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28화
다그닥 다그닥-
쏟아지는 비를 뚫고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시몬과 레테는 바깥에 있는 마부 자리에 함께 타고 있었다. 시몬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옆을 보았다.
시장에서 산 듯한 짚이 삐쭉삐쭉 삐쳐나온 밀짚모자, 묘하게 구두약 냄새나는 가죽옷, 누가 봐도 마부들의 전형적인 복장이었지만, 당사자는 하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심지어 그녀는 마차도 꽤 잘 몰았다. 불규칙하게 솟아 있는 나무나 진흙탕을 여유롭게 잘 피해가고 있었다.
"아- 재밌었슴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옆을 보자, 마차 안에서는 들리지 않도록 방음 마법진을 펼친 레테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랑 만나기 전에, 잘 보이려고 머리 정리하면서 별짓 다 하는 모습 말이에요."
시몬의 얼굴이 민망함에 벌게졌고, 그녀가 큭큭 웃어댔다.
시몬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 차림은 뭐야? 이 마차는 다 뭐고. 뒤에 타고 있는 노인분들은?"
"아, 그분들 말임까."
레테가 반대쪽 손으로 순백의 머리칼을 베베 꼬며 설명했다.
국경을 넘고, 텔레포트 마법진을 연달아 타서, 레스힐의 이웃 영지인 '호브'에 도착했다.
이제 호브에서 마차를 잡아타고 산골짜기인 레스힐로 들어와야 했으나.
-지금 레스힐은 물난리 때문에 못 가.
교통이 막혔다. 레테가 아무리 요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마부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이런 날씨에 마차로 산맥을 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마침 레테 말고도 레스힐에 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 뒤에 타고 있는 노인 부부였다.
레스힐에 사는 그들은 생필품을 사러 호브에 내려왔다가, 레스힐이 물난리가 나는 바람에 이 도시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여비도 많이 챙겨오지 않은 터라 여관에 더 묵을 수도 없었다. 당장 내일 밤부터 꼼짝없이 노숙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밤바람은 차갑고 비도 내렸다.
그들의 사정을 들은 레테는.
"그냥 제가 마차 한 대를 샀슴다."
시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차를 샀다고? 통째로?"
"이래 봬도 성녀란 직업이 돈은 많이 벌 거든요. 안나 선생님이 걱정되기도 하고, 저기 노인분들 사정도 딱해서 제가 운전해서 가기로 했슴다."
그녀가 밀짚모자 챙을 붙잡은 채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았다.
"기분 낼 겸 옷도 샀어요. 괜찮죠?"
마부용 가죽옷은 몸에 착 달라붙는 디자인이었다. 시몬은 애써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했다.
"아, 아니. 그보다 암흑연합에 놀러 와도 돼? 방학에도 성녀들은 엄청 바쁘다면서."
"흐흐."
레테의 눈이 반달로 휘었다.
"저 가출했어요. 재워주세요, 시몬."
"???"
* * *
같은 시각.
신성연방.
"성녀님께서 사라지셨다!"
"숨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
신성연방의 팔라딘들이 일대에 쫙 퍼져서 주위를 쥐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를 본 적 있소?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을 텐데."
"어, 없습니다."
"집을 수색해 봐야겠소."
혹시 성녀의 권한으로 자신을 숨겨달라는 요청을 했을지도 모르니, 팔라딘들은 주거지까지 닥치는 대로 살펴보고 있었다.
'이단심문에 걸린 사람이 도주라도 했나?'
'모르겠군.'
주민들은 얼어붙은 얼굴로 수사에 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수사광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여인이 있었다.
"적당히 수색하다가 철수하도록 하세요."
눈을 살며시 감고 있는 바다색 머리카락의 여성.
신해의 성녀, 이스라필이었다.
팔라딘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하, 하오나 이대로 레테 성녀님을 찾지 못하면......."
"어디에 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답니다."
