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25화
"시몬!"
모두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안나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시몬은 그녀가 레테처럼 신성을 차단하는 초크 목걸이를 차고 있는 걸 보았다.
이내 그녀가 시몬을 꽉 끌어안았다.
"독에 당해서 병동에 누워 있다길래 걱정했단다! 괜찮니? 정말 괜찮은 거야?"
다시 떨어져 나온 그녀가 이번엔 시몬의 옷자락을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고개가 마구 돌아가던 시몬은 격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저, 저는 괜찮아요, 이모."
잠잠하던 발락의 독이 다시 몸속에서 퍼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시몬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
"그보다 깜짝 놀랐잖아요! 어쩌다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잡혀 오게 된 거예요?"
"아, 그게......."
안나는 납치당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신을 랭거스틴 가이드라고 소개한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갱단이 튀어나와서 자신을 데려갔다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시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힘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지 않았어요?"
"어머, 외국에서 손찌검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잖니?"
그녀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제 뺨에 손을 댔다.
"그리고 맞은 사람이 쇼크로 죽을 수 있고, 막 집이 부서질 수도 있고."
"......범죄를 저지른 갱단을 제압하는 걸로는 아무도 뭐라 안 해요. 그리고 집은 이미 부서졌네요."
"오호호! 시몬이 무사하니 됐단다."
그녀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장성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옆을 보았다.
"그런데 저기 뒤에 예쁜 아가씨들은 누구니? 시몬의 친구들?"
스켈레톤을 움직여 갱단원들을 포박하고 있던 로레인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이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몬과 같은 학과 동기인 로레인 아크볼드라고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로레인이 긴장하는 모습은 오랜만에 본다고 시몬은 생각했다.
"어머나, 네프티스 님의 따님? 네프티스 님께 말은 많이 들었...... 아니, 내 말은. 네프티스 님께 이야기를 들은 언니에게 말은 많이 들었답니다. 오호호!"
'이모 연기 어색해!'
시몬은 속으로 발을 동동 굴리며 안나를 지켜보았다.
"처음 뵙겠어요 시몬의 이모님."
사락-
세르네가 교복 스커트의 양 끝단을 살짝 붙잡아 들어 올리며 예를 취했다. 하늘에서 태양광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려왔다.
"상아탑 공식 후계자이자 현 서열 1위, 그리고 시몬과 가장 큰 유대감을 나누고 있는 2학년 동기 세르네 아인다르크라고 해요."
"어머나~ 곱기도 해라. 만나서 반가워요. 시몬에게 이런 근사한 친구들이 있었다니!"
안나가 단걸음에 달려왔다.
"두 사람, 우리 시몬의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한 손에 로레인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세르네의 손을 꼬옥 붙잡아 포갰다.
"우리 시몬이 겉은 씩씩해 보이지만, 가끔 나사 빠진 행동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 외에는 허점도 많고, 마음속으로 상처도 많이 받아요."
'엄마!'
시몬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런데 아까 멀리서나마 두 분이 시몬과 함께 싸우는 모습을 봤어요."
안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는 시몬이 두 사람을 동료로서 진심으로 믿고 신뢰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이렇게 멋진 친구들이 곁에 있어주다니! 매일 매일 고향에서 키젠 방향을 보며 걱정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조금 걱정을 덜 수 있겠네요."
그녀는 피어나는 꽃망울처럼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을 만나게 되어 난 정말 행운아예요."
"!"
로레인과 세르네의 얼굴이 동시에 상기되었다.
"저야말로 시몬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오호호, 시몬의 안위는 제게 맡기세요, 이모님."
"편하게 아일라라고 불러요."
아일라는 안나의 가명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갱단원들을 포박해 경비대에 연락하고 할렘가를 빠져나갔다.
그 잠깐 사이 몇 마디를 더 나눈 안나와 소녀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친해진 뒤였다.
도무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평소 늘 차분하려고 노력하던 로레인은 눈을 빛내며 수다를 떨었고, 세르네는 안나의 팔에 매달리는 스킨십까지 하면서 기품있게 웃었다.
