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47화
"아무 관계도 아님다."
레테가 시큰둥하게 말하며 포도송이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호호호! 다들 그렇게 말하지."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시몬을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좋아해서 떠보는 거 아닌가?"
에슈가 담백하게 웃었다.
"우린 진짜 친구야! 아, 물론 저쪽에서 굳이 내가 좋다고 막 난리 치면서 고백하면 생각해 볼 여지는 있겠지만."
"있겠지만?"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학과 내 경쟁자들이 너무 막강해. 친구들이랑 얼굴 붉히고 싶지도 않고, 쟁취할 자신도 없고."
레테가 눈을 감고 와인을 한 잔 마셨다.
"학과 내 경쟁자라면, 그 로레인인가, 세르네인가 하는 사람들?"
"어, 벌써 아나 보네?"
"벌써 만났슴다. 시몬이 소개해 줬죠."
마침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르네가 시몬에게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레테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런 질문은 어때?"
마찬가지로 그 모습을 본 에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외부인들은 이제 곧 섬에서 나가야 하잖아."
"네."
"어릴 때부터 자라난 소꿉친구를 여기 두고 가기엔 신경 쓰인다, 아니다!"
"......."
레테가 포도 한 알을 떼어내어 입에 넣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작게 쉬더니, 내가 져준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신경은 쓰인다고 해두죠."
"역시이!"
에슈가 눈을 빛내며 잔을 들어 올렸다. 레테도 잔을 들어 맞부딪혔다.
"막 고향에서 올라와서 잘 모르지? 내가 이번 학기 동안 겪은 시몬 이야기해 줄까?"
형식적으로 말을 주고받던 레테의 눈에 처음으로 생기가 들어왔다.
"그거 재밌겠는데요! 뭐 흑역사 같은 것도 있슴까?"
"그럼!"
* * *
모처럼의 파티였지만, 시몬은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각기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고 인사하고 다니니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학생회장 힘들다.'
일부러 학생회장을 보러 소환학과 파티까지 방문한 자들도 있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잠깐 여유가 생긴 사이 지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데.
"헤이! 마이 베프!"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다짜고짜 목에 팔을 두르는 게 느껴졌다.
"아, 딕!"
"하하, 괜찮냐? 얼굴이 죽상이네."
딕이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음료를 내밀었다. 시몬은 잔을 잡은 다음 단번에 들이켰다.
"살 것 같다. 고마워."
"별말씀을."
"시몬 형!"
"우리도 왔어요!"
저 멀리서 빌, 알 헤이워드 동생들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들도 각자 여자 한 명씩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그 피는 어디 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런데 딕,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맹독학과 파티는?"
"분위기 축축 처지는 게 재미없어서 얼른 여기로 넘어왔지."
딕이 낄낄 웃으며 근처 의자를 끌어다가 대강 걸터앉았다.
"마지막 날에 다들 최소한 2위는 기대했는데, 결국 4위로 끝나는 바람에 발락 선배를 비롯해서 3학년들 분위기가 최악이야. 파티인데 다들 눈알만 굴리면서 3학년 눈치만 보고 있다니까."
"알 만하네."
"아, 그런 것보다!"
그때 딕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메이린이랑 카미한테 이야기는 들었다! 고향에서 소꿉친구가 왔다며? 이름이 레나?"
"맞아."
"딱 보니 쟤구만?"
딕이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있는 잿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가리켰다.
언제 친해진 건지, 레테는 옆자리의 에슈와 와인잔을 부딪히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임마, 너 기억 안 나냐? 저번에 '엘리자베스 웨퍼'도 레스힐 고향에서 온 친구라며?"
"아, 그......!"
어쩐지 찜찜하더니 이미 한번 써먹은 설정이었다.
엘리자베스 웨퍼란 이름도 에르제베트가 변신한 키젠 여학생의 가명이었다.
"엘리자베스에 이어 또 한 명의 미모의 소꿉친구라! 이야, 레스힐은 무슨 미남 미녀들만 있는 동넨가 봐? 내가 방학 때 무조건 가본다, 진짜!"
"진정해. 딕."