이스라필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팔라딘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가 바로......!"
"지금은 그렇게 몰아붙이는 것보단, 그 아이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직 성녀가 된 지 1년도 채 안 된 아이잖아요?"
그녀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무사히만 돌아오렴, 레테."
* * *
비 내리는 오후.
시몬은 옆자리에서 레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성녀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온갖 인간군상을 다 겪을 수 있슴다."
레테가 고삐를 흔들며 조금 열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라는 이름을 제대로 존중해 주는 건 백성들과 민초들뿐이에요. 하지만 내가 상대하는 건 주로 일반 백성들보단 고위 사제들이죠."
그녀의 얼굴이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 인간들이 성녀를 대하는 태도는 단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어요. 귀하고 말 잘 듣는 예쁜 인형, 혹은 저급한 욕망의 분출구."
"저급한...... 뭐?"
"X발. 별의별 미친 새끼들이 다 있어요. 아우, 아직도 소름 돋네. 내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뭐 해? 날 쳐다보는 눈은 미친 변태 아저씨들의 시선인데!"
잠시 레테가 입에 걸레를 무는 시간이 있었다.
'......힘들긴 하겠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딸'인 성녀를 끌어안는 것은, 데바 여신을 안는 것과 같고 그것이 나의 믿음이라며 신성력을 펑펑 폭발시키는 남자도 있었다고 한다.
신성력의 근원인 '믿음'이 어떻게 발현하는 지는 인간마다 모두 다르니 일어난 일들이었다. 신성연방에서는 숨기고 있지만, 꽤 큰 사회적 트러블의 원인이기도 했다.
"개 X같은 새끼들임다 진짜!"
그녀가 쾅쾅 애꿎은 마차를 걷어찼다. 시몬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아무리 연방 주교라고 해도 신분이 다르잖아. 반신인 성녀 앞에서 그렇게 대해도 돼?"
"그게 그 돼지들의 가장 경멸스러운 점이에요."
그녀가 미간을 모았다.
"경력이 쌓였거나 위대한 커리어가 있는 성녀님들, 특히 이스라필 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눈도 못 마주치는 겁쟁이들이 만만한 내 앞에서만 그 지랄을 한다니까요! 아, 그래? 경력 3년도 못 채운 성녀는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 이거지? 내가 함부로 못 할 걸 아니까 더 그래!"
레테가 분을 못 이기고 다리를 방방 흔드는데, 갑자기 마차의 커튼이 걷히며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수?"
목소리는 차단되지만, 발을 구르는 소리는 안까지 들리는 모양이었다.
화들짝 놀란 레테가 얼른 동작을 멈추고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해요. 노면이 거치네요."
그러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인이 들어갔고, 레테는 한숨을 쉬며 다시 방음 마법진을 켰다. 시몬이 웃음 지으며 말했다
"성녀일 잘할 것 같은데, 의외네."
"너 뒤진다."
그녀의 미간이 가늘어지며 으르릉거렸다. 시몬은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뭐, 그런 일들이 한두 번 있던 것도 아니고. 그 할배들이 변태 같은 눈으로 봐도 내 몸을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가 팍팍 누적되어가고 있긴 했지만 좋게좋게 넘어가기로 했단 말임다."
"응."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싸해졌다.
"그 쌓인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지는 사태가 있었슴다."
늘 있던 지방 대신전 방문에서, 주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때였다.
너무 지쳐 있던 레테는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손등을 내밀었고, 늙은 주교는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혀."
시몬은 그 단어 하나에 소름이 쭉 돋는 걸 느꼈다.
"손등이 축축한 검다. 뭔가 싶어서 내려다보니까, 그 미친 늙다리 새끼가 더러운 혀를 내민 채 음침하게 웃고 있는 검다."
레테가 말고삐를 시몬 쪽으로 넘기고 벌떡 일어났다. 시몬이 화들짝 놀라며 말고삐를 잡아 마차 운전을 대신했다.