안나의 말도 안 되는 친화력이었다. 만난 지 10분 만에 마치 새로운 두 딸을 얻은 듯한 모습.
'뭐지? 이 거리감은.'
시몬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여자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다 안나가 뒤를 돌아보더니 아들을 향해 생긋 웃어주었다. 시몬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이모, 지적하는 게 늦었는데요. 그 차림은 뭐예요?"
"아. 이 옷?"
안나는 평소에 늘 털털한 옷차림으로 다녔는데, 이렇게 귀족들이 입는 드레스에 장신구로 치장한 모습은 시몬도 처음 보았다.
이렇게 잔뜩 꾸미고 오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결국 갱단의 표적이 된 거다.
"그리피스가 학생회장의 친척으로서 품위를 지키려면 이렇게 입고 가라고 조언해 줬단다."
'......그리피스 아줌마.'
그리피스는 안나와 매일같이 만나서 수다를 떠는 레스힐 농장지기의 아내였다.
"어머, 잠깐만."
시몬의 말에 대답하던 안나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굳었다. 그러곤 화들짝 놀라며 뛰어오더니 제 아들의 몸을 구석구석 매만지기 시작했다.
"......이모?"
"가만히 있어 보렴."
진단을 마친 그녀의 표정이 더더욱 심각해졌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야위었구나. 내가 딴 건 몰라도 끼니는 제때 챙겨 먹으라고 몇 번을 말했니?"
"이, 이건 어쩔 수 없었어요. 바로 저번 주에 기말고사가 있어서......!"
"말대꾸하지 말렴. 내가 평소에 다른 걸로 잔소리를 한 적 있었니? 무슨 일이 있어도 삼시 세끼는 꼭 챙겨 먹으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사람 좋고 살갑던 안나가 스위치가 돌아간 것처럼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시몬은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고, 로레인과 세르네마저 그 기세에 질려서 말리지 못했다.
"이럴 줄 알고 여기, 보관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빌려왔단다."
그녀가 가방을 열었다. 겉보기엔 수수한 디자인의 평범한 가방이었지만, 안에서 음식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이건 생선조림이고, 이건 딸기파이고, 이건......."
시몬의 손에 물건들이 탑처럼 쌓여가기 시작했다. 시몬이 비명처럼 외쳤다.
"꼭 지금 꺼내야 해요? 어차피 방학이니까 곧 같이 레스힐에 갈 거잖아요!"
"그 전에 네가 로크섬에서 먹을 것들이란다. 자, 여기 이것도......!"
물건의 반을 꺼낸 뒤에 안나가 후우 하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비로소 만족스럽게 웃은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로레인과 세르네를 보며 말했다.
"이런, 내가 너무 흥분했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시몬? 우선 가까운 식당부터 들르자꾸나. 두 사람도 같이......."
"이모."
시몬이 얼른 말했다.
"지금 바로 로크섬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사정이 있어서요."
"?"
* * *
현재 시몬은 키젠 병동의 철저한 관리를 받는 환자였고, 허가 없이 병동 밖에 나가는 건 엄중히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안나가 실종됐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일은 이미 저질렀으니, 병동의 의사나 다른 관계자들이 눈치채기 전에 병실로 돌아와야 했다. 네 사람은 즉각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복귀했지만.
-환자분. 이러면 곤란해.
시몬의 병실에는 이미 병동 의사와 관계자들이 떡 하니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시몬이 그 자리에서 계속 사과했고, 로레인도 나서서 몇 마디 해준 덕분에 다행히 이번 일이 학사에 보고되는 건 면했다. 대신 완치 판정이 날 때까지는 산책도 금지되었다.
-설마 전투까지 했어? 상태가 더 안 좋아졌는데.
아직 독의 효과가 퍼져 있는 상태에서 갱단원들과 싸우는 통에, 시몬의 몸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시몬은 골골거리며 침실에 누웠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들. 몸은 괜찮니?"
