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38화
"오호."
리처드는 감탄사를 중얼거렸지만, 얼굴엔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이 깔려 있었다.
봉사활동이라는 주제를 먼저 꺼내면 백전백패일 것 같았다. 대신 시몬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넘겼다.
"이게 뭐...... 음?"
사진을 보는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짧은 바다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발끈하며 화를 내는 사진이었다.
사실 시몬은 사실 안나의 사진을 쓰려고 했지만, 미리 안나의 얼굴을 보이면 첫 만남이 극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레테의 의견에 따랐다.
이 사진은 단지 리처드를 끌어내기 위한 당근일 뿐이다.
"이 여성분이 봉사활동 하러 자주 나온대요. 같이 가실래요?"
스륵.
리처드는 조용히 시몬의 목에 팔을 둘렀다.
"기특한데? 지금부터 우리는 피가 섞인 형제다, 브라더."
시몬이 쓰게 웃었다.
'피는 섞이긴 섞였는데요.'
* * *
날짜가 맞춰졌다.
그사이 시몬과 레테는 중립지대 내에서 봉사활동을 할 만한 장소를 부지런히 찾아다녔고, 조건이 괜찮은 곳을 하나 발견했다.
바힐라 영지 외곽에 위치한 고아 보호소.
본래는 영지 내의 버려진 고아들을 돌보는 보호시설이었지만, 이번 전쟁으로 전쟁고아들이 너무 많이 생겨나 보호소 운영이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래서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봉사활동과 금전적 지원에 의존한다는 듯 했다.
아이들이 있는 시설이기에, 신성연방과 암흑연합 양측 모두 폭격은 엄두도 못 낼 테니 안전도 보장된다.
-이만한 장소가 없네요.
-응, 내일 어떻게든 두 사람을 데려오자.
그렇게 리처드와 안나의 사랑에 빠트리기 대작전이 시작됐다.
우선 레테가 안나를 데리고 오는 건 수월했다. 안나 본인도 봉사활동과 전쟁고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오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강했다.
그리고 의외로 시몬도 리처드를 데려오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사고방식이 단순했다. 레테가 보내준 사진에 나온 여자가 예쁘니까 달리 질질 끌 것도 없이 가보자고 한 것.
그렇게, 두 사람은 봉사활동 장소인 고아 보호소에 도착하게 됐다.
'특별한 건 없네.
언덕 위에 커다란 건물 하나가 지어져 있었고,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벌판이 쭉 펼쳐져 있었다. 우물도 있고 근처에는 강도 흘렀다.
"여김다!"
건물 뒤편에서, 전에 입은 마부복 차림의 레테가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몬은 반가움에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
"수고했어, 레테! 엄마는 오셨어?"
"네, 도착했슴다. 지금 마차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에요. 리처드는요?"
"따라오셨어. 너무 쉽게."
레테가 큭큭거리며 입을 가렸다.
"이스라필 님에겐 미안하지만 뭐, 어쩌겠슴까."
두 사람은 바로 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저 사람 뭐 함까?"
레테가 차가운 눈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 잠깐을 못 참고 리처드가 한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다. 딱 봐도 멋진 포즈를 잡고 벽에 손을 얹은 채 빙글빙글 웃는 꼴을 보니 그림이 그려진다.
'미치겠네, 진짜!'
시몬이 식겁하며 달려갔다.
안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랑 이어지면 곤란했다.
짜악!
그런데 경쾌한 뺨 소리와 함께 여자가 씩씩거리며 떠났다. 시몬이 뒤따라 달려오며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리처드가 얻어맞은 뺨을 매만지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꼬시려고 했더니, 이 고아원에 자기 자식이 있는 애 엄마더라고."
"......요나."
이 인간은 지금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 갱생할 수 있을지부터가 걱정이었다.
* * *
"오늘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도와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고아원 원장은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60대 정도의 여성이었다. 온화한 듯하면서도 딱 부러지는 말투와 직설적인 화술이 인상적이다.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봉사자들은 그녀의 앞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아이들이 아직 자고 있을 때 서둘러야 합니다. 우선 아침식사 준비부터 하려는데, 역할을 나눠서......."
성의나 에프넬 교복이 아닌, 오랜만에 일상복을 입고 얼굴을 깊게 가린 모자를 쓴 안나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설명을 듣고 있었다.
반면 제일 끝자리에 서 있는 리처드는 하품을 쩍쩍하면서 피곤한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시몬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몇 번이고 찔렀다.
