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33화
번영한 이웃 영지 호브.
이곳은 믿기 힘들 만큼 처참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시몬과 레테는 다소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거닐었다.
이미 한바탕 큰 전쟁이 벌어진 것 같았다. 건물이란 건물은 모두 폭삭 주저앉아 있고,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인다. 죽은 말이나 가축이 잿더미에 파묻혀 있었으며, 폭격이 떨어진 듯 곳곳에 커다란 크레이터들이 파여 있다.
차마 표현하기 힘든 참상들도 많았다. 묵묵히 걸어가던 레테는 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
호브의 언덕 위로 수십 개의 붉은 십자가가 드리워져 있다. 그곳에는 죽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시체와 해골들이 매달려 있다.
네크로맨서들, 그리고 그들에게 조력한 주민들이거나, 그냥 이곳에 사는 선량한 주민들의 시체였다.
"괜찮아?"
시몬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낮추었다. 시체에 대한 트라우마인지, 혹은 신성연방이 벌인 참극에 대한 충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외면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들어 가만히 십자가를 응시했다.
"난 지금까지, 너무 쉽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슴다."
레테가 폐허가 된 마을을 눈에 담았다.
"전쟁이 터지면 터지는 대로 싸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전사들을 이끌고 로크섬으로 들어가서 죽음의 마녀를 축출하고, 암흑연합의 주민들을 해방시키면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모든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주민들의 참극과 비극은 철저히 묻힐 뿐이다.
에프넬에서는 이런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그녀는 눈발처럼 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이게 지나간 과거고,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서요.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요."
평화의 시대에 태어난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
그러나 불과 22년 전에는 이런 참상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시몬이 단호하게 말했다.
"결사가 과거를 바꾸고, 아버지와 엄마의 사이를 갈라놓게 만든다면 말야."
"네."
고개를 끄덕인 레테가 먼저 발을 뗐다.
"어서 마차를 찾으러 가죠."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걸은 지 30분 만에 처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 정확히는 노숙자 한 명을 발견했다.
그에게 마차를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말없이 앞을 가리켰다.
그렇게 노숙자가 알려준 방향으로 계속 걷자, 그나마 포격에 덜 파괴된 호브의 도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기 다 있었구나!'
다들 폐허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할 줄 알았는데, 호브의 주민들은 꿋꿋하고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무너질 듯 위태로운 잡화점과 식당 건물에는 '영업' 팻말이 걸려 있었고, 상인들은 길거리에 수레를 끌고 나와 사람들과 흥정하며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었다. 한 신사가 액자에 든 값비싸 보이는 그림을 빵 한 조각과 바꾸는 모습이 보인다.
시끌시끌하고, 웃음소리도 간혹 울려 퍼진다.
뒤를 돌아보면 새까만 폐허였지만, 사람들은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가고 있었다. 시몬은 과거로 넘어온 뒤,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살던 시기에는 다시 호브가 번화하게 됐나 봐."
"네, 그런가 보네요."
레테도 잔잔히 웃었다.
간혹 거리에 마차가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마부들이 영업 중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물어물어 마부들의 휴식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마부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닥치는 대로 붙잡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기로 가고 싶은데요."
레테가 지도로 전 중립지대, 현 바힐라 영지를 짚으며 말했다. 지도를 본 마부의 표정이 새까맣게 굳었다.
"......말도 안 돼. 아가씨, 이 지역은 지금 전쟁터요."
"전쟁터요?"
"키젠과 에프넬이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전선 중 하나라고. 목숨이 천 개라도 모자라."
마부들은 하나같이 학을 떼며 거절했다.
이제 이런 거절이 익숙한 시몬은 가방 속에서 짤랑거리는 돈주머니를 보였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글쎄,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전쟁 중이라 화폐의 가치는 극도로 떨어져 있는 상황. 화폐는 그냥 번쩍이는 금속에 불과했다.
"그냥 마차를 사버리는 게 어떻슴까."
레테가 이번에도 같은 아이디어를 냈지만,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중립지대. 아니, 바힐라로 가는 동안 전장을 몇 번이나 접할지 몰라. 전쟁을 피해갈 수 있도록 제대로 길을 아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
적어도 바힐라에 도착할 때까진 마부의 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했다.
두 사람은 마부들에게 열심히 묻고 다녔다.
그때 마침.
"오늘 일해서 뭐라도 사 올 테니 기다려 줘."
무너진 집에서 한 마부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벽 너머로 다섯 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아빠를 배웅하는 모습이 보인다.
마부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는데, 시몬이 앞으로 샥 나왔다.
"어이쿠, 깜짝이야."
"바힐라 영지로 가고 싶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바힐라라면 한참 전쟁 중인 곳 아니오. 그리고 돈은......."
그때 레테가 걸어왔다.
"돈이 별로라면 이런 건 어때요?"
그녀가 자루를 들어 올렸다. 자루를 살펴본 마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이거 대추야자요?"
대추야자를 비롯한 각종 열매들이 한 포대에 가득 들어 있었다. 사실 안나가 좋아하는 과일들이라 특산품 겸해서 챙겼는데,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 정도 양이라면 두 달은 거뜬하리라.
"절반은 지금 드리고, 나머지 절반은 도착해서 드릴게요. 어때요?"
결국 마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잿빛심판 등으로 작물이 죽고 열매도 맘 놓고 따먹지 못하는 지금, 음식의 가치는 천금보다 더 귀했으니까.
"오늘 바로 출발하면 되겠소?"
* * *
마차를 구한 이후, 이제는 인내와 기다림의 싸움이었다.
시몬과 레테는 마차 안에서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하늘에서 악몽처럼 날아다니는 불덩이와 새하얀 벼락이 익숙해졌다.