안나가 몰래 병실에 들어왔다. 통증에 괴로워하고 있던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어, 엄마?"
"잠깐만 기다려 보렴."
근처에 아무도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그녀가 신속한 동작으로 마법진을 펼쳤다. 신성을 차단하는 고위 결계 마법진이었다.
"독에 중독됐다길래, 네 아빠에게 무리하게 부탁해서 내가 온 거란다."
펄럭-
이내 그녀는 프리스트 시절에 입던 하얀 로브를 걸치고는 두 손을 모았다.
"금방 낫게 해줄게."
화아아아악-!
포근한 광명이 일렁였다.
시몬은 한때, 신성연방 최강의 프리스트였다는 '기적의 성녀'의 진가를 잠깐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받아본 프리스트들의 치유마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의 강제로 몸이 부활해 버리는 기분.
그렇게 안나가 다녀가고 몇 시간 뒤, 의사가 시몬의 건강을 체크하러 들어왔고.
"이게 뭐야."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결과를 보고 있었다.
"세 시간 만에 몸이 다 나았잖아?"
"아하하, 밤에 먹었던 약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시몬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하마터면 방학의 반을 병동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안나의 해독마법 한 번에 거의 완치상태까지 도달한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병동 의사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 * *
다음 날 새벽.
남들의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흐아암."
바로 키젠병동의 조리사였다. 그는 비몽사몽 한 얼굴로 머리에 조리모를 쓰고는 조리실에 들어갔다.
"선배란 것들은 다 휴가 쓰고 나가버리고 진짜. 그냥 가만~ 히 있어도 밥이 저절로 딱 만들어졌으면 좋겠...... 응?"
그가 눈을 끔뻑였다. 조리실의 전등이 켜져 있었다.
밤에 불 안 끄고 나갔던가? 그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쪽을 보았다. 온갖 음식 재료들이 질서정연하게 썰린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가 예쁘게 다듬어진 당근을 집어서 만지작거렸다.
'누가 한 거야? 뭐 이렇게 예쁘게 썰었어?'
화르르르륵!
주방에서 후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보니 다소 사이즈가 커 보이는 조리복을 입은 여인이 커다란 후라이팬을 돌리고 있었다.
저 가느다란 손목에 나올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솜씨로 밥을 볶고 있었다.
"다, 당신 누구야! 누구 허락받고 여기에......!"
"안녕하세요!"
안나가 살갑게 웃었다.
"시몬 학생의 이모인 아일라예요. 제가 장을 좀 봐놨는데, 도와드려도 될까요?"
파바바바밧!
후라이팬을 놓은 그녀가 식칼을 들더니, 잔상이 일으킬 만한 속도로 빠르게 재료를 썰어서 접시에 놓았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죠?"
"......어, 음."
조리원의 눈길이 슬그머니 안나가 든 칼 쪽으로 향했다.
"그, 그러시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 당직 병동 의사들과 관리원들이 병동에 출근했다. 다들 아직 잠이 덜 깬 표정으로 하나둘씩 회의실 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는 가운데.
"이번 일은 좀 그래."
한 병동 의사가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학사일과 키젠 병동은 별개라고. 아무리 로레인 아가씨가 무단이탈한 시몬 학생을 감싸고돈다지만, 이대로 그냥 넘어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선생님, 술 드셨죠?"
"아, 술이 문제가 아니라고, 이건!"
그가 탁탁 테이블을 두들기며 까칠하게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의사가 하품을 하며 말을 받았다.
"학기 중에 생긴 일도 아닌데 그만 넘어가지. 이모가 갱단에 납치당했다는데 얼마나 놀랐겠나."
"그러니까 내 말은! 자꾸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봐주기 시작하면......!"
"식사 왔습니다~"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
"이게 뭐야?"
그들의 앞에 칠면조 구이를 비롯한 호화로운 요리들이 척척 세팅되고 있었다.