"빨리 불어!"
딕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엘리자베스 웨퍼 어딨냐고! 2학년 명단에도 없고, 혹시나 1학년 경쟁에 밀려서 퇴학당했나 싶어서 작년 입학자 명단 쭉 훑어봤는데 거기에도 없어! E반 출신 얘들한테 물어봤는데 분홍색 머리 여자는 듣도 보도 못했다던데!"
시몬의 눈이 팽팽 돌아갔다.
여기서 딕에게 덜미를 잡힐 줄이야.
"소개해 줄 거야 말 거야?"
딕이 사악한 흉계를 꾸미는 악당처럼 웃으며 물었다.
시몬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복잡한 사정이 좀 있어!"
"네, 네. 그러시겠죠. 또 카쟌과 얽힌 문제겠지, 이번 암흑제 때도 붙어 다니던데."
그렇게 이해해 준다면 다행이었다.
같은 룸메이트였던 딕은 카쟌이 비밀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음, 소개해 주지 못하는 이유는......."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너를...... 그......."
우뚝.
딕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더 말하지 말라는 듯 비운의 남자주인공처럼 고개를 휘저으며 반대쪽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크흡, 짧은 시간이지만 사랑했다!"
"......."
시몬이 아무 말 없이 쓰게 웃으며 와인잔을 딕에게 건넸다. 딕이 와인을 쭈우욱 들이켜더니 벌게진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캬하."
딕이 물끄러미 레테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탁이 있다 시몬!"
"안 될 것 같지만 말해봐."
그가 고개를 척 들었다.
"날 레스힐에 데려다줘! 미남과 미녀의 도시! 내 진정한 사랑은 그곳에 있는 게 틀림없어!"
시몬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딕을 어깨동무하듯 웃차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옆을 보며 외쳤다.
"빌! 알! 너희 형 많이 취했어!"
"아, 진짜! 많이 마시지 말라니까!"
"왜 이 학교는 학생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거야?"
빌과 알이 툴툴대며 다가왔고, 딕이 나 안 취했다며 난동을 부렸다.
"내가 진짜 취한 걸로 보여? 어?"
"형!"
"아니 놔봐! 진짜, 진짜 취한 것 같냐고!"
"취했다니까."
"니가! 어? 니가 나를 취했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뭔데?"
시몬은 말없이 손짓했다. 딕의 몸에 본 아머가 입혀지더니 빠르게 기숙사로 날아올랐다.
"안 취했어어!"
사랑이 깨진 소년의 발버둥은 가슴 아팠다.
* * *
"어, 그러니까."
레테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입학식 당일에 납치당한 신입생을 구해서 학교에 보내고, 신고식으로 괴롭히던 3학년들을 참교육하고, 다른 학교와의 교류전은 전부 완승에, 수행평가 도중에 프로 암살자를 쓰러트리고, 듀라한이란 언데드 하나로 1만 마리의 몬스터를 베었다고요?"
"응! 응!"
레테가 어쩐지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 턱을 괴었다.
"사실 당신, 시몬 찬미론자 아닙니까? 흑역사는커녕 전부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잖슴까."
"말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
에슈가 머쓱하게 웃었다.
"근데 전부 사실이야! 이것도 2학년 동안에만 해낸 일이지. 1학년 시절에도 대단했다는데 난 그때의 시몬은 잘 몰라서."
"......."
레테가 턱을 괴었다.
어디서도 시몬은 인기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인기가 많을 만했다.
그는 학교에서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 참."
레테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미지 하난 잘 만들었네. 다들 시몬의 실체를 알면 놀랄 검다."
"실체? 그 실체가 뭔데?"
에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궁금함까?"
"궁금해!"
"사실 시몬은......."
거기까지 말한 레테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머릿속에 시몬의 상냥한 미소들이 수십까지 떠올랐다.
"시몬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앞을 가로막은 일, 손을 잡아준 일, 좁은 짐마차 안에서 마주 본 일,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아무 말도 없이 곁에 앉아 준 일, 신성의 낫을 휘두른 일, 성녀의 힘을 일으킨 일, 가짜 여신을 가로막으며 당당하게 외친 일.