"X발, 진짜 그 순간 쌓여 있는 모든 게 폭발했슴다. 바로 그 새끼의 인중을 팔꿈치로 까고."
그녀가 직접 동작으로 팔꿈치로 가격하는 모습을 재현했다.
"이렇게. 구두굽으로 손등 밟고, 발차기로 안면이 뭉개질 만큼 후리고, 그다음 그 새끼 턱을 붙잡아 세워서."
그녀가 휙 하고 검지를 위에서 아래를 그었다.
"혀를 뽑아내 잘랐슴다."
"......아."
알 만한 사태였다.
"자기 살겠다고 스스로 신성마법 거는 꼴이 얼마나 웃기던지. 재생도 못 하게 잘린 혀를 밟아서 잘게 다진 다음, 신전에서 탈출했슴다. 팔라딘이랑 경비들이 쫓아오는 거 다 재치고 부지런히 달려서 국경을 넘었고."
레테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국경 너머 레스힐에 와 있는 거죠."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
그녀가 다시 털썩 자리에 앉아, 시몬의 말고삐를 빼앗아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짠, 가출소녀가 됐슴다. 신성연방에서도 암흑연합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몸이 됐네요."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생각은 있어?"
레테가 턱을 괴었다.
"나도 잘 모르겠슴다."
"주교를 해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먼저 모독죄로 잘못한 건 사실이잖아. 성녀니까 벌을 받을 것 같진 않은데."
"벌 받겠죠. 내가 성녀니까 교황 성하가 직접 징계를 내릴 검다. 확실한 건 뭐, 학생 때처럼 기도문 천 번 읊기로 용서받을 수 있는 사안은 아니란 거."
그녀가 고개를 젖혔다.
"솔직히 지쳤슴다. 안나 선생님처럼 성녀 자리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고, 아, 그냥 그 일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싫네요."
레테는 성녀가 되는 것에 그렇게 큰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륙의 절반, 신성연방에서 태어나는 거의 모든 여자아이들의 꿈이 성녀였고 레테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심지어 그녀는 백마법에 재능도 있었고, 믿음에도 자신이 있었다. 에프넬 수석이 된 이상 성녀를 목표로 더 노력했고, 그렇게 정말로 성녀가 됐다.
하지만 레테도 성녀란 신분이 이렇게 힘들고 괴로울 줄은 몰랐다. 성녀란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라고만 했을 뿐, 누구도 주교들에게 성희롱이나 당할 거란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일단 집에 돌아가서 좀 쉬자."
시몬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방학 동안 레스힐에서 쉬면서 어떻게 할지 차분히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레테가 눈을 감았다.
"다른 건 둘째치고, 일단 안나 선생님이 너무 그립네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북쪽 산맥의 대피소.
시몬과 레테가 마차에서 내려 노인들을 내려주었다.
"아버님, 어머님!"
"할머니!"
대피소의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시몬이 가족들의 재회하는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레테가 앞으로 걸어와 마차의 짐칸을 팡팡 때렸다.
"폭우라 식량이 부족할 것 같아서 조금 가져왔어요.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아이구, 이렇게 고마울 데가!"
"더, 덕분에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가서 짐칸에서 식량들을 내렸다. 시몬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레테가 눈을 찡긋했다.
"센스 있죠?"
"......아, 응. 고마워."
레테가 뒷짐을 지며 주위를 구경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언니! 할머니를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고마워!"
"안녕~"
레테가 다정하게 웃으며 쪼그려 앉아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갈 수 없을 만큼 지반이 엉망이 된 상태기에, 마차는 영지민들에게 잠시 맡겨두고 내려가기로 했다.
"안나 선생님을 보기 전에 잠시 올라가죠."
"어딜?"
"레스힐에서 가장 높은 곳."
레테의 손끝으로 위를 향했다.
"내가 비 그치게 해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