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44화
신성연방에서는 성녀 안나를 데려오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이 정보는 암흑연합 쪽에도 새어나갔다.
정보를 받은 두 세력의 네크로맨서와 프리스트들이 앞다투어 고아원에 난입하며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전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사령관급인 리처드와 안나가 전투를 막기도 했고, 고아원은 중립지대 내 '봉서'가 있는 지역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으니 파견된 장교들도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둠의 정령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리처드와 안나는 각자의 야영지로 돌아갔다. 조금 더 주민들의 이미지에 신경을 쓰는 신성연방 측에서 고아원의 아이들을 보호하기로 했다.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되는 것 같았으나.
-공격! 공격하라!
-신성연방의 요새를 함락시켜라!
바로 다음 날부터 바힐라 전선에서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상황이 지지부진하니 암흑연합 상부에서는 성과를 원했고, 신성연방보다 조금이라도 봉서 발굴 지점을 확보하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요나 사령관님! 적진의 결계에 미세한 균열이 보였습니다! 군단을 움직여 돌파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됐어.
그날 이후, 리처드는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다.
전장에 와서도 바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입을 벌리고 있거나 했다.
-못 뚫어. 적당히 치고 후퇴한다.
리처드는 굳이 비효율적인 공격을 강행할 필요 없다며 공세를 중지시키기 일쑤였다. 군단 내부의 강경한 에이션트 언데드나 부하들의 불만이 쌓였지만, 리처드는 묵살했다.
-성녀님! 부상을 입은 네크로맨서들이 도심지 지하에 숨어 있다는 첩보입니다! 포격을 허가해 주십시오!
-허가할 수 없습니다.
안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성 포격은 죄 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만 가중시킬 뿐이에요.
-그렇다면 서쪽 전선에 침입조 파견만이라도......!
-아군의 피해가 클 테니 후퇴하도록 하세요.
그녀 또한 리처드처럼 전투에 의욕을 내지 못했다. 보다 못한 이스라필이 말했다.
-안나 언니! 승기를 잡았을 때 밀어붙여야 해요! 우리 쪽 봉서 발굴 지역을 조금이라도 넓혀야죠!
그 말에 안나는 슬픈 웃음을 흘렸다.
-암흑연합의 방비는 철저해요. 돌파에 성공한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 두렵습니다.
-희생을 두려워해서는 전쟁에 이길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만약에 저쪽 바힐라 구역에서 봉서라도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분명히 교황 성하가 우리에게 죄를 물으.......
-그 구역에 봉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안나가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지금까지 그런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나요? 지금 차지하고 있는 지역의 발굴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봉서가 '나올 수도 있다'는 추정 따위로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더 흘려야 할까요.
-안나 언니!
-가능한 공격은 중단하고, 우리가 차지한 영역을 지키면서 봉서를 발굴하는 데 힘을 쏟겠습니다.
안나는 이스라필을 포함한 참모들의 공세전환 의견을 모두 물리친 채, 의자에 앉아 천막 밖을 응시했다.
밖이 보이지 않아도 멍하니 어느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스라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니 언니.'
오랫동안 안나를 보아온 이스라필은 알 수 있었다.
안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도, 그녀는 평소와 같다며 생긋 웃었지만 웃음에는 생기가 없다. 식음을 전폐하고, 죽어가는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
바로 그 '고아원 사건' 이후로.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레나가 지적한 대로, 자신이 본부에 안나의 일탈을 보고하는 바람에 정보가 흘러나가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치자.
하지만 오히려 더 잘된 일 아닌가.
고아원에서 만나고 있던 남자가 네크로맨서, 심지어 그 악명높은 군단장 요나였다. 그에게 속아서 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안나 언니를 구한 건 자신이다.
역시 안나 언니에게는 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안나는 시든 꽃처럼 웃고 있고, 자신은 죄책감에 그녀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걸까.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스라필은 고개를 내저으며 불경한 망상을 머릿속에서 흩트린 다음, 안나가 허락할 수밖에 없는, 더 효과적이고 완벽한 공격 계획을 짜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나흘 후.
늦은 새벽.
시몬과 레테는 각 진형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폐허에서 만났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레테."
시몬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시 만난 레테는 조금 수척해 보였다.
"뭐어, 사람들의 추궁이 조금 있긴 했지만 안나 선생님이 철저히 보호해 주셔서 계속 머무를 수 있었슴다."
"응."
고아원 사태 이후, 신성연방에는 엄중한 직무 이탈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100년 전쟁 동안 전황이 늘어지고, 특히 봉서 발굴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립지대에서는 병사들이 암암리에 밖에 나가는 일이 잦았지만, 이번 사태로 그 길이 전부 막혔다.
레테는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와 있는 셈이다.
"암흑연합 쪽은요?"
"이쪽도 군무 이탈 금지 명령이 떨어진 건 마찬가지야."
"상황이 꼬이네요.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싶었슴다."
과거로 오기 전, 레스힐에서 리처드와 안나에게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이후 약 여섯 차례의 교제 끝에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 정체를 알게 되는 사건은, 근교에 데이트를 하러 떠났다가 인근 몬스터의 군락지를 자극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들 때문이었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고, 마나로 싸우던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칠흑과 신성을 일으켜 몬스터들을 제거해 나갔다.
서로 네크로맨서와 프리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나를 속인 거냐며 잠시 싸우기도 했지만, 곧 몬스터들이 더 많이 몰려드는 바람에 임시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무수한 몬스터들. 그리고 등을 맞댄 네크로맨서와 프리스트.
