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89화
에이션트 언데드, 자이로스.
그리고 빙하 속에 갇혀 있던 그를 꺼내준 건 요나였다.
덕분에 자이로스는 긴 잠에서 깨어나 에이션트 언데드로서 군단에 합류했지만, 하필 그 시기는 7군단의 최전성기.
요나의 곁에는 이미 많은 에이션트 언데드들이 있었다. 뒤늦게 합류한 자이로스의 입지는 썩 대단하지 않았다.
이에 자이로스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한 요나에게 충성을 증명하려 했고, 시키는 일은 뭐든지 했다.
죽이는 일.
파괴하는 일.
불 지르는 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이로스는 요나가 죽이라고 한 몬스터들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린 뒤, 몬스터들의 머리를 그물에 넣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명령을 완수했으니 그가 칭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요나~
명령권자인 요나의 옆에 웬 인간 여자가 알짱대고 있었다.
서부지대에서 우연히 만난 뒤로 요나에게 푹 빠졌는지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 또한 강력한 네크로맨서라고 하던가.
-그런데 자이로스 말야.
멈칫.
자신의 이야기 나오자 보고를 서두르려던 자이로스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칠흑을 거두고 기척을 숨겼다.
-요나의 군단에는 유능한 대장들이 많잖아? 그런데 유독 자이로스는 좀 이상한 것 같아.
-.......
-사람들을 구하랬더니, 난데없이 근처의 마을사람들이랑 지나가던 도적 떼까지 죄다 붙잡아서 동굴에 가둬놓질 않나.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을 데려오랬더니 사람들의 몸에 상처를 내고 옷을 붉게 물들어서 데려오질 않나. 시킨 일을 이상하게 하고, 심지어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사태를 크게 만들어.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이로스가 친 사고 수습하느라 네가 고생하는 거 보면 조금 딱하단 생각이 들어. 왜 데리고 다니는 거야? 좀 많이 이상한 녀석이잖아.
자이로스는 여자를 찢어 죽이고 싶은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며 대답을 기다렸다.
바위에 걸터앉은 요나가 하하 웃었다.
-네 말이 맞아.
자이로스는 손에 쥔 그물망을 놓치고 말았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몬스터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대굴대굴 굴러서 곳곳에 흩어졌다.
-자이로스는 융통성도 없고 머리도 나쁘지.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못 해.
더 듣기 거북했던 자이로스가 등을 돌려 걸어가려는데.
-하지만.
그때 요나의 목소리는 주위의 잡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 한 가지 일만큼은 착실하게 해내는 녀석이야. 그래서 난 누구보다 자이로스를 신뢰해.
그 순간.
고작 그 한마디에.
자이로스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느껴본 적 없는 감격. 그간의 세월을 모두 보상받는 듯한 한 마디.
타인의 '인정'.
그것이 자이로스에게 결핍된 요소였다.
-오로지 요나 님을 위해!
그 후로 게하임까지 개방한 자이로스는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고, 요나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라도 수행했다.
-자이로스는 여기 남아서 퇴로를 지켜, 믿는다!
-손을 많이 더럽히는 일이겠지만, 너밖에 못 하는 일이야. 남김없이 없애 버려.
거칠고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로지 요나를 위해.
자이로스는 자기 자신이 머리가 나쁘고 판단력이 흐리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요령을 부릴 줄도 모르고, 융통성도 없다.
그래도 다른 건 몰라도, 요나가 지시한 단 한 가지 일만큼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수행해 냈다.
그렇게 요나를 비롯하여 군단 모두의 인정을 받아가고 있었지만.
-자이로스. 네가 남아서 북부를 지켜줘.
문제는 칼로스 북부에 왔을 때 시작됐다.
-군단에서 이 혹한의 지형에 가장 잘 움직일 수 있는 건 너와 설귀부대뿐이야. 기간은 5년 정도? 더 짧아질 수도 있고 더 길어질 수도 있겠군.
요나가 자이로스의 양어깨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북부를 지켜줄 수 있을까?
자이로스는 승낙했다. 자신은 궂은일 담당이었으니까.
그렇게 7군단은 돌아가고, 자이로스만 북부에 남았다.
긴 세월을 존재해 왔던 에이션트 언데드에게, 5년이란 세월은 눈 한번 깜빡이면 지나는 찰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요나가 없는 5년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길었다.
그래도 버텼다.
인내했다.
요나는 자신이 북부를 지키길 기대했고, 그렇다면 그 기대에 부응한다.
결코 요나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북신은 끈질기게 언데드를 만들어 빌케노스를 침공했고, 자이로스는 프로스트 필드에 머무르면서 북신과 맞서 싸웠다.
곧 요나가 돌아올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요나가 이 의무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자이로스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요나의 칠흑을 위안 삼아, 짙은 외로움 속에서 버텼다.
하지만.
요나가 약속한 5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어느 시점에.
