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641화 (641/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41화

[너 뭐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새하얀 안개로 뒤덮인 세상.

가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바로 그 가뭄이 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입고 있는 천 옷은 군데군데 해져 있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시든 갈대를 엮어 만든 모자를 눌러쓰고, 갈색 피부에 다소 통통한 체형. 입술이 크고 두툼했다.

'그렇구나.'

이미 한번 겪어본 상황이었기에 시몬은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성녀의 정수.

조금 더 지칭하자면.

"당신이 '수확의 정수'지?"

그녀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으로 시몬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그녀는 거의 본능적인 행동인 것처럼 가뭄이 든 바닥을 더듬거리다가 시든 싹을 뽑아내 입에 넣었다.

웨액!

그러곤 먹었던 싹을 다시 뱉어내며 괴롭게 울부짖었다.

[맛없어어어어!]

시몬이 '응?' 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여긴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여기도! 저기도!]

그녀가 손가락을 가리킬 때마다 하얀 안개가 걷혀 나가며 메마른 땅이 드러났다. 말라붙은 나무와 죽은 작물들, 오로지 앙상한 동물의 뼈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 들어오다니! 난 망했어! 루키아! 보고 싶어!]

그녀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얼굴을 감쌌다. 시몬이 주춤거리며 물었다.

"루키아가 누군데?"

[원래 내가 선택했던 아이야.]

시몬은 바로 수확의 성녀를 떠올렸다. 그녀의 실명이 루키아였던 모양이다.

[걔 몸에 있었을 땐 밀이 풍족한 세계였어! 비록 고기는 없었지만, 빵도 만들어 먹고 면도 만들어 먹고! 막 그랬는데!]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가 죽었는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거야! 솔직히 밀가루는 하도 먹다 보니 좀 물렸거든? 마침 앞에 또 먹음직스러운 사람이 있어서 그쪽으로 붙었거든? 그런데 그 녀석은 곳간만 휘황찬란하지, 안에 들어가니 아무것도 없었어! 날 속인 거야!]

시몬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그냥 들으면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해석하자면 저 성녀의 정수가 '수확의 성녀'에서 '에버 키레'로 넘어간 상황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텅 빈 곳간에 쥐라도 잡아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걔도 죽었는지 또 밖에 나갈 수 있게 됐어! 그래서 나갔거든? 근데 내가 알던 대륙이 아닌 거야! 막 이상한 세계에 갇혀서 헤매다가, 그나마 이 중에서 곳간이 풍성해 보이는 여자애의 몸에 들어갔어. 그런데!]

그녀의 울음이 절정에 달했다.

[꽝이었던 거야! 꽝! 이번엔 네크로맨서였어! 아아아아! 아무리 배고파도 그렇지! 어떻게 네크로맨서의 곳간을! 여긴 곡물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없어! 난 끝장이야!]

쾅! 쾅!

그녀는 대뜸 동물 뼈에 이마를 연달아 처박았다.

그러다 시몬을 보았다.

[그런데 넌 정체가 뭐야?]

'참 빨리도 물어본다.'

시몬은 쓰게 웃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난 시몬 폴렌티아라고 해. 참고로 네가 들어간 소녀의 이름은 사샤고, 내가 사샤의 손을 잡으니 이곳이 보였어."

[세상에, 너!]

그녀가 펄쩍 뛰었다.

['자격'이 있구나!]

시몬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예전에 사샤의 몸에서 정화의 정수가 들어왔을 때, 그녀가 했던 말과 동일했다.

-네겐 '자격'이 있어! 너 자신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야 시몬 폴렌티아!

이제야 호기심이 생긴 건지, 수확의 성녀는 시몬의 주위에 원을 그리며 휙휙 돌아다녔다. 정신 사나웠지만 시몬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런데 웃기네. 왜 남자애처럼 다니는 거야?]

"......남자애처럼 다니는 게 아니라 실제로 남자인데."

[뭐어어?]

그녀가 폴짝 뛰면서 물러났다.

[거짓말! 남자가 어떻게......!]

"나도 그게 의문이야."

성녀의 정수들은 여성의 몸에만 깃들 수 있다는 게 상식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시몬은 예외였다.

[흠.]

수확의 정수는 미심쩍은 눈으로 시몬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진짜 남자애 맞아? 바지 벗겨봐도 돼?]

"뭔 소리야!"

시몬이 얼굴을 붉히며 바지춤을 붙잡고 물러섰다.

