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42화
그날 저녁.
바힐라 전선 신성연방 본부.
이스라필은 현장에서 직접 서신을 작성해 신수 비둘기에 매달아 보냈다. 그것은 곧바로 바힐라 전선 본부에 도착했다.
"대주교님!"
서신은 즉시 전선 총사령관인 대주교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봉인을 풀고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누가 보낸 서신입니까?"
같은 방 안에 있던 남자가 턱을 괴며 물었다. 대주교는 묘한 표정으로 눈가를 좁혔다.
"이스라필이란 이름의 장교가 보냈군."
"들어본 적 있습니다. 기적의 성녀와 함께 다니는 그 책략가군요. 무슨 일이 있답니까?"
"어디 보자."
대주교는 천천히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성녀님에 대한 염려로 서신을? 허허!"
"......?"
"중앙의 보고 없이 명령지 무단이탈. 이탈지에서 남성과의 밀회. 이 모든 건 안나 성녀의 잘못이 아니라, 그녀가 시종으로 거두어들인 레나란 인물의 꼬드김 때문? 하하하하!"
대주교는 손녀들 재롱이라도 보는 듯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있던 남자도 덩달아 웃음 지었다.
"재미있는 보고군요."
"안나 성녀님께 이런 면모도 있었군, 그래! 그동안 너무 시키는 일만 기계처럼 하셔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소."
그렇게 말한 대주교가 잠시 어두워진 얼굴로 턱수염을 쓸었다.
"우리 딸내미도 그 망할 놈이랑......."
"따님 이야기 좀 그만하시죠."
남자가 빠르게 차단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일의 경중을 떠나 장교가 정식으로 올린 보고이고, 만민에 모범을 보여야 할 성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령부에서는 걸맞은 조처를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됐소.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소."
대주교가 손을 휘저었다.
"1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긴 전쟁이오. 일개 평신도에서 고위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만과 피로감이 한계에 달했소. 너무 조이기만 하면 신도들이 숨을 못 쉬어."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을 보내 성녀님을 모셔오긴 하시오. 다만 추궁은 할 필요 없소. 나중에 내가 직접 내려가서 성녀님과 면담하겠소. 잘 타일러 말하면 알아들으실 거요."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대주교는 본인 재량으로 적당히 안나와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
대주교와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와 통신 수정구를 들었다.
"여기는 바힐라 연방 본부. 응답하라."
치직!
잡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정구에서 흐릿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변수가 발생했다. 예상하지 못한 지역에서 요나와 안나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가 원래대로 돌아오려 하고 있다."
치직!
-곤란하군. 네프티스가 보낸 사람 때문인가?
"원인은 모른다. 다만 정황에 따르면 '레나'라는 자가 의심스럽다."
-알겠다. 내가 직접 가볼 테니 대기하도록.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결사를 위해."
-결사를 위해.
* * *
시간이 지나, 리처드와 안나는 바다를 넘어 고아원에 돌아왔다.
입맞춤 이후, 어쩐지 데면데면해진 두 사람이었다.
특히 안나는 부끄러워서 리처드의 눈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죽겠군.'
한편, 리처드는 마나 고갈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정령마법은 기사의 '오러'나 마법사의 '순수마법'처럼 대륙에서 점점 사장되어가는 기술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칠흑이나 신성에 비해 효율이 나쁘기 때문.
정령룡 두 마리로 바다까지 다녀오는데, 군단장이자 암흑연합 최고 재능인 요나조차 상당한 내력을 소모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즐거웠어요."
눈앞에 있는 그녀의 미소를 위해서라면 지금 마나가 문제겠는가.
목숨도 기꺼이 내던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리처드는 생각했다.
"불편하신 점은 없었나요?"
"네!"
"다행입니다. 자, 원장이 눈치채기 전에 우리도 숙소로 돌아가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란히 정원을 걸었다.
숙소까지는 겨우 10분의 거리.
하지만 이 짧은 정원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리처드는 생각했다.
"리처드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문득 안나가 그렇게 말했다.