뚝-
자이로스는 요나와의 계약이 끊어진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요나의 칠흑이 느껴지지 않는다.
요나가 오면 응답할 수 있도록 열어둔 사념의 통로도 사라졌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요나가 나를 버렸다.
-자이로스가 친 사고 수습하느라 네가 고생하는 거 보면 조금 딱하단 생각이 들어. 왜 데리고 다니는 거야? 좀 많이 이상한 녀석이잖아.
정말로 그는 나를 버린 건가?
이제는 내가 필요 없어진 걸까?
사실 그 여자의 말이 맞는 걸까?
자이로스는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거다.
하지만 약속한 5년이 다 지난 뒤에도 요나는 그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그래! 내가 아직 명령을 완전히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나의 명령은 '북부를 지켜라'.
그리고 북부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북신.
북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완전한 의미에서 북부를 지키는 게 아니게 된다.
그동안 방어만 하던 자이로스는 처음으로 전력을 집결시켜 공격에 나섰다.
북신과의 교전.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이로스는 기어이 삼형제를 돌파해 어비스에 이른다. 그리고.
푸욱!
북신을 죽였다.
검은 피를 뒤집어쓴 자이로스는 포효했다.
[요나 님! 제가 해냈습니다! 제가 북부에 완전한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당신이 명령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북신을 제거한 뒤에도 요나는 그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나는 임무를 수행했다.
북부를 온전히 지켰다.
인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왜?
자이로스는 좌절하고 무너져 내렸다.
-요나는 너를 잊었다.
그때 어두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요나는 널 대체할 유능한 에이션트 언데드들을 보유했지. 네 존재를 잊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어두운 목소리는 끊임없이 자이로스의 머릿속에서 말을 걸었다.
-북부를 지키는 게 네가 부여받은 임무이자, 의무였다. 하지만 북부는 평화로워졌고, 북부를 지키던 넌 쓰임새를 다했다. 그러면 이제 네 쓸모는 어디에 있는 거지?
[.......]
말문이 막혔다.
-요나가 다시 널 찾아오게 해야 한다.
좌절하고 무너져 내린 자이로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요나 님이 나를 다시 봐주신단 거냐.]
-다시 북부를 위기에 빠트려라.
어두운 목소리가 말했다.
-간단하지 않은가. 네가 명령을 받기 전의 상황으로 모든 걸 되돌려라. 북부가 다시 위기에 빠지면, 요나는 비로소 널 떠올리고 네 쓰임을 위해 찾게 될 것이다.
[북부를 다시....... 위기에.]
-홀로 남아 꿋꿋이 북부를 위해 싸우던 너를,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았다.
어두운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니 세상에 보여라! 네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냈는지!
* * *
그 이후, 자이로스는 북신의 힘을 취했다.
새로운 어비스를 세우고, 몬스터의 시체를 모아 언데드 군대를 만들었다.
북신이 돌아왔다.
그렇게 전 대륙을 두려움에 빠트리고, 요나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킬 생각이었지만 생각지 못한 변수에 발목을 잡혔다.
[집결하라.]
소녀가 성장했다.
북부에서 요나와 계약했던 자이로스 외의 또 한 명. '진 아르스칼트'는 북부를 결집시키고 2군단을 재건했다.
자이로스가 벌어준 5년의 시간 동안, 헤이트의 힘과 광풍의 활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어린 대공은 역대 최고의 재능을 폭발시키며 북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첫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어린 대공은, 반창고를 잔뜩 붙인 팔을 치켜들며 외쳤다.
[아버지와 은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긍지 높은 백성들이여, 나를 따르라!]
소녀의 연설은 북부인들을 단번에 고양시켰다.
그리고 자이로스 또한 휘하의 언데드들로 그 연설을 들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요나 님께서 지키라고 한 소녀와 싸우고 있는 거지?'
혼탁해진 자이로스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려고 했다. 그는 우선 인간과의 전쟁을 중단했다.
북부 대공 또한 자신의 영역을 지킬 뿐, 그 외의 영역으로는 진출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평화가 이어졌으나.
콰앙-!
변수는 외부에서 나타났다.
-하하하! 프로스트 필드에 마정석 광산이 있다니! 그 소문이 정말이었어!
북부에 막 들어온 감시자, 볼드몬트 백작이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프로스트 필드를 침공한 것이다.
자이로스가 인간에 대한 모든 공격을 중지한 상황에서, 흥분한 볼드몬트 백작은 프로스트 필드의 지하자원을 빼돌렸다.
광산 한두 개로는 성에 차지 않는 건지, 심지어는 어비스를 공격하려 했다.
그 행동은 자이로스의 심기를 강하게 건드렸고.
-보아라, 자이로스.
어두운 목소리도 부추겼다.