-내가 저 여신이 가짜라는 증명이야, 레테.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기던 레테가, 이내 입가에 포기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나쁜 거 쥐어 짜내려고 했는데, 안 떠오르네요."
"그치 그치?"
에슈가 공감한다는 듯 웃었다.
"그냥 그런 사람인가 봐."
그때 손님들과 인사를 마치고 술에 취한 딕도 데려다준 시몬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에슈가 조금 남은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우리 친구지?"
친구.
성녀가 네크로맨서 친구를 사귄다니, 아이러니했다.
어차피 인식 장애 아티팩트도 착용해서, 며칠 지나면 저쪽은 얼굴이 잘 기억도 나지 않을 테니 그대로 외면하고 가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단 현재에 더 충실하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레테도 웃으며 남은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짠!
그녀들이 잔을 맞부딪히고는 마지막 한 모금을 비웠다.
레테가 쿡쿡 웃었다.
"당신, 꼭 제 룸메이트를 닮았습니다."
"룸메이트?"
에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히히 웃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분명 교양과 품격을 갖춘 미모의 아가씨겠지?"
레테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똑 닮았네요."
"레테."
시몬이 다가왔다. 에슈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시몬과 눈인사한 후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테가 말했다.
"미안해,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일이 바빠서."
"괜찮슴다."
어느새 기온이 뚝 내려가서 날씨가 추워졌기에, 두 사람은 로브를 챙기러 잠시 시몬의 기숙사 방에 들렀다가 가기로 했다.
시몬은 계단으로 올라왔고, 레테는 익숙하게 벽을 타고 올라와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럼, 가자."
시몬이 교복 겉에 로브를 걸치며 말했다.
그런데.
-삐익! 삐이익!
이상한 새가 침대 위에 들어와 있었다.
"뭐지?"
"아까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온 것 같던데요."
그녀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방의 거울을 보고 있었다.
새는 총총 걸어와 시몬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리에 뭔가 편지 같은 게 매달려 있었다.
"전서구의 일종인가 본데."
시몬이 새의 다리에 묶여 있는 편지를 풀었다. 그러고는 겉면 봉투의 이름을 살폈다.
"누가 보낸 거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고 있던 레테가 뒤늦게 시몬의 편지를 보고는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설마......!'
그녀의 동공이 급격히 흔들렸다. 시몬이 편지를 뜯으려는 그때.
"보지 마!!"
그녀가 식겁하며 뛰어와 시몬의 홱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왜 그래?"
"그거 제가 보낸 편지예요!"
레테가 봉투를 보였다.
"봐요! 맞죠?"
그러고는 황급히 제품에 끌어안았다. 시몬이 어안이 벙벙해서 말했다.
"그렇긴 한데. 나한테 보낸 거니까 내가 읽어봐도 되는 거 아냐?"
"안 돼!"
시뻘게진 얼굴의 그녀가 빽 소리 질렀다.
"내가 직접 와서 할 이야기도 다 했고! 굳이 볼 필요가 뭐가 있슴까! 빠, 빨리 가죠!"
"......그래, 알겠어."
시몬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레테가 속으로 안심하며 한숨을 쉬는 사이, 시몬이 몰래 손끝을 움직였다.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편지가 쏙 빠져나갔다.
"!"
시몬이 클라우드로 편지를 붙잡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라고 말할 줄 알았어?"
"야!!"
레테가 버럭 소리 지르며 달려들었다. 시몬이 얼른 편지를 머리 위로 올렸다.
"어차피 나 보라고 쓴 거잖아?"
"내놔아아아아!"
레테가 까치발까지 들며 손을 휘저었지만, 키 차이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그녀가 더더욱 밀어붙이는 바람에 시몬이 발을 헛디뎠다.
쿵!
두 사람의 몸이 뒤엉켰다. 레테가 힘겹게 시몬의 손끝에 있는 편지를 탈취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간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변했다.
"너 진짜 죽었......!"
"학생."
똑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시몬 학생, 토토 학생, 방금 여학생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그 말을 들은 시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기숙사 사감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