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27화
째깍.
째깍.
째깍.
시간이 감기는 방.
여인의 스승은 이곳을 그렇게 불렀다.
방 전체가 각종 시계들로 가득하다. 괘종시계, 탁상시계, 모래시계 등 그 종류와 규격, 크기 또한 천차만별.
실은 이 시계 모두가 값비싼 아티팩트다. 그것도 시간에 관련된 아티팩트들뿐.
바로 이곳에, 한 여인이 방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또각-
또각-
키젠 부총장, 제인.
구둣발 소리를 내며 주위를 살피던 그녀는 어느 한 구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
그녀의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다.
시계 하나가 금이 간 채로 작동이 멈춰 있었다. 그 시계를 중심으로 다른 시계들 또한 일그러지거나 망가져 있는 게 보인다.
그녀는 살짝 손바닥을 펼쳤다.
허공에 일어난 나비들이 모여들더니, 낫의 형태로 변했다. 그녀는 낫을 쥐고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계들이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고, 다른 시간대를 가리키며 작동하고 있다. 어지러운 박자감 때문인지, 아티팩트에서 나오는 마력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두통이 밀려든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나가려는 그때.
홱!
순간적인 움직임에 반응한 그녀가 낫을 휘둘렀다.
그러나 잠시 후 느껴진 건 다리에 '폭'하고 안기는 무언가였다.
"흑흑! 제이이이인!"
익숙한 칭얼거리는 목소리.
제인은 한숨을 쉬고는 낫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낫이 나비들로 분해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보안 알람이 울려서 왔습니다. 출입 장부에 서명한 뒤에 들어오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네프티스 님."
"그치마안!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구!"
칭얼칭얼칭얼.
아무래도 이 두통은 시계의 초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상관이 100미터 이내로 들어와서 반응한 반사적인 몸의 거부반응이리라.
제인은 팔을 뻗어서, 자신의 다리에 매미처럼 철썩 들러붙어 있는 꼬마 상관의 뒷덜미를 들고 끌어 올렸다.
자세히 보니 상관의 이마에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제인이 미간을 구겼다.
"그 건 때문입니까."
"응."
"아무래도 이번엔 제대로 사고를 치신 것 같군요."
네프티스가 폴짝 뛰어내렸다. 제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상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인데 어쩔 수 없었다구!"
"네,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인은 네프티스의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내고는, 반대로 접어 그녀의 입가도 덤으로 닦아주었다. 네프티스가 우풉거리며 반항했지만 제인의 손길은 야무졌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됩니까."
"안 돼!"
"과거로 간 건 누굽니까."
네프티스가 에헤헤 웃었다.
"나도 몰라!"
입을 닦은 제인의 손에 힘이 빡 들어갔다.
"우부부붑! 진짜 모른다니까아!"
비로소 제인이 더러워진 순수건을 옷 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감히 조언 드리기 어려운 문제지만, 여기서 아티팩트들을 만진다고 해결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응. 내 생각도 그래."
총총거리며 앞으로 걸어간 네프티스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우리도 사람을 보낼 필요가 있겠어."
* * *
쏴아아아아아아아-!
레스힐은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시몬과 안나는 벽난로 곁에 앉아 리처드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내 뜨개질을 하며 벽난로에 앉아 있던 안나는 리처드가 걱정되는 듯 창밖을 한번 보았다가, 부엌으로 가서 뭔가를 가져와 아들에게 먹이고, 다시 뜨개질을 하기를 반복했다.
'배, 배불러.'
덕분에 시몬은 집에 오자마자 아홉 끼를 먹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창밖을 보았다가 부엌으로 향하려 하자 시몬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저 배불러요! 이제 괜찮......!"
덜커덩!
문이 열렸다. 투툭거리는 빗소리가 쏴아아아-! 하고 거칠게 쏟아지는 빗소리로 바뀌었다.
이내 철퍽거리는 장화 소리와 함께,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로브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여보!"
리처드였다.
시몬이 얼른 그를 부축해서 벽난로 곁에 앉혔고, 안나는 젖은 로브를 벗겼다. 리처드는 비에 홀딱 젖어 엉망이 된 모습이었다. 미역처럼 젖은 머리에서 계속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시몬."
리처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시몬이 얼른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이게 갑자기 다 무슨 일이에요?"
"모르겠다."
리처드가 시야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이상적으로 자리잡힌 중후한 주름살이 드러난다.
"레스힐에 온 뒤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유례없는 폭우야. 계곡이 범람하고 산이 무너져내리고 있어."
안나는 다짜고짜 리처드의 무릎에 팔팔 끓인 토마토 수프 그릇부터 내려놓았다. 리처드가 뜨거워서 움찔했지만, 그녀는 엄살 부리지 말라며 한 스푼 떠서 리처드의 입에 넣었다.
"아, 몸에 뜨거운 게 들어오니 살 것 같군."
리처드가 그렇게 말하더니 제 아내를 찐한 눈으로 보았다. 안나가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고 리처드도 똑같이 했다.