인간을 희롱하는 성녀의 정수라니!

[내면세계에서 엄살은. 근데 신기하긴 하네.]

수확의 정수가 팔짱을 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애인데 '자격'이 있어. 그것도 아주 특별한 '자격'이야. 한번 살펴볼까? ......오호!]

그때 수확의 성녀가 눈을 빛내며 시몬의 등 뒤로 걸어갔다.

[이미 방문한 사람이 있었네?]

시몬이 뒤늦게 자신의 등 뒤에 놓여 있는 물건을 보았다.

그것은 새하얀 왕좌.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외형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수확의 성녀가 그것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이 녀석은 그 녀석이네.]

"응. 정화의 정수."

현재는 레테의 몸에 깃들어 있다. 이제는 정화의 정수가 아니라 '별의 정수'라고 불러야 맞겠지만.

수확의 정수가 불꽃이 세공된 왕좌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팟! 하고 진짜 불꽃이 타올랐다. 그녀가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알았어, 알았어. 까칠하긴, 그만 만지면 되잖아!]

그녀가 왕좌와 대화하듯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힘이 소멸한 게 아니야. 네 몸에 잔존한 채 깃들어 있지.]

"뭐, 그런가 보네."

시몬은 어머니인 안나가 비슷한 일을 겪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던 정화의 정수가 '전(前) 기적의 성녀'였던 안나의 몸에 깃드는 바람에, 잔존한 기적의 정수와 정화의 정수가 충돌해서 위험할 뻔했다.

'그럼 나도 수확의 정수가 몸에 깃들면, 반발작용이 일어나려나.'

시몬이 골치 아픈 듯 끙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어.'

이대로는 에버 키레와 홀로 싸우고 있는 레테가 죽는다.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 그리고 폐허가 된 로크섬이 에버 키레에 의해 진짜 현실이 된다면 그 파급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륙 전체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조금이라도 좋다. 싸울 힘이 필요했다.

"거래를 제안할게. 수확의 정수."

시몬이 손을 내밀었다.

"가짜 신과 에버 키레를 쓰러트리기 위해, 내게 힘을 빌려줘."

시몬의 손을 본 그녀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무리 네가 '자격'이 있다지만...... 남자애 몸에 깃드는 건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데.]

"이미 다른 정수가 내 몸에 들어온 선례도 있고, 못 할 게 뭐 있어?"

[으으, 그렇긴 한데. 기분이 쫌, 아니. 많이 이상하다고!]

"그럼 거기서 계속 그렇게 썩은 풀뿌리나 뜯어 먹으면서 살 거야?"

시몬의 지적이 정답이었을까, 그녀는 고뇌에 빠진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어쩔 수 없네. 하지만 거래라고 했지?]

시몬이 내민 손을 붙잡은 수확의 성녀가,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정화의 정수가 만들었던 왕좌의 옆에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 자리에 앉는 시늉을 했다.

차악.

그러자 그 자리에 새로운 왕좌가 나타났다.

풀과 나무, 곡식이 세공된 하얀 왕좌가.

[내게도 조건이 있어. 들어줄래?]

시몬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그게 거래니까."

* * *

같은 시각, 로크섬.

발케제 경기장 밖.

폐막식을 앞두고, 모든 학과생들이 오전 경기를 뛰고 있는 가운데.

"......."

카쟌은 복잡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한번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시몬으로부터 정기보고가 오질 않고 있다.'

시몬도 현재 발케제 경기장에서 경기를 뛰고 있다.

그래도 시몬이 요원들 대신 성녀와 함께 다니며 호위하는 입장이니, 시몬은 경기 중이라도 보고는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보고가 들어오질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겼나?'

카쟌은 발케제 경기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통신 수정구를 들어 올렸다.

"여기는 K-1, 발케제 경기장에 있는 성녀의 상태를 확인 바람."

칙!

-여기는 HO.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통신 수정구에서 네크로맨서 요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기장에 있는 성녀? 수확의 성녀는 동굴에 있잖아. 여전히 미동도 없는데?

"수확의 성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번에 들어온......."

그 순간, 카쟌의 말이 우뚝 멈췄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번에 들어온 누구라고?

-하하! 갑자기 뭔 소리야. 키젠에 성녀가 둘이나 있단 뜻이야? 그것참 비상사태네.

"......."

현재 로크섬에 넘어온 성녀는 하나뿐이다.

수확의 성녀가 에버 키레에게 당했고, 알레이스터 팀은 단독으로 수색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시몬에게 연락하려고 했다.'

