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44화
암흑연합의 지배자, 네프티스 아크볼드.
힘이 빠져 주저앉아 있던 레테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다소 멍해 있는 상태였다. 그때 네프티스의 시선이 레테 쪽으로 향했다.
우웅!
레테가 반사적으로 신성을 일으켰다. 네프티스의 눈매가 묘하게 가늘어지는 걸 본 시몬이 얼른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프티스 님!"
"?"
"레테, 아니 성녀님은......!"
"나도 알아. 이번 일에 큰 도움을 줬지."
네프티스에게서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기껏 에버 키레를 저지해서 전쟁을 막았는데, 다시 성녀랑 싸우면 말짱 도루묵이겠지? 어차피 죽여도 새로운 성녀가 출현할 테고."
"글쎄, 지금 여기서 날 안 죽이면 후회하게 될 건데요."
레테가 반항기 다분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전쟁이 벌어지면, 내가 당신의 목을 치러 앞장설 검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몬이 식겁한 표정을 지었지만, 네프티스는 푸훕 하고 귀엽다는 듯 웃어넘겼다.
"아직 한참 일러. 꼬마야~"
"누가 누구더라 꼬마라고 하는 검까."
두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까마귀 요원 알레이스터가 다가와 네프티스에게 귓속말로 보고했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폐막식은 계획대로 진행해."
"?!"
시몬은 당황했다. 이런 난리가 터진 와중에 폐막식을 강행하겠다고?
네프티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크게 다친 곳이 없다면, 너희 두 사람도 참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네프티스가 손을 착 들어 올렸다.
"안뇽!"
그 한마디와 함께, 어느새 시몬과 레테의 아래에 펼쳐져 있던 텔레포트 마법진이 작동했다.
* * *
암흑제의 모든 행사가 끝났다.
이변은 없었다. 소환학과는 1위인 저주학과를 뒤엎지 못하고 2위에 머물렀지만, 꼴등을 밥 먹듯이 하던 과거의 전적을 생각해 본다면 대단한 약진이었다.
그리고 에버 키레와의 전투 직전, 발케제 경기장에서의 경기는 그 자체가 무효처리됐다. 참가한 학생들에게는 피해가 안 가도록 적당한 수행평가 점수를 부여하기로 했다. 이제 곧 폐막식이니 빠르게 수습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문제의 에버 키레 사태.
사람들은 아직 이번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경기를 뛰던 사람들과 관중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쓰러졌고, 교내 병동에 실려 갔다는 정도의 소문만 오갈 뿐이다.
피해자들도 병동에서 무사히 정신을 차렸지만, 정신을 잃은 직후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몬과 레테 또한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병동에 들어와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지쳤을 뿐, 심각한 부상은 없었다. 시몬은 병동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키젠에서는 이번 에버 키레 사태를 묻을 생각인 걸까?'
물론 사건 자체를 묻기에는 절호의 기회다.
피해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자세한 상황을 아는 것도 알레이스터와 카쟌 등 네프티스의 측근들뿐이다.
5년에 한 번뿐인 암흑제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시끄러운 에버 키레 사태는 수면에 가라앉도록 두는 게 계산기를 두들겨 본 어른들의 결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맞을까. 시몬은 여러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달칵!
"상태는 어떤가요? 학생."
병동 의사가 시몬의 상태를 보기 위해 병실에 들렀다.
그 또한 네프티스 측 사람이었기에 상황을 알고 있었다. 시몬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똑바로 누웠다.
"전 괜찮아요! 성녀님은요?"
"같이 오신 성녀님도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 다만 칠흑을 활용하는 병동의 치료를 거절하고 있어서......."
"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병동 의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니까요."
* * *
<그레이트 힐링>
우우우웅!
레테의 몸의 상처가 점점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레테는 묵묵히 통증을 견디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로군요."
그녀를 치료해 주고 있는 사람은 신선 같은 백의를 입고,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배신자 파라한."
"......."
"전 에프넬의 주교, 현재는 키젠에서 네크로맨서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슴다."
파라한은 묵묵히 레테의 치료를 마치고는 손을 내렸다. 이내 어깨와 가슴을 짚고 성호를 그렸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여신의 가장 가까운 딸을 뵙사옵니다."
"......."
레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신을 배신하고 암흑연합에 온 주제에, 아직도 성호를 긋고, 성녀에게 예를 차리시는 건가요."
"여신을 배신한 게 아니라 에프넬을 배신한 것이니까요. 매일매일 기도를 올리고 있지요."
파라한은 데바 여신의 존재는 믿지만, 에프넬이 신의 뜻을 왜곡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사리사욕을 탐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성녀께서는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네. 당신이 말한 그 이야기-"
레테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형적인 이단의 논리 아님까."
레테는 바로 최근에도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단다. 눈을 뜨렴. 네 눈을 가리고 있는 에프넬의 가르침은 이제 잊고 내 계시를 섬기렴.
바로 에버 키레.
이제 그 광신도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다.
"에버 키레는 자신이 신과 동등하다는 망상증을 앓고 있었고, 망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이능도 가지고 있었슴다. 그 힘을 기반으로 키젠을 궁지로 몰아놓고 가짜신까지 만들어냈죠."
"......."
"정도의 차이가 다를 뿐이지. 당신과 에버 키레의 결은 같아요."
그녀가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파라한을 보았다.
"에프넬 체제를 반대한다는 핑계로, 악마의 힘을 쓰는 자들에게 기어들어 간 당신도 충분히 끔찍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레테는 꽤나 센 수위로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노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긴 수염을 쓰다듬을 뿐.
무수한 고뇌와 고찰, 그리고 긴 세월을 거쳐 마치 해탈이라도 한 듯한 눈동자. 마치 바다처럼 깊은 눈이라고 레테는 생각했다.