"제 의지로 뭔가를 해본 게 얼마 만일까요. 원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결정을 내려본 게 언제일까요. 아마 이번이 처음일지도 몰라요."
"......아일라."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딱 한 번 엇나간 오늘은, 평생을 똑같이 살아온 제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 빛나는 날이었어요."
리처드가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오늘이 다가 아니에요. 계속 그렇게 도전해요."
"네?"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조금씩 조금씩.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보이는 거예요. 남이 내 결정을 흔들게 두지 마세요. 아일라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안나의 눈이 반달로 접혔다.
"고마워요, 리처드는 뭔가 고민 없어요? 저만 너무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네요."
"고민이라."
리처드는 잠시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나는 정확히 아일라와 반대의 고민입니다."
"어떤?"
"나도 어릴 때는 가문에 붙잡혀 강요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가출했고, 이후로는 보상심리인지 보복심리인지 모르겠지만 내키는 대로, 막무가내로 살았죠."
그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한번은 큰 코 꺾일 법도 한데, 이상하게 나는 운이 따랐습니다. 세상이 쉽더군요. 이 세상 전부가 날 위한 무대라고 생각했고, 뭐든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면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런데-"
리처드가 팔을 늘어뜨렸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공허하더군요."
"아."
"어느 무엇에도 진득하게 마음을 붙이지 못해. 열심히 하다가도 금방 싫증을 느껴서 달리 재밌어 보이는 걸 찾아 나서고,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내겐 소중한 게 남지 않더군요. 이 나이에 벌써 회한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안나는 따뜻하게 웃으며 리처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마음을 둘 곳을 찾아야겠네요."
"마음을 둘 곳이요?"
"장소든, 조직이든, 사람이든, 기억이든, 언젠가 돌아갈 곳을 만드세요. 지친 내 마음을 누이고, 아무런 걱정도 대가도 지불할 필요 없이, 그저 내가 있고 싶은 만큼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을요."
"......."
리처드는 안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젠가 돌아갈 곳.
지친 마음을 누일 곳.
아무런 걱정도 대가도 없이 있고 싶은 곳이라.
가문과 고향에서 떠난 뒤 리처드에게 그런 건 없었다. 모든 건 거쳐갈 뿐이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쓰고 버리는 발판이었다.
그런 게 필요하다는 발상 자체를 해보지 못했는데.
꽉 막힌 뇌에 공기가 통하는 느낌이다.
"좋은 조언 고맙습니다, 아일라."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네요."
별로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 앞에 숙소가 보인다.
'제기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리처드는 만약 자신의 앞에 악마가 나타나 숙소를 10분 더 멀리 보낼 테니 영혼을 팔겠냐고 묻는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의향이 있었다.
그녀와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몇 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걸음은 기어이 두 사람을 목적지에 데려다 놓았다.
"......."
"......."
이별의 순간.
숙소 앞에서 잠시 두 사람 간에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리처드."
"예."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조금씩 조금씩.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셨죠?"
"네, 그랬죠."
"저 지금, 실천하려구요."
그렇게 말한 안나가 발끝을 들어 올려.
리처드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
리처드는 사고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리며 주위가 달콤한 설탕처럼 녹아내렸다.
사과처럼 두 뺨이 발갛게 물든 안나가, 민망한 웃음을 시선을 살짝 돌렸다가, 다시 눈을 마주치고는 헷 하고 웃었다.
리처드는 절감했다.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발광체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다고.
"그럼, 갈게요."
안나가 뒷짐을 뒤며 미소 지었다.
"내일 또 봐요. 리처드."
"......예."
리처드가 제 뺨을 어루만지며 얼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숙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손을 흔들어주고 있는데.
"......."
리처드의 몸이 뒤늦게 이질을 감지했다.
'뭐지? 이 기운은.'
등줄기를 훑고 내려가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었다. 안나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외쳤다.
"아일라! 피해요!"
"?"
안나의 옆에서 어둠이 발톱형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리처드가 급히 앞으로 뛰어나가 팔을 휘둘렀다.