그가 손목을 들어 올렸다.

'시몬이 성녀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치직!

직!

그의 머릿속에서 순간, 잿빛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묘한 기시감.

카쟌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거칠게 붙잡았다.

'두 번째 성녀? 누구지?'

지직!

직!

카쟌은 집요하게 생각을 물고 늘어졌고, 이내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끊겨 들렸다.

-무슨 일이냐, 시몬. 왜 너 혼자 있지?

-레테가......!

시몬과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전에는 없는 기억이었다. 머리가 떠올리면 안 되는 기억을 거부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방향을 돌리려고 했지만, 카쟌은 초월적인 집중력으로 생각에 전념했다.

-아니, 성녀님이 사라졌어요! 이 쪽지를......!

지직!

직!

-이미 본인의 선배가 당했는데도 제멋대로군.

회상을 마친 카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레테가 누구지? 만약 그 선배가 수확의 성녀를 말하는 거라면, 정말로 그녀의 대타가 이곳에 왔었나?'

그냥 쓸데없는 망상일지도 모른다. 피곤해서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던 꿈결의 장면이라도 떠올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쫓고 있는 적은 '에버 키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이능'에 대해 떠올리는 순간.

'!!'

전신에 소름이 쫘아악 돋았다.

"제기랄! 벌써 그 여자에게 당했나!"

에버 키레가 '지우고 왜곡한 기억'이 존재한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카쟌은 즉시 칠흑을 밟고 시몬이 있는 발케제 경기장으로 내달렸다.

"여기는 K-1! 지금 당장 필요한 자료가 있다!"

-여기는 HO, 말하도록.

핵심은 시몬이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들을 붙잡아 연결하자면, 로크섬에 들어온 제2의 성녀가 존재했고, 그녀의 이름은 레테다.

핵심 보호 대상인 그녀는 시몬과 함께 다녔고, 같이 다니는 시몬이 이쪽에 정기보고를 해야 한다. 그런데 정기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다.

그런 시몬이 마지막에 머무른 곳은-

"16번째 경기장, 발케제 경기장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다!"

-오케이. 그거 하나? 알레이스터 님 권한이면 금방이야. 10분.

카쟌은 그사이 빠르게 달려 발케제 경기장에 도착했다.

혹시나 에버 키레가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니 잔뜩 긴장한 채 들어갔지만, 경기장의 모습은 평범했다.

관중들이 관중석에서 환호하고 있었고, 학생들은 열심히 경기를 뛰고 있다. 그중에서는 시몬의 모습도 보인다.

'단순히 경기가 치열하니 연락을 못 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카쟌이 코를 킁킁댔다.

'미약하지만 피냄새. 그리고.'

그의 몸에 난 잔털이 주르륵 섰다. 곧게 선 게 아니라 베베 꼬이듯 휘어졌는데, 이런 반응은 하나뿐이다.

'신성.'

에버 키레가 이 경기장에 무슨 짓을 벌인 게 틀림없다.

카쟌은 성큼성큼 관중석에서 경기장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는 HO. 자료는 찾았는데 말야, 확실히 뭔가 이상하네.

"말해라."

-행정명령이 두 가지 있어. 발케제 경기장에 대한 반려명령, 그리고 발케제 경기장의 사용허가명령.

"반려명령과 허가명령이 동시에 존재할 리가 있나."

-실무자들한테 물으니까 다들 고개만 갸웃하던데? 우리도 왜 저런 자료가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고. 심지어 명령권자들도 자신들이 왜 반려명령을 내렸는지 기억을 못 해. 그러니 그냥 흐지부지된 거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상하긴 한데, 뭐라도 알아냈어?

카쟌이 제 관자놀이를 툭툭 짚었다.

"머리가 있다면 생각해라. 우리가 상대하는 적이 누구지?"

-이봐, 대체 뭔 소릴 하는지 모르겠는...... 아, 앗! 알레이스터 님!

달칵!

통신 수정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에버 키레가 움직였군. 발케제 경기장을 숨기려 한 건 그곳이 목표지역이기 때문이고.

알레이스터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보고는 옆에서 듣고 있었네. 무엇보다 제2의 성녀가 있었다니, 흥미롭군.

카쟌이 픽 웃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쁩니다. 그런데 믿으십니까?"

-믿을 수밖에.