길거리에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눈에 익었고, 곳곳에 퍼질러 있는 병사들의 검문도 무덤덤해졌다.
그렇게 최단 거리로 가로질러, 두 사람은 마침내 미래엔 중립지대라 불리는 바힐라 영지에 진입했다.
"......여기가 진짜 내가 아는 중립지대 맞아?"
바힐라는 무척 울창한 정글이었다. 시몬이 중립지대 하면 떠오르는 사막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레테가 손가락을 휘휘 흔들며 설명했다.
"우리가 살던 시대에는 '중립지대'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과거 바힐라는 20개의 영지로 나누어진 지역이었다고 함다. 식생이 발달한 대정글이었죠."
"그런데 어쩌다......."
"신성연방과 암흑연합 접경지역이라 전쟁이 빈번한 게 문제였슴다."
레테는 턱을 괴며 말을 늘어놓았다.
"흑마법으로 오염된 지반이나, 백마법으로 과하게 정화된 지반은 시간이 지나면 지력이 회복된다고 함다. 그런데 문제는 흑마법이 쏴졌다가, 백마법이 쏴졌다가 하는 게 반복되는 거죠. 땅이 아예 죽어버려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곳이 된다고 하네요."
그렇게 점점 사막화가 가속되며, 바힐라 영지에 지내던 사람들은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고, 바힐라 영지의 영향력과 힘도 크게 떨어져 갔다.
이어지는 평화의 시대 협약 이후, 암흑연합과 신성연방은 국경을 만들기 위해 쓸모없어진 땅인 바힐라 영지를 일종의 국경처럼 두기로 했다.
그렇게 두 세력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땅, 지금의 '중립지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중립지대란 개념은 평화의 시대가 들어온 이후 널리 퍼진 개념이었다.
아무튼 바힐라 영지에 들어오니, 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폭음이 자주 울려 퍼지고, 곳곳에서 전흔도 쉽게 보였다.
겁에질린 마부는 결국 더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고, 그 대신 마차를 통으로 내어주기로 했다. 본인은 근처에서 말을 사서 호브로 돌아간다고 밝혔다.
그렇게 시몬과 레테, 단둘이서 마차를 타고 여행을 계속했다.
레테는 레스힐에 올라올 때의 그 마부 복장을 입고 말을 몰았다. 시몬은 옆에서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프티스 님 말을 들어보니, 원래는 나 혼자 과거에 올 예정이었잖아."
시몬이 빙긋 웃었다.
"네가 같이 와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어, 레테."
"흥."
레테는 콧방귀를 뀌며 미소 지었다.
"착각하지 마십쇼. 꼭 당신 때문에 온 건 아님다. 이건 안나 선생님의 문제니까요."
"응, 그렇지."
"아! 혹시 안나 선생님이 에프넬 교복 입은 거 본 적 있슴까? 에프넬 도서관의 학생 명단에 사진이 있거든요!"
갑자기 급흥분한 그녀가 두 손을 제 뺨에 대고 짧은 비명을 질러댔다.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아름답고 귀여우심다!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아으. 10대의 안나 선생님을 실물로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시몬은 잠시 머릿속으로, 레테가 매번 입던 그 에프넬 교복을 안나가 입은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어, 음."
시몬이 멋쩍게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뭔가 잘 상상이 안 되는데."
"아으! 이건 직접 봐야 함다."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던 그녀가, 갑자기 차갑게 식은 얼굴로 턱을 괴었다.
"하아, 그렇게 예쁘고 고귀하고 능력도 좋은 안나 선생님을 채간 남자가 하필이면......."
"우리 아버지가 뭐 어때서!"
"바람둥이 네크로맨서잖슴까."
그 말에는 반박할 길이 없었다.
레테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운명도 차암 기구하지. 세계 평화를 위해 그 두 사람이 이어져야만 한다니."
"......너 진짜 나 도와주러 온 거 맞지?"
"내 사적인 감정은 둘째치고, 일은 일대로 완벽하게 할 테니 걱정 마십쇼."
그녀가 말고삐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저 안나 선생님을 어떻게 잘 구슬려서 리처드와 만나게 할 수 있을지, 그게 고민될 뿐임다. 전 솔직히 리처드의 매력이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어요."
안나는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들을 버리고 리처드를 따라갔다.
물론 미래에는 한적한 레스힐에서 시몬을 낳고 알콩달콩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그거야 미래의 일 아닌가.
그 당시의 어린 안나가 모든 걸 포기하고 네크로맨서인 리처드를 따라나설 만한 동기와 이유가 무엇인지, 레테의 입장에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끙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겨있던 레테가 시몬을 보았다.
"젊은 시절의 당신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슴까."
"음."
리처드나 안나나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었다.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시몬은 그나마 아버지에 대해 주워들은 이야기를 모두 떠올렸다.
어릴 때 폴렌티아 가문과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리로, 본명을 버리고 요나라는 이름으로 활동.
피어에게 선택받은 거대한 재능.
키젠 2학년 자퇴.
그리고 군단장으로서 빛나는 커리어를 이룩하고, 암흑연합에도 무수히 공헌했다.
그러다 위기에 빠진 안나를 구하느라 배신의 군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대륙의 역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사생활에는 문제가 많았던 것 같긴 해.'
리처드에 가장 많은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
에르제베트와 북부대공 진.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놀기 좋아하는 막장 바람둥이.'
그렇게 귀결되는 결론에 시몬은 붕붕 고개를 내저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훌륭하신 군단장님이야."
"네, 네, 그러시겠죠."
그렇게 중얼거리던 레테가 흠칫하더니 하늘을 보았다.
"제길, 꽉 잡으십쇼."
"응?"
그녀가 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시몬도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아!'
하늘에서 시커먼 유성세례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