-요나는 북부를 지키라고 말했다. 무엇으로부터? 북부의 평화를 깨는 자들이겠지. 인간들을 이 땅에서 축출해야만 북부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
뱀과도 같은 목소리가, 무너져 내린 자이로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요나가 널 찾아오기 위해서라도, 요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라도, 너는 북신이 되어 대공을 무너뜨려야만 한다.
그렇게 북부에서는 새로운 긴 전쟁이 펼쳐졌다.
북부를 지키던 수호자, 자이로스는 새로운 북신이 되어 빌케노스를 침공했고.
북신에게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 진 아르스칼트는 대공이 되어 빌케노스를 지켰다.
그렇게 십수 년간 긴 전쟁이 벌어지던 중.
현재에 이르러 요나의 아들이 북부에 찾아오는 것으로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까아아아아앙!
채애애애앵!
시몬과 자이로스가 거칠게 검격을 주고받으며 물러났다.
"크윽!"
시몬이 숨을 헐떡이며 물러섰다.
흉부가 꽉 조이며 숨이 턱턱 틀어막혔다. 무릎이 금방이라도 꺾일 것처럼 후들거렸다.
의식도 흐릿하게 점멸하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떨어지면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애쓰는구나. 요나 님의 아들.]
혹한의 검을 늘어뜨린 자이로스가 자리에 앉는 시늉을 취하자, 왕좌가 일어나 그를 떠받쳤다. 동시에 어비스의 촉수들과 언데드들이 주위를 새까맣게 채우며 쏟아졌다.
"크윽!"
시몬은 정신없이 공격을 피하며, 한 손에 쥔 대검으로 '칼'의 독을 뿌려대며 버텼다. 하지만 칠흑은 진작에 바닥나 있었다.
[그 깃발은 잘 알고 있다.]
자이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시몬이 필사적으로 놓치지 않고 있는 황금의 깃발을 응시했다.
[빌케노스에 사는 그 증오스러운 대공의 깃발이군. 사용법은 깃발의 끝이 대상자의 신체에 직접 닿아야 하지.]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대공. 그자가 북부의 긍지를 핑계로 기수라는 자살특공대를 만들어 애를 쓰는 건 알고 있다만, 여긴 너뿐이다. 너 혼자 내 몸에 깃발을 닿게 할 수 있을까?]
"대공과 전사들을 모욕하지 마. 자이로스."
시몬이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닿을 필요도 없어."
[뭐?]
타앗!
시몬이 바닥을 박차고 돌진했다. 자이로스는 다시 한번 팔을 들어 올려 촉수들과 언데드 떼를 보내 시몬을 덮치게 했다. 곳곳에서 녹색 독극물이 펑펑 쏟아졌다.
자이로스는 태연하게 왕좌에 앉아 턱을 괴었다.
[그 후들거리는 몸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바로 그 순간.
<시체 폭발>
시몬이 아공간에서 꺼낸 좀비에서 폭발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태연하게 지켜보던 자이로스가 고개를 젖혔다.
부아아아아앙!
시커먼 폭발 연기를 뚫고, 황금 깃발의 봉대가 쇄도해 지나갔다. 자이로스가 한심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이리 뻔할 수가.]
자이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깃발을 향해 혹한의 검을 휘둘렀다.
쩍!
황금의 깃발 봉대가 반으로 잘려나갔다. 봉대가 허무하게 바닥에 닿아 굴러떨어졌다.
[이제 다 끝났다. 순순히 죽......!]
후우웅!
그때 폭발 연기의 반대편에서 빠져나온 시몬이 자이로스에게 돌진했다. 역동작에 걸린 자이로스의 눈이 커졌다.
폭발 속에서 봉을 내지른 건 시몬이 아니었다.
'어느 틈에!'
그것은 단독으로 움직인 피어의 팔이었다.
덥석!
시몬이 자이로스의 몸에 철썩 달라붙었고, 동시에 피어의 몸이 본 아머로 분해되어 시몬과 자이로스를 착착 연결해 고정했다.
특히 반대쪽 피어의 팔은 뱀처럼 바뀌어 자이로스의 팔을 쉽게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시켰다.
[어리석구나! 대공의 깃발만 아니라면 그 무엇도 내 신체를 파괴할 수 없다!]
시몬이 입꼬리를 올렸다.
"너, 계속 깃발 끝만 경계하고 있었지? 깃발이 네게 닿을 수 없다면!"
시몬이 자신의 왼손을 그의 가슴에 닿게 했다. 손등에는 '과녁'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시몬이 깃발 끝으로 자기 손을 찌른 것이다.
쿠르르르르릉!
동시에 어비스의 천장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어비스의 하늘 위, 천장에 검은 멍이 든 것처럼 흔들렸다.
[멈춰라, 인간! 그러면 네놈의 손도......!]
시몬의 눈이 번뜩였다.
"북신을 쓰러트리는 대가로 손 하나면 싸다고 보는데. 안 그래?"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하늘에서, 대공이 힘을 쏟은 최후의 일격이 시몬의 유도에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