통신 수정구에서 알레이스터의 목소리에 노기가 흘러나왔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대적인 수사론에 입각해 그녀를 추격해 왔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네. 그렇다면 발상을 전환해야 해. 비상식적이고 미친 소리를 진실로 받아들여야겠지.

카쟌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훌륭합니다."

-현장에 와 있나?

"예."

카쟌은 발케제 경기장의 상황을 디테일하게 보고했고, 알레이스터는 듣자마자 계획을 수립했다.

-근처에 관중이 있겠지?

카쟌이 통신 수정구를 든 채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의 경기를 보며 열렬히 환호하고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예. 묘한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접촉해 보게.

카쟌은 관중의 어깨를 짚었다.

터업!

"만져집니다. 그냥 실체 없는 환상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자극을 줘서 반응을 보게.

이에 카쟌은 손에 강한 힘을 주었다.

꾸우우욱-

어깨가 탈골될 정도로 강한 힘이었으나, 관중은 아파하는 기색도 없이 웃으며 여전히 경기에 환호하고 있었다.

"......제기랄."

-안 봐도 알 것 같군. 에버 키레가 벌인 사태 중에서 케이스 6번과 동일해. 모든 분석은 완료됐네. 좌표를 이야기하게.

카쟌이 통신으로 자신의 좌표를 말하기 무섭게.

우우웅!

허공에 매끄러운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가방이 하나 툭 떨어졌다. 알레이스터의 능력 중 하나였다.

그 안에는 스위치가 있는 손잡이가 들어 있었다.

-환상 결계를 가르는 아티팩트일세.

스릉!

카쟌이 스위치를 누르자, 마나로 이루어진 칼날이 튀어나왔다.

-신성을 느낄 수 있나?

"예, 프리스트가 일부러 숨기지만 않는다면."

카쟌은 소매를 걷고 팔을 드러냈다. 팔들의 털이 쭈뼛 서더니, 베베 꼬이기 시작했다.

-훌륭하군. 자네가 할 일을 알려주겠네. 우리도 즉시 출발하겠네.

알레이스터의 지시를 들은 카쟌은 즉각 경기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럽게 경기장에 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은 여전히 카쟌을 본체만체하고 있었다.

'저기다. 가장 신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

카쟌이 양팔을 들어 올리며 손톱을 세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칠흑을 끌어들인 그가 경기장에서 물이 쏟아지는 동상을 향해 휘둘렀다.

<카쟌 오리지널 - 팽>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악!

X자로 교차한 칼날이 허공을 가르자, 경기장의 풍경들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갈라진 허공의 틈으로.

부웅!

아티팩트를 던졌다. 아티팩트의 칼날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그 틈으로 파고들었고.

쿠쿠쿠쿠쿠쿵!

동상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카쟌은 목도했다.

'이건......!'

왜곡의 장막이 걷히고, 단 한 명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경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 난리가 난 흔적이 보인다.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폭발한 관중석과 바닥의 전흔까지.

"에버 키레가 시몬과 이곳의 사람들을 데려갔군."

키이이이이이이잉!

키이이이이잉!

마침 경기장 바닥 곳곳에 칠흑 마법진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카쟌은 조금 뒤로 물러나 기다렸고, 이내 마법진이 완성되는 것과 동시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뛰쳐나왔다.

"수고했네, 카쟌."

알레이스터와 그의 부하들이었다. 알레이스터가 시뻘게진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모습은 상당히 낯설었다.

"어떻게 됐나."

"한발 늦었습니다. 이미 에버 키레가 시몬과 제2의 성녀, 그리고 관중들을 데리고 다른 분기점으로 넘어갔습니다."

"세상에 이런 이능이 어디 있나 싶군."

알레이스터는 짜증스럽게 걸어 다니면서도, 사방에 칠흑 마법진을 퍼뜨렸다.

홧김에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칠흑 마법진의 색깔이 물드는 것만 보고, 알레이스터는 에버 키레가 이 경기장에서 사용한 위치와 수식의 종류까지 세밀하게 구분해냈다.

"전례 없는 적이야.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네. 그나마 지금이 유일한 반격의 기회일지도 모르지."

알레이스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떻게든 '저쪽'에 도움을 줘야 하는...... 카쟌, 어디 가나?"

카쟌은 코를 킁킁거리며 자신의 기술로 무너뜨린 발케제 동상의 잔해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잔해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무적의 이능 같아 보이지만."

그가 들어 올린 건 신성을 뿜어내는 아티팩트였다.

카쟌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틀림없이 약점은 있을 겁니다."