또 시작되는 금슬 좋은 부부의 애정행각.
아들이 앞에 있어도 이 두 사람을 말릴 수는 없었다. 시몬은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내일도 나가야 해요? 여보."
한바탕 입맞춤을 마친 안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영지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
리처드가 피로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곳에 살던 몬스터들까지 인간들의 영역으로 넘어오고 있어. 벌써 공격받은 영지민들도 있더군. 아랫마을은 전부 침수돼서 고지대의 피난소로 보냈지만, 그들을 먹일 식량이 턱없이 부족해. 길도 엉망이라서 상단에서 보낼 식량이나 물품도 들어오기 힘들다는 모양이야."
안나가 양 허리에 손을 얹었다.
"창고에 음식이 조금 남아 있어요. 제가 음식을 가지고 피난소로 가서 영지민들을 위해 요리를 할게요!"
"영주 부인께서 그렇게 해준다면 든든하지."
두 사람이 또 찐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자, 시몬이 얼른 끼어들었다.
"저도 도울게요 아버지! 몬스터들이 넘어왔다면 인명피해가 발생할지 몰라요. 빨리 처리해야 해요."
리처드가 시몬을 보았다.
"그래, 미안하구나. 키젠 학생은 방학이라고 한가하지 않을 텐데."
"이것도 훈련의 일환이니까요!"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밝는 대로 흩어져서 움직이자꾸나. 비가 내려서 체온이 빨리 떨어질 테니 준비 철저히 하고, 장기간 싸우지 말도록 해라."
"네!"
폴렌티아 일가는 함께 전의를 다지며 손을 모았다.
* * *
그날 이른 새벽.
작전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비는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안나는 식량 창고로 향했고, 시몬과 리처드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몸을 날렸다.
"남동쪽 산맥에서 터전을 잃은 마운틴 오크들이 피난소로 접근하고 있다."
리처드가 시몬을 보며 말했다.
"놈들은 지치고 굶주렸어. 이대로 놈들이 영역권 안에 들어오면 사람을 잡아먹을 게다. 남쪽을 맡거라. 내가 북쪽을 맡으마."
"네, 아버지!"
리처드는 빗줄기를 뚫으며 산을 올랐고, 시몬은 범람한 계곡을 따라 앞으로 쭉 달렸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계곡을 따라 접근하고 있는 몬스터 무리의 모습이 보였다.
척!
시몬은 칠흑을 밟고 뛰어올라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크르륵!
그것들은 시몬을 보자마자 이를 드러냈다. 입가에 침을 줄줄 흘리며 도끼를 들어 올렸다.
시몬은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를 올려붙이고, 가만히 오크들을 응시했다.
"이렇게 돼서 유감이지만, 난 우리 영지민들을 지킬 의무가 있어."
-캬아아아악!
한 무리의 오크들이 시몬을 향해 돌진해 왔다. 시몬은 조금 더 위를 보았다. 위쪽에도 오크들 몇 무리가 더 있었다.
'빠르게 끝낸다.'
아공간에서 스켈레톤이 튀어나오고, 마법진에서 뻗어 나간 청록빛 선광이 스켈레톤들의 몸에 떨어졌다.
그들이 쥔 검이 에메랄드빛으로 물들고, 망토가 휘날린다.
<시몬 오리지널 - 친위대>
"쳐라."
23기의 스켈레톤들이 에메랄드빛 섬광을 남기며 저마다 흩어졌다.
* * *
전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마운틴 오크 하나하나가 강한 건 아니었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극한상황 속에서 산 하나를 혼자 커버해야 하다 보니 꽤 지쳤다.
그렇게 오크를 정리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리처드가 소환수를 보내 다음 목적지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
이내 그 장소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코볼트'들이 마을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들은 낡은 석궁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화살이 벽면에 박히자 집에 들어간 주민들이 겁에 질려 엎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간다.'
친위대의 지속시간은 끝났기에, 새로운 흑마법을 시전했다.
<시몬 오리지널 - 드래고니안>
발락전 이후, 처음 사용해 보는 드래고니안 슈트.
다만 이번에는 강력한 검술이 필요한 게 아닌 방어전이기에, 뭐든지 베려고 드는 난폭한 '마누스'를 뺀 상태에서 구축했다.
"간다!"
코볼트들이 화살을 날렸고, 드래고니안 슈트가 작동한다.
우웅!
허공에 자줏빛 비늘이 펼쳐져 화살들을 튕겨내고 시몬은 무사히 앞으로 뛰어나갔다.
퍼억!
쩍!
혼돈으로 만든 슈트답게 강력했다. 일격 일격에 두개골이 깨지고 뇌수가 흩뿌려진다. 자줏빛 섬광을 남기며 번개처럼 활개 치는 시몬의 공세에 코볼트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렸다.
"지금이에요! 빠져나가세요!"
시몬이 외쳤다.
건물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기다렸다는 듯 도망쳤고, 그 모습을 본 코볼트 몇몇이 석궁을 주민들에게 겨누고 쐈지만.
티잉!
팅!