아침은 기껏해야 빵에 수프, 운이 좋으면 고기 몇 점 끄적거리는 게 전부였는데, 아침부터 요리가 수십 가지 종류가 넘었다. 그리고 음식을 놓는 것도 평소의 조리원이 아니라, 낯선 여자였다.
"아, 시몬의 이모님?"
"저희 조카가 매번 신세 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힘 좀 써봤답니다!"
안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병동 의사들과 관리원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식기를 들었다. 그리고 각자 맛을 조금 보더니.
"?!!"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사 자리에 대화가 사라졌고, 다들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기 바빴다.
안나는 그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았다. 그때 처음에 시몬을 비난했던 병동 의사가 인상을 구겼다.
"이봐요. 누구 허락받고 이런 짓을......."
"먹고 해. 먹고. 응?"
동료 의사가 눈치를 주었다. 그가 쯧 하고 불만스럽게 혀를 차며 앞에 놓인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어보았다.
"......."
이내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음 스푼, 그다음 스푼을 떴다.
"부, 부인."
조리원은 감격에 울먹이면서 다가왔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마워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레시피를......."
"네, 써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 이후로 병동에서 시몬의 일로 문제 삼는 사람은 사라졌다.
* * *
신성연방.
에프넬의 본진, 하늘섬.
"의자는 다 닦았나?"
"예!"
프리스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거물들의 회담이 열리는 날이다.
하인들은 바닥에 머리카락 하나 없도록 빡빡 닦고 있었고, 팔라딘들은 손목을 휘휘 돌리며 검례를 올리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두 분이 행차하시다니, 갑자기 무슨 일이래?"
"나야 모르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그때, 나이 지긋해 보이는 한 프리스트가 외쳤다.
"신해의 성녀, 이스라필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웅장한 나팔 소리가 실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프리스트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일제히 무릎을 꿇었고, 팔라딘들은 절도 있게 검례를 올렸다. 하인들처럼 신분이 낮은 자들은 감히 고개를 들 자격도 없었기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차박- 차박-
이내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커다란 하프를 품에 안은 여인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구두를 신지 않은 새하얀 맨발이었는데, 바닥을 디딜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 물처럼 파문 같은 것이 일었다.
바다색 머리카락, 감고 있는 눈, 그리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성녀의 모습이다.
"아아."
몇몇 프리스트들은 상기된 얼굴로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녀를 보았다.
"이스라필 성녀님이셔."
"어쩜 저렇게 기품이 넘치실까."
이스라필은 사람들을 지나 한 여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세를 낮추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cíbĭlis). 여신과 가장 가까운 딸을 뵙사옵니다."
그녀가 이스라필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스라필이 인자하게 웃음을 지었다.
"라흘 교수님, 불초 제자가 연락이 뜸하여 죄송해요."
"에프넬에서 이렇게 큰 회담을 여시다니. 어쩐 일입니까."
"논해야 할 사항이 있어서요."
라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저도 이스라필 성녀님과 긴히 논하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만."
"오호호, 레테 일이죠?"
이스라필은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어지간히 말괄량이라서 속을 많이 썩이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이스라필 님, 그게 문제가 아니라......."
빠빠빠빠빠빰-!
빠빠빠바빰!
갑자기 악기의 연주가 바뀌었다.
군주의 행진곡처럼 빠르고 급격한 곡으로 변했다. 팔라딘들이 자세를 가다듬고, 대중들은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심판의 성녀, 다나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성녀들이 입는 하늘하늘한 성의가 아닌, 화려한 빛의 갑주를 입은 여성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팔라딘들이 힘주어 검례를 취했다.
이스라필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셨군요."
불타는 듯한 적색 머리의 성녀 또한, 이스라필을 보며 히죽 웃었다.
암흑연합과의 전면전을 주장하는 신성연방 내 강경파의 수장이자. 단순 전투력으로는 성녀 중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인물.
"보기 힘든 얼굴을 여기서 보네, 이스라필."
악명높은 심판의 성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