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68화
아버지가 흘린 피가 채 마르지 않았을 때.
소녀는 검은 상복을 입고, 성문을 나섰다.
때는 북부 역사상 최대의 위기.
북신과의 전투에서 군단장은 죽었고, 관리자 헤이트는 약해졌으며, 북부를 지탱해 온 가장 강력했던 에이션트 언데드가 소멸되었다.
2군단의 전체 병력은 90% 이상이 손실됐고, 북부군은 괴멸했다.
그날은 흐렸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빌케노스를 향해 몰려오는 언데드 군대를 앞두고, 상복을 입은 어린 소녀는 성 밖으로 나와 단신으로 섰다.
쏴아아아아아―
비가 더 많이 내린다.
손에는 부엌에서 가져온 작은 식칼 하나만 들려 있을 뿐.
빗물이 칼등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아버지가 예쁘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흑발은 푹 젖어 있고, 옷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절망.
압도적인 힘 앞에서 북부의 긍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빌케노스는 텅 비었고, 이제는 자신만이 남았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 자신에게 군단장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어떻게든.
쏴아아아아아―
하지만 관리자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한 기의 언데드를 다루지 못하는 아기 군단장의 곁에 선 부하는 없다.
그럼에도 소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었다.
-혼자 싸울 셈이야?
그런데 문득.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둑. 툭.
몸을 꿰뚫을 기세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사라지고, 툭툭 소리만이 남았다.
시야가 검게 물들고, 소녀는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준 남자를 보았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접한 듯한 남자,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은 우산을 들었다.
얇은 턱수염과 올라가 있는 입꼬리,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동자. 묘한 인상이다.
아버지는 군단장끼리는 서로 만나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소녀는 지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저를 죽일 건가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꼭 쥔 식칼을 앞세웠다.
남자는 별 대수롭지 않은 투로 내뱉듯 말했다.
-네 대답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소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남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싸울 거예요.
-오.
뭔가 스위치가 켜지기라도 한 듯, 남자는 갑자기 눈에서 이채를 빛내며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어떻게 싸울 건데? 코어를 개방한 지 하루는 지났나? 관리자의 인정도 못 받은 모양인데, 칠흑을 느낄 수는 있고? 총체적 난국이네. 그 아저씨도 참 징하다 징해. 딸이 어떻게 되든 유산을 물려주는 게 우선이라 이거지?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
소녀가 버럭 외쳤다.
뒷걸음질 쳐서 남자가 씌워준 우산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식칼을 강하게 붙잡았다.
-아버지는 북부를 지키다 돌아가셨어! 나도 북부를 지키다 죽을 거야! 그게!
소녀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아르스칼트의 숙명이니까!
쏴아아아아아-
빛줄기가 거세졌다. 이제 4세에서 5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가녀린 몸은 한기에 파들파들 떨렸다.
저렇게 많은 군대를 막겠다고 나왔으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 따위도 버티지 못하는 작은 몸.
하지만.
남자는 비웃지 않았다. 천천히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온다.
저벅.
남자가 다가왔다. 소녀는 물러났다.
다가오면, 물러났다.
하지만 보폭의 차이는 컸다. 소녀는 곧바로 따라잡혔다. 위협을 느낀 그녀가 흐히익! 소리를 내지르며 식칼을 쥔 채 뛰어들었지만.
텁.
너무나 간단히 막혔다.
남자는 쪼그려 앉은 채 소녀의 작은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건방지지만, 기세는 마음에 드는데.
그러고는 소녀의 손에서 식칼을 빼앗았다.
칼을 뺏기고 비어버린 손에는 우산을 쥐여주었다.
-나랑 교섭하자, 꼬마 아가씨.
소녀가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교...... 섭?
-너무 어려운 단어야? 그냥 거래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한 남자가 귀찮은 표정으로 벅벅 뒷머리를 긁었다.
-솔직히 2군단이 끝장나기 전에 회수할 생각으로 온 건 사실이야. 근데 내가 2군단까지 가져가면, 네프티스 님이 책무를 다하라며 칼로스 북부에 날 박아넣으시겠지.
그가 실실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물론 북부녀들도 나쁘지 않지만, 이런 촌동네에 갇혀 있기에는 대륙의 여자들에게 너무 큰 슬픔이 아닐까?
-?
-아, 이런 농담을 이해할 연령대도 아닌가. 교섭 내용은 간단해.
어느새 북신의 언데드 병력이 눈에 잘 보일 만큼 다가와 있었다. 두 사람은 바람 앞 등불처럼 빌케노스 성 앞의 평지에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태연했다.
-내가 지금부터 북신의 전력을 궤멸시킬 거야.
-!
-향후 5년간은 꼼짝도 못 하도록 내 에이션트 언데드도 두고 갈 거고. 하지만 지켜주는 건 딱 5년뿐이야.
그가 손가락을 쭉 펼쳤다.
-5년 안에 넌 스스로 북부를 단결시키고, 군단을 수습해서 자립할 만큼 성장해야 해. 그동안은 내가 북부를 지키고 있다고 만천하에 공표해 주마. 하지만 네가 기대치 이하라면 어쩔 수 없이 2군단을 회수해야겠지.
그가 히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때, 딜?
그녀는 멍한 눈으로 남자를 우러러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저 히죽 웃는 미소.
따뜻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좋아. 교섭은 성립되었다. 막내 군단장!