콰지지직!
어둠이 리처드의 팔뚝에 부딪혀 무너졌다.
"리, 리처드? 무슨 일이죠?"
안나의 앞을 가로막은 리처드가 주위를 예리하게 훑었다.
계속 그녀에게 집중하느라 눈치채는 게 늦었다.
기감이 서서히 확대되며,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하는 것과 동시에 불이 켜져 있는 숙소가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꿀렁-
꿀렁 꿀렁-
시커먼 어둠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리처드는 즉각 대비하며 말했다.
"어둠의 정령입니다."
"네?"
리처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령술사 자체가 보기 힘든 이 시대에서, 다른 속성도 아니고 어둠의 정령이라니?
"나와라."
그 또한 정령마법을 이용해서 하급 불의 정령 두 마리를 만들었다. 정령들이 입에서 불꽃을 뿜자, 어둠의 정령들이 경계하며 물러섰다.
"지금입니다! 이쪽으로!"
리처드는 안나의 어깨를 감싸며 달렸다. 순식간에 숙소 건물까지 도착한 그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기기기기기!
-그그그극!
어느새 숙소 안까지 어둠의 정령들이 점령한 뒤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죽은 사람도 없는 것 같다.
'감시자 녀석이 정령의 공습을 눈치채고 아이들을 대피시켰나? 잘했군.'
"리처드!"
어둠의 정령이 리처드가 소환한 불의 정령을 찢으며 달려왔다.
리처드가 다급히 팔을 펼쳐 방어 마법진을 펼치려고 했지만.
'큭! 마나가!'
아까 정령룡을 소환하느라 힘을 너무 많이 써서 마법진이 펼쳐지지 않았다.
쩌어어어억!
그 순간, 리처드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잿빛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번개처럼 뛰어든 안나가 구둣발로 어둠의 정령을 걷어찬 것이다.
타악.
이내 바닥에 착지한 그녀가 현란한 체술로 주위의 어둠의 정령들을 때려눕혔다. 가히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동작이었다.
"아, 아일라?"
쩍!
팔꿈치로 어둠의 정령을 찍어 없앤 그녀가 뒤늦게 '핫!' 하고 얼굴을 붉히며 입을 가렸다.
"아하하, 조금 과격했나요?"
......멋지다.
이런 와중에도 리처드는 그녀에게 푹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는, 제 이마를 때렸다.
"근처에 도망치는 아이들이 있을 겁니다! 어서 따라가죠!"
"네!"
두 사람이 동시에 어둠의 정령을 한 마리씩 걷어차며 달려나갔다.
* * *
같은 시각.
고아들을 보호하고 있는 시몬과 레테는 정신없이 어둠의 정령들을 쓰러트리며 퇴로를 만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뒤에는 고아들과 원장, 봉사자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나마 봉사자들 중에서도 퇴역군인이나 검을 쓸 줄 아는 자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대, 대단한데."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역시 시몬과 레테였다. 두 사람은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서로 교차하며 발차기를 날리거나, 등을 맞대기도 하면서 적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게."
시몬이 팔꿈치로 어둠의 정령을 찍어 쓰러트리고는 레테를 돌아보았다.
"뭔가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레테."
"있슴다."
레테가 경쾌한 돌려차기로 어둠의 정령의 몸체를 산산조각내고는 말을 이었다.
"결사놈들의 짓이겠죠. 그들이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방해하는 것 같아요."
"...벌써 들켰단 소리야?"
언젠가 결사에게 들킬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아차리는 게 빨라도 너무 빠르다.
이제 겨우 두 번 리처드와 안나를 만나게 해줬을 뿐이다.
"우리가 여기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단 사실은 너랑 나. 그리고 아버지와 엄마 말고는 아무도 모를 텐데."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 모르겠네요."
그때 시몬이 동작을 멈추고 내려앉은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레테가 눈을 깜빡였다.
"응? 왜 그러심까?"
시몬이 자세를 낮췄다.
"...누군가 여기로 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