* * *

같은 시각.

또 하나의 로크섬은 별들의 천국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섬을 놓고, 동쪽과 서쪽에서 쏟아지는 별들이 서로 부딪히고 폭발하기를 반복했다.

"윽!"

두 팔을 쭉 뻗은 채 싸우고 있던 레테가 힘겨운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그러다 옆을 보며 소리쳤다.

"시몬! 언제까지 자고 있을 검까! 빨리 좀 일어...... 아!"

콰콰콰콰콰콰콰!

여신이 쏘아 보낸 별 하나가 레테의 옆에 떨어지며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후폭풍에 치솟은 그녀가 정신없이 바닥을 굴렀다.

하아.

흙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며, 레테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별을 부를 최소한의 신성도 다 떨어진 상황.

무엇보다 이쪽은 여신을 직접 공격할 수 없다.

그녀가 덜덜 떨리는 팔을 앞세웠다.

이런 타지에서, 그것도 네크로맨서들의 심장부에서 죽게 될 줄이야.

아니, 약한 소리 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더 할 수 있......!"

화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런 그녀의 의지에 호응하듯, 시몬의 몸에서 눈부신 빛의 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늦었슴까! 시......."

그녀의 눈이 커졌다.

"......몬?"

시몬의 몸이 변화했다.

머리카락은 새하얀 백발로 변모했고, 눈동자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이내 시몬의 교복이 새하얀 옷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저것은 성녀의 상징인 성의(聖儀).

바로 그 성의가 네크로맨서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레테는 눈을 치켜떴다.

'......꿈이라도 꾸고 있나?'

스윽.

슥.

시몬이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지면을 디뎠다.

그것만으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뿌리로 지면의 물을 빨아들이는 나무처럼 맨발이 지면의 신성을 빨아들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파앙-!

로크섬 전역에 자라난 밀들이 거세게 흔들린다. 신성의 밀알들이 반딧불이처럼 떠오르더니, 이내 시몬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웅!

시몬의 몸이 무수한 광채로 휩싸였다.

[무슨 속셈이냐!]

에버 키레의 외침과 함께, 가짜 여신이 별들을 시몬에게 쏟아냈다.

시몬은 피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쿠우우우우우웅!

그러자 시몬의 정면에 거대한 신성의 보호벽이 펼쳐졌다. 벽에 부딪힌 별들이 바스러지거나 튕겨 나갔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레테가 경악하며 소리 질렀다. 저건 틀림없는 수확의 성녀의 상징인 '대지의 방벽'이었다.

남자가, 심지어 네크로맨서가 성녀의 힘을 쓰다니!

차라리 에버 키레의 왜곡된 세계를 현실이라고 믿는 게 더 눈앞의 현실보다는 더 현실적이리라.

스륵.

시몬이 팔을 뒤로 뻗었다. 그의 손아귀에 신성이 일렁여 손잡이로 변했다. 그것은 옆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더니, 이내 그 끝에 거대한 날이 달렸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로 이루어진 이질. 이 순백의 날은 시몬이 정수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권능의 구현이었다.

낫은 그 크기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까지 뚫고 들어가며 끝없이 커지고 있었다.

"간다."

온 신성을 끌어모은 시몬이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바닥을 걷어차는 순간, 로크섬의 지반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시몬의 몸이 사라졌다.

[......!]

에버 키레가 정신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가짜 여신도 시몬의 위치를 찾으러 눈을 굴렸으나.

"꼼짝 마."

스릉.

여신의 동작이 굳어졌다.

하얀 불꽃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년은, 어느새 여신의 어깨에 올라타 있었다.

한 손으로 낫의 손잡이를 쥐었고, 낫의 칼날은 그녀의 턱 아래에 걸려 있었다.

마치 목을 겨누고 협박하는 것처럼.

[감히!]

에버 키레가 격노했다.

[일개 인간이 신의 목을 베려는 것이냐! 그것도 신성으로!]

여신의 팔이 시몬을 잡기 위해 들어 올려졌다.

"꼼짝 말라니까."

시몬은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당겼다.

<시몬 오리지널 - 종명(終命)>

그것은 고요했다.

백의 낫은 아무런 소리도, 흔적도 없이 당겨졌고.

스륵.

낫의 칼날 위에 얹힌 여신의 목이 베어져.

바닷속에 빠질 때까지.

세상이 정지한 듯,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안 돼애애애애애애애!]

소년이.

살아 있는 신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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