"뭐라 변명이라도 해보시죠."
오히려 레테가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선 소인은, 그 광신도처럼 여신을 부정하지 않고 자신을 여신과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파라한이 입을 열었다.
"또한 여신께서는 네크로맨서를 물리쳐야 할 악이라고 규정한 적이 없습니다."
레테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림까! 경전에 분명히 나와 있는 내용인데요!"
"여신의 말씀을 받아적은 건 인간이고, 기득권자들에게 유리한 해석과 수정을 거듭하여 전해 내려온 것이 경전이지요. 교황께서 가진 원문에 따르면, 데바께서는 악마를 언급한 적이 있으나 네크로맨서가 적이며 악마 숭배자라고 규정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백번 양보하여 칠흑이 악마의 힘이라고 하더라도, 네크로맨서들은 악마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숭배하는 건-"
파라한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자기 자신뿐입니다."
"......!"
"그들은 그저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끝없이 강해지고 발전하기 위해 효율적인 수단을 채택할 뿐이지요. 칠흑이 악마의 힘이고, 악마의 힘을 쓰는 인간들은 악마를 숭배한다. 이 모든 게 에프넬의 주장일뿐, 우리의 진정한 적은 따로 있습니다."
레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헛소리."
레테는 생각 끝에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파라한은 빙긋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소인의 이야기를 깊고 진지하게 들어주고 프리스트는 성녀님이 처음이십니다. 보통은 미친 노인 취급하며 들으려고도 하지 않지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슴다."
"물으시지요."
"후회하지 않나요?"
파라한은 대답 대신 인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홀가분하지만, 따뜻한 미소.
그 미소로 대답은 충분했다.
* * *
오후에는 암흑제 폐막식이 열렸다.
폐막식이 시작되기에 앞서, 16번째 경기장과 기억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나왔다. 하지만 막상 화려한 폐막식이 시작되는 순간, 모든 이목이 행사에 집중됐다.
그리고 네프티스가 제안했던 것처럼, 시몬과 레테도 참여했다.
시몬은 학생회장이기에 참여해야 했고, 레테도 바깥 구경이나 할 겸 나왔다. 알레이스터 측에서 널찍한 VIP석을 제공해 주었기에 편하게 앉아서 구경할 수 있었다.
이내 무수히 많은 관중들 앞에서, 부회장 제인과 암흑연합의 원로들이 연설했다. 각 학생들의 중요한 활약상도 마나 스크린에 펼쳐졌다.
그리고 중요한 학생 MVP 시상식.
이번 암흑제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학생에게 주는 시상식이었다.
3학년 MVP는 여지없이 전체 2위, 맹독학과 총대표인 발락이 받았다.
그리고 2학년 MVP는.
"2학년 학생회장, 시몬 폴렌티아 학생입니다!"
와아아아아아!
열렬한 환호성 속에서, 시몬도 커다란 트로피를 들고 발락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그의 마스크에서 자꾸만 독연기가 나오는 바람에 숨을 참느라 힘들었다.
'아.'
VIP석에 레테의 모습이 보인다.
로브를 눌러 썼지만 그녀인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도 손뼉을 치며 기뻐해 주었고, 시몬도 미소 지었다.
이내 시상이 끝나고.
"흠흠."
폐막식 사회를 맡은 세이위르가 목을 풀고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젠 총장 네프티스 님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 학생 여러분과 내빈분들께서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길 바랍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박- 차박-
묵직한 정적 속에서 낮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네프티스가 등장했다.
개막식에도 등장하지 않은 그녀가 폐막식에서는 직접 등장했다.
'네프티스 님.'
시몬은 무대 뒤편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송 하수인이 헐레벌떡 달려와 나무 상자를 단상 밑에 깔아주었다. 그 위에 총총하고 올라간 네프티스가 목을 풀고는 말했다.
"응, 다들 앉아."
"자리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프티스의 말이 떨어진 뒤에야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확성 수정구를 잡고 입을 열었다.
"다들 마지막까지 암흑제의 자리를 빛내줘서 고마워.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암흑연합의 미래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야."
중대발표 선언.
좌중이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뒤덮였다.
"우선 이런저런 말이 많이 나왔겠지? 16번째 경기장. 그리고 이번에 기억을 잃은 관람객들과 학생들. 결론만 말하자면."
그녀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키젠은 신성연방에서 탈영한 광신도의 공격을 받았어."
웅성 웅성 웅성!
광신도.
현재 연방에서 가장 민감한 화제이자 위협이었기에, 관중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이번에 침입한 광신도의 이름은 에버 키레. 현실을 왜곡해서 없던 일을 있던 것으로 만드는, 모두를 속여 넘길 수 있는 아주 위협적인 이능 사용자야. 당시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은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로크섬을 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어. 그리고 그 수면 아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녀의 푸른 눈이 관중들을 쭉 훑었다.
"우리는 새로운 군단장의 존재를 발견했지."
"!!"
장내가 파도처럼 술렁였다. 광신도에 이어서 느닷없이 새로운 군단장이라니! 이야기는 점점 예상할 수 없는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특히 암흑제에 참가한 네크로맨서들은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불가능하지 않나? 새로운 군단장이라니."
"여섯 자리 모두 차 있어. 에이션트 언데드는 몰라도, 갑자기 새로운 관리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훗.
네프티스가 슬며시 웃으며 확성 수정구를 입에 가져다 댔다.
"우리는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제7군단의 관리자이자, 과거 '공포의 주인'이라고 불렸던 에이션트 언데드 '피어'의 존재를 확인했어."
"!!"
"그래."
네프티스가 목에 힘을 주었다.
"배신의 군단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