웃차.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소녀의 우산에서 벗어나 뚜벅뚜벅 비 내리는 밖으로 걸어갔다.
처억!
남자가 두 팔을 새처럼 쫘아악 벌렸다.
-[와라.]
쿠구구구구구구구!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소녀는 제 눈을 의심했다. 전면으로 밀려드는 북신의 군대 양옆으로, 새까만 검은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전부 7군단의 언데드였다.
이번에는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남자의 몸 곳곳으로 스켈레톤의 뼈가 날라와 들러붙었다.
이내 빈틈없는 본 아머로 전신을 뒤덮은 그는, 검을 들고 칠흑으로 이루어진 망토를 휘날리며 적진으로 향했다.
-자, 잠깐만요!
소녀가 우산을 쥔 채 다급히 뛰어갔다.
-이름, 이름을 알려주세요!
뒤를 돌아본 남자가 씩 웃었다.
-요나. 7군단의 요나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저는 5년 뒤에 더 강해질 거예요!
-그래.
-그리고!
강한 남자를 만나라.
아버지가 늘 하던 이야기를 떠올린 그녀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 뒤에는 당신을 내 남편으로 맞이하겠어요!
그 말에 요나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잠시 멍해 있던 그가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5년이 아니라 15년은 이른 거 같은데! 뭐, 좋아. 좋아.
그가 해골 투구를 꾹 눌러썼다.
-또 보자. 작은 아르스칼트.
터엉!
남자가 망토를 휘날리며 적진으로 향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뒷모습이었다.
* * *
"......."
가만히 회상에 잠겨 있던 대공은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집무실 한구석의 선반.
그곳에는 오래된 검은 우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녀석이 요나의 아들이었다고?'
상상도 못 했다.
당연히 요나는 죽은 줄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첫 번째 약속을 지켰다. 요나는 정말로 북신의 병력을 말살시켰고, 북신은 그에게 입은 피해를 회복하느라 수년간은 제대로 북부를 침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나는 두 번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또 보자. 작은 아르스칼트.
그는 두 번 다시 북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문제의 그 사건'.
엄연히 적군인 프리스트를 살리기 위해, 암흑연합과 동료들을 배신하고 군단의 칼끝을 아군을 향해 돌렸다.
그 결과 7군단은 해체되었고, 배신의 군단이라는 요나 또한 암흑연합에서 사살한 것으로 발표했다.
당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린 대공은 눈이 탱탱 붓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 충격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보다 컸다. 그토록 절망하던 때가 있었던가.
그런데.
'아들이 있었나.'
대공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떠올렸다.
-물론 북부녀들도 나쁘지 않지만, 이런 촌동네에 갇혀 있기에는 대륙의 여자들에게 너무 큰 슬픔이 아닐까?
하긴, 요나의 언사나 행실을 생각해보면 죽었든 살았든 어떻게든 제 씨앗을 퍼뜨리고 다녔을 녀석이긴 했다.
'그 녀석이...... 요나의 아들.......'
새로운 7군단장이라기에, 대공은 네프티스가 관리자를 봉인해 뒀다가 자신의 학생 중 가장 뛰어난 한 명에게 계약시켰다고 생각했다.
배신의 죄를 없앤 뒤에는 그 군단장을 암흑연합의 중요한 카드로 써먹을 테고.
요나의 군단이 그런 식으로 쓰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대공은 군단장을 가르치라는 네프티스의 제의에 시큰둥했다.
'그런데.'
사실은 달랐다.
네프티스는 요나의 아들이 커서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가 7군단장으로 즉위시켰다.
멍하니 있던 대공은 벌떡 일어나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런데 발걸음이 문 앞에서 멈췄다.
'요나에게 아들이...... 시몬이 요나의 아들. 요나의 아들.'
당장에라도 사실을 확인하러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쩐지.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휙 물러났다.
"시몬입니다. 들어갈게요."
"뭐, 뭣? 잠깐!"
시몬은 문을 열고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녀는 어느새 뒷짐을 쥔 채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시몬이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이 와중에 또 훈련이신가요."
"왜, 왜 웃는 것이냐!"
그녀가 훌쩍 뛰어올라 제자리에 섰다.
"고드릭 집사님이 다음 연설을 부탁하셨는데, 괜찮으시겠어요?"
"......!"
대공이 빤히 시몬을 바라보았다.
'왜 몰랐던 거지?'
제 눈에 손가락을 쑤셔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빼닮았는데! 어떻게 몰랐을 수가!'
요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괴롭지 않으려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서 그런 걸까.
요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니 너무나 분명했다.
바로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음주 후에 너무 무리하게 운동하시면 안 좋아요."
요나를 닮은 소년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문을 닫으며 물러났다.
"고드릭에게는 제가 잘 말해놓을게요. 쉬세요."
"자, 잠깐!"
그녀가 급히 팔을 세워 들자, 시몬이 걸음을 멈췄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
네가 정말로 요나의 아들이냐?
요나는 살아 있느냐.
그리고.
그는 누구와 결혼했느냐.
'왜 물어보질 못하는 거지?'
이런 적은 없었다.
이런 경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뒤숭숭한 감정상태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죄송해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시몬이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취기가 문제가 아니라 열이 좀 오르신 것 같아요."
"!!"
대공이 몸이 목석처럼 얼어붙었다.
이 녀석.
'요나의 아들이 확실하다.'
시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떼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침실로 드셔야 할 것 같아요."
그녀의 몸이 철광석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