"그럼, 이제 시작하시죠."
시몬과 레테는 잽싸게 리처드와 안나의 등을 떠밀어 장작 창고로 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쪼개진 장작을 주방으로 나르는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고, 같이 일하는 사람도 4명밖에 안 된다.
'리처드가 안나 선생님의 장작을 나눠 들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도 주고받을 수 있는 최고의 코스임다!'
'잘될까?'
남녀를 맺어주는 일은 처음이기도 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해서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구경했다.
그런데 장작을 옮겨야 할 리처드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피곤한지 연신 하품을 하면서 근처 풀밭에 퍼질러 앉았다.
"형씨, 좀 거들지?"
리처드가 노는 모습이 거슬렸는지 한 남성 봉사자가 그렇게 말했다. 이에 리처드가 눈을 치켜떴다.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냐?"
"그래, 너 인마."
리처드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시몬과 레테가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또 사고 치는 거 아냐?
그때 리처드가 남성 봉사자가 들고 있던 장작을 빼앗아 들었다.
"좋아, 이건 내가 옮겨놓을게. 대신."
뻐억!
리처드가 그를 걷어찼다. 남성 봉사자의 몸이 쌓여 있던 장작더미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장작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넌 새 걸로 가져와."
리처드가 히죽 웃었다. 시몬이 다급히 나오려는 그때.
"무슨 일 있으신가요? 시끄러운 소리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안나가 들어왔다.
안나는 장작더미에 쓰러진 봉사자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달려갔다. 리처드는 모른 척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
"몸은 괜찮으세요?"
"아, 예 뭐. 이쯤이야."
봉사자가 안나의 얼굴을 보고는 뺨을 붉혔다. 안나는 고개를 돌려 리처드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밀었죠? 사과하시지 않는 건가요?"
"조용히 있는 사람한테 먼저 시비를 건 건 저쪽인데, 무슨 사과요."
그렇게 말한 리처드는 빠르게 멀어져 갔다. 시몬이 식겁하며 그에게 뛰어 들어왔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 또 잔소리."
결국 시몬은 리처드의 손을 붙잡고 달려가 억지로라도 봉사자에게 사과시켜야 했다.
'우리 아빠를 데려왔는데, 왜 내가 아빠가 된 기분이지?'
* * *
첫인상이 조금 애매해졌다.
장작을 옮기는 중에 리처드와 안나가 마주쳐도 별다른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일을 시켜도 마찬가지였다.
안나는 순수하게 고아들을 위해 일하는 데 집중했고.
리처드는 딴짓을 하다가 시몬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봐, 고아원에 자주 온다는 그 파란 머리 여자는?"
시몬은 뿌루퉁하게 답했다.
"자주 온다고 했지 매일같이 온다고는 안 했는데요."
"......쯧."
리처드는 흥미가 팍 식었는지, 그 이후로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땡땡이를 피우기 바빴다.
비상사태다.
시몬과 레테는 긴급 회의에 들어갔고, 보다 못한 레테가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주방으로 끌고 가죠!
결국 고아원 원장에게 요청해서 리처드와 안나를 주방에 집어넣었다. 요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질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 두 사람은 조용히 식재료를 준비했다.
"......."
다소 시큰둥하던 리처드의 시선이 그제야 안나에게로 향했다.
옷태가 드러나지 않는 넓은 상의와 긴 롱스커트. 눌러쓴 모자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아름다운 얼굴.
이제야 제대로 안나를 본 건지 리처드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됐어!'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시몬이 주먹을 꾹 쥐며 쾌재를 불렀다.
'한눈에 반하신 게 틀림없어!'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안나 선생님을 보고 반응이 없으면 남자도 아니죠. 이제 리처드가 나서주길 바라야겠네요.'
과연, 타깃을 정하자마자 리처드가 나섰다.
"요리, 잘하십니까?"
"아."
당근을 썰고 있던 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일 때문에 눈빛에는 경계심이 어려있었지만, 시몬이 리처드에게 사과를 시킨 뒤로 조금은 목소리가 나아져 있었다.
"잘하진 못하지만...... 이 기회에 열심히 배워보려고요."
리처드가 또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멈칫한다.
멀리서 구경하고 있는 시몬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느라 애써야 했다. 속으로 열심히 아버지 파이팅을 외쳤다.
"배우려는 건 좋은 마음가짐이죠."
