작 저런 걸 봤다고 네 믿음이 흔들리는 거야?"
"으그 느! 쁠르!"
얼굴이 시뻘게진 레테가 다급히 시몬의 팔을 뿌리쳤다.
"네크로맨서인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는 검까! 저건 신성의 근원인......!"
"그럼 이건 뭔데!"
시몬이 한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화아아악!
시몬의 손에 신성이 피어올랐다. 레테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넌 여신의 인정을 받은 사람만이 신성을 쓸 수 있다고 했지! 그럼 네크로맨서인 내가 신성을 쓰는 건 뭔데?"
"......그, 그건."
"생각해 봐. 내가 처음 신성을 썼을 때, 네가 뭐라고 했지?"
비로소 그녀의 떨리는 입술이 열렸다.
"......여신이 당신에게 신성을 준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래, 맞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때 레테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시몬의 등 뒤로, 레테가 날렸던 별이 여신에게 재현되어 그대로 내려오고 있었다.
"위험......!"
"내가 저 신이 가짜라는 걸 증명해 줄게."
시몬이 대검을 들어 올리고는 눈을 감았다.
화아아아아악!
시몬의 몸에서 신성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러면 몸에 두르고 있는 언데드가 위험해지는 게 상식이지만.
오히려 신성이 피어의 본 아머에 깃들고 있었다. 뼈의 갑주가 하얀빛으로 번쩍이며 광택이 일어났다. 망토는 어깨에서부터 백색으로 물들었으며, 불타는 안광도 희게 바뀌었다.
'아!'
레테의 입이 벌어졌다.
다시 한번 목도하는 신성 언데드의 존재.
죽음의 존재인 망자가 생명 에너지인 신성을 담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
처억!
시몬은 다리로 바닥을 강하게 내디뎠다.
레테는 저 여신을 보고 근원을 느꼈다고 했지만, 이 순간 신성을 발현한 시몬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가짜라고.
허리를 비틀며 팔을 길게 내뻗는다. 하얀 망토가 풍압에 거칠게 휘날린다.
'공간째로!'
시몬의 대검이 움직인다. 내려오는 별에 비하면 이쑤시개 같은 굵기지만, 그것에 담긴 신성은 강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베어 넘기는 감각!'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별이.
반으로 갈라졌다.
거대한 별이 좌우로 벌어지며 시몬과 레테를 지나쳐 지면에 커다란 자국을 그리며 뻗어 나가다가 박살 난다.
고오오오오!
레테는 하얀 망토를 휘날리는 시몬의 모습에 그야말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신의 힘을.
여신이 준 힘으로 베었다.
"아직이야."
시몬이 팔을 뻗었다.
언제 시전했는지, 저 멀리 빛나며 날아가고 있는 시몬의 '라 에스크림'이 보였다. 여신이 그것을 받아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카자자자자작!
이번엔 흡수되지 않았다.
시몬이 날린 신성 창은 여신의 손등에 긴 흉터를 그리며 지나갔다. 여신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제 알겠어? 저게 진짜 여신이었다면 내 힘도 걷어갔겠지."
대검을 어깨에 올린 시몬이 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를 봐, 내가 저 여신이 가짜라는 증명이야, 레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