갑자기 허공에 그림처럼 펼쳐진 비늘들이 벌집 모양의 결계를 이루며 화살을 막아냈다.
'소환수의 기능이긴 해도, 내가 '풀고르'를 쓰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시몬이 씩 웃으며 코볼트에게 접근해 그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뒤편에서 또 다른 코볼트 무리들이 오고 있었다.
'이런, 끝도 없......!'
[수고했다 시몬.]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시퍼런 뭔가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쿠화아아아악!
언데드라기보다는, 푸른 금속으로 무장한 기갑 거인 같은 개체가 내려왔다. 그것이 손짓하자, 청색 섬광이 쏟아져 코볼트들을 깨끗이 제거하기 시작했다.
"시몬."
그 거인의 가슴뼈가 좌우로 벌어지더니, 리처드가 나타났다. 그가 바닥에 훌쩍 뛰어내렸다.
"훌륭한 본 아머구나. 드레이크로 만들었느냐?"
"아, 네! 고대종이에요."
시몬도 드레이크 투구를 위로 젖히며 얼굴을 드러냈다. 리처드가 호탕하게 웃었다.
"벌써 용의 마법까지 손을 대다니. 날 닮아 욕심은 많구나. 하하하!"
"아버지, 이럴 때가 아니에요! 저쪽에도!"
한 무리의 코볼트들이 반대편으로 우회해서 사람들을 덮치려 했다.
"두거라."
리처드는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주인이 없는 텅 빈 본 아머가 홀로 두 팔을 흔들며 튀어나갔다. 거대한 팔을 휘둘러 코볼트를 베어내고, 발차기까지 날렸다. 제대로 마투를 쓰는 모습이다.
리처드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본 아머가 알아서 싸워주고 있었다.
저건 엄연히 소환수의 전투능력과는 별개다. 인간의 무술을 쓰고 있다. 시몬이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저 기술은......!"
"본 아머를 내 몸처럼 다룰 수 있게 되면, 약간의 흑마법적 도움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지."
본 아머가 술사 네크로맨서의 경험, 마투는 물론 심지어 리처드의 흑마법까지 사용한다.
사실상 자신이 둘로 갈라지는 느낌이다.
시몬의 눈이 반짝였다.
"저도 배워보고 싶어요!"
"하하하! 어렵지 않지. 이 난리가 끝나면 찬찬히 가르쳐 주마."
리처드가 시몬을 돌아보았다.
"전투는 그만 됐다. 남은 것들은 내가 정리하마."
"전 더 싸울 수 있어요!"
"넌 다른 일을 해야 해. 안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리처드가 뻑적지근한 눈동자를 비비며 말을 이었다.
"레테가 근처 도시까지 도착한 것 같더구나. 바로 마차를 타고 레스힐로 들어올 것 같은데 영지 상황이 이래서 걱정이다. 네가 마중을 나가거라."
"아."
이웃 영지들의 날씨는 정상적이다. 지금 이 폭우는 레스힐 영지에만 내리고 있고, 레테는 이 상황을 잘 모를 가능성이 높다.
"네, 바로 갈게요!"
* * *
쏴아아아아아!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다.
레스힐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갈림길. 시몬은 나무 위에 올라가 레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레테를 만났을 때도 여기였네.'
에프넬도 방학이겠지만, 성녀 일 때문에 바빠서 이쪽에 넘어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로 방학이 되자마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시몬은 그녀가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다그닥 다그닥-
얼마나 기다렸을까.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마차를 타고 온다고 했었어.'
다행히 마차의 상태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시몬이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마부가 놀랐는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마차를 멈춰 세웠다.
"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레스힐 영주의 아들 시몬 폴렌티아입니다."
시몬은 소속을 밝힌 뒤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천 하나면 걷으면 레테가 보일 것이다.
'?'
그런데 갑자기 묘하게 긴장감이 올라왔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는 거지? 시몬은 흠흠 헛기침을 하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다음, 가볍게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그러곤 고개를 한 차례 끄덕여 결의를 다진 다음 마차 뒤편으로 갔다.
"레테, 나 시몬이야. 실례할...... 응?"
마차의 천을 걷는 순간, 시몬의 눈이 커졌다.
레테가 없었다.
안에는 나이 지긋한 노부부 둘뿐이었다. 서로 손을 잡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유?"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시몬이 화들짝 놀라며 천을 내렸다. 그러고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다른 마차로 오나 보다.'
"거기, 친구. 이리 와봐요."
마부가 앞에서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시몬이 마부 쪽으로 걸어갔다.
"바빠 죽겠는데 멈춰놓고 뭐 하는 겁니까? 탈 거야 말 거야?"
"네? 아아. 타려는 게 아니라......."
순간.
시몬의 눈이 커졌다.
이 목소리는?
"나 참."
마부가 검지를 올리더니 밀짚모자를 쓱 밀어 올렸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흘러내리며, 고운 이목구비가 드러난다.
그리고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
장난스러운 미소.
"탈 거면 돈을 내십쇼."
시몬의 동공이 흔들렸다.
"......레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