리처드가 안나의 뒤로 들어왔다.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그러고는 뒤에서 끌어안듯 하며 조리칼을 쥔 안나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초면에 뭔......! 개 싫어!'
레테가 질색하듯 제 어깨를 붙들었다.
실례되는 상황이었지만 원래 타고난 외모와 분위기가 뛰어난 리처드는, 흔히 말해 뭘 해도 먹히는 인상이었다.
"자, 이렇게 사선으로 천천히."
리처드와 안나는 함께 당근을 썰었다. 리처드는 차분하고 남자다운 목소리를 내면서, 그녀가 자신의 살냄새를 맡게 하고, 자신의 손에 난 울퉁불퉁한 혈관을 보게 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떤 일로 왔나.
평소 자주 다니냐.
안나도 순순히 답해주었다.
'이 여자, 손에 힘이 빠졌군, 다 넘어왔어.'
여기까지 오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까탈스럽거나 번거롭게 구는 여자도 결국은 넘어왔다. 리처드는 승리를 직감했으나.
"정말 죄송하지만-"
안나가 무안한 웃음을 지었다.
"저보다 못 자르시네요."
"음?"
안나가 썬 당근 너머로, 두 사람이 함께 썬 당근들은 규격도 크기도 엉망진창이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저 혼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나는 그렇게 리처드를 밀어내고 혼자 당근을 썰었다. 리처드는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로 병풍처럼 서 있었다.
'하아.'
시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어쩐지 통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봉사자 두 분!"
그때 뒤에서 고아원 원장이 불쑥 튀어나왔다. 시몬과 레테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네, 네!"
"벌써부터 놀고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진지하게 일할 생각이 없다면, 나가주시는 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좋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시몬과 레테는 하는 수 없이 후닥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가 음식 준비를 했다.
"이거 과일칼 가져갈게요."
"응."
선반에서 배추를 꺼내 든 시몬은 슬쩍 곁눈질로 리처드와 안나 쪽을 바라보았다.
"......."
"......."
어색했다.
미친 듯이 어색했다.
작업이 실패한 뒤로 리처드는 멍해 보였고, 안나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때 안나가 빙긋 웃으며 리처드를 등지고 시몬과 레테를 보았다.
"어머, 두 사람 친해 보이네요."
안나는 그렇게 말하며 레테에게 슬쩍 귓속말했다.
"그때 물어봤던 남자 이야기가 설마 이분 때문에?"
"네? 아니에요!"
당신들 때문이라고!
오히려 안나가 시몬과 레테를 밀어주고 있는 지경이었다. 시몬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안나가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돌아간 뒤, 시몬이 조용히 레테에게 물었다.
"뭔가 더 효과적인 방법 없을까?"
"있슴다."
레테가 이를 악물었다.
"아이들이 나올 때 승부를 내죠."
"이봐."
그때 리처드가 상처 입은 사자 같은 표정으로 시몬에게 다가왔다.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네?"
"잠깐 밖에서 이야기 좀 하지."
* * *
시몬은 리처드를 따라 고아원 건물 뒤편에 왔다. 리처드는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후우우우-
흰 연기를 뿜으며 깊고 가라앉은 눈동자로 숲을 바라보는 모습 자체가 그림 같았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진짜 잘생기시긴 했네.'
왜 여자들이 리처드가 바람둥이인 걸 알면서 혹하는 건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내 그가 파이프 담배를 손가락에 끼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마음먹고 작업했는데 실패한 건 또 처음이군."
그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말하는 것처럼 인상을 구기며 파이프를 뻐끔거렸다.
"스타트는 좀 노골적이긴 했지만, 그 뒤로 분위기는 좋았고 멘트도 깔끔하게 들어갔어. 그런데 그 여자는 완전히 목석이야.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뭐라도 낌새가 느껴져야 나도 방향을 잡는데 그냥 반응이 오질 않는단 말이야."
"......하하."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리처드가 문득 시몬을 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시몬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을 가리켰다.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건가? 그것도 연애에 대해?
"뭘, 부담 가지진 마."
리처드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상대가 평범하지 않다면, 그 해결책도 평범하지 않은 방향에서 생각해 보려는 거니까."
'칭찬이야, 욕이야.'
시몬이 쓰게 웃었다.
아무튼 리처드도 만회할 생각이 있는 듯하니, 시몬의 입장에서는 큰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자,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어쩌면 과거로 넘어온 뒤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미래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다 같이 세 명이서 레스힐에서 살기 위해서라도.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