공동의 적에게 함께 대항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분노와 오해는 조금씩 씻어 내려가고, 묘한 감정이 싹트게 된다.
물론 전투가 끝난 뒤에, 두 사람은 이제 우린 적이고 전장에서 만나면 용서가 없을 거라며 본인들의 입장을 확고히 한 뒤 헤어지게 되지만, 결판을 내지 않고 대화로 해결한 것부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유대감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간선에선, 두 분은 여섯 차례의 교제를 겪지 못하고 헤어졌슴다."
레테가 주먹으로 애꿎은 땅을 통통 때렸다.
"여섯 차례는커녕, 첫 만남 이후 고작 딱 한 차례의 데이트만 했어요! 그것도 이상한 정령들의 방해로 중단됐죠!"
시몬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 번의 데이트가, 여섯 번의 교제를 합한 만큼 인상적이었으면 좋겠는데."
"무엇보다 몬스터 군락지 사태를 겪지 못한 게 커요."
시몬도 레테의 그 말에 동의했다.
몬스터 군락지 사태에서는, 서로가 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지기도 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유대감을 쌓게 된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과정이 생략됐다.
서로 정체를 확인하고 충격받은 상태에서 헤어지게 된 것이다. 서로에 대한 감정도 확인하지 못했고, 유대감도 쌓지 못했다. 텔레포트로 넘어온 각 진형의 병사들에게 현장을 들키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레테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먼저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 건 결사임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막 나가죠!"
"...어쩌려고?"
"두 사람을 어떻게든, 강제로라도 그 몬스터 군락지 근처까지 데려오는 검다! 거기서 우리가 군락의 몬스터를 자극하고 도망치는 건 어때요? 두 사람이 전투를 벌일 테고 결국 우리가 알던 과거와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을까요?"
"그거,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해서 근방에 몬스터 군락이 있는지 확인해 봤는데."
시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암흑연합에서 잠재적 위험요소로 판단하고 모든 군락을 토벌한 뒤였어."
"망할, 벌써 결사가 손을 썼나 보네요."
미래에서 온 그 '결사'는 사소한 변수를 제거해 둘 만큼 철저할 뿐만 아니라, 리처드와 안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에 대해 아는 건 '어둠의 정령'이라는 이질적인 힘을 쓴다는 것 하나. 그리고 암흑연합과 신성연방 모두에 정보력을 가지고,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우린 할 만큼 했어."
시몬이 진단을 내렸다.
"여기서 무리하게 두 분을 다시 만나게 하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고, 만난다고 해도 두 분의 감정이 더 혼란스러워질 거라고 생각해. 지금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
시몬이 목에 찬 모래시계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모래가 절반 넘게 흘러내려 가 있었다.
"아마도 '배신의 군단 사태' 시기까지는 과거에 머무를 수 있을 거야. 그때가 가장 중요한 찬스야."
"당신, 의외로 태연하네요."
레테가 팔짱을 꼈다.
"이대로 두 사람이 이어지지 않으면, 나중에 돌아갔을 때 당신의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죽음의 마녀의 말. 벌써 잊었슴까?"
"당연히 기억해."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난 두 분의 마음을 믿어."
조금 틀어졌지만, 그 두 사람이라면 결국은 어떻게든 이어질 거라는 믿음.
시몬은 그런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운명적인 사랑이라."
레테가 턱을 괴었다.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정말로 일어났으면 좋겠네요."
* * *
고아원 사태 이후, 리처드는 폐인처럼 지냈다.
뭘 해도 성에 차지 않고, 뭘 해도 마음이 허했다. 다른 사람들이 표정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리처드는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니까.
그냥 기분이 엿같다.
단지 그뿐이다.
그러다 한 번, 동기들이 리처드를 불러서 밤에 한잔하러 가자고 했다. 마침 그 잔소리쟁이 '감시자'도 어디 나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군무 이탈 금지 명령이 떨어져 있었지만 신경 쓸 리처드가 아니었다. 겉옷을 챙기고 동료들을 따라나섰다.
매번 가던 술집에 왔다.
언제나처럼 술값은 내가 산다고 선언하고, 황금종을 울리고, 바드들의 악기를 빼앗아 연주했다.
하지만 즐겁지 않았다. 사람들의 환호도, 알딸딸한 술기운도, 자신을 유혹하러 다가오는 여자들도.
모든 게 공허했다.
소파에 앉아 여자들을 양팔에 낀 채 왕처럼 놀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아니.
오히려 기분만 더러웠다.
쨍!
리처드는 술병을 힘껏 바닥에 내리쳤다.
술병이 박살 나고 조각이 비산하며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주위가 어질러지고 파티 분위기에 취해가던 사람들이 놀라서 리처드를 보았다.
리처드는 돈뭉치를 꺼내 주점 주인에게 던져준 다음, 밖으로 나왔다.
다시는 여기 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군 막사에 돌아왔다.
자신이 파티 도중에 돌아올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한쪽에 쌓아둔 책들을 쫙 펼쳤다.
-[봉서의 비밀.]
-[봉서의 원리와 역사.]
그리고 전술 칠판을 가져와 분필을 들고 힘껏 휘갈겨 썼다.
<전쟁을 멈추는 방법>
타악-
분필에 힘주어 그렇게 쓴 리처드는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았다.
"X발."
그러다 하. 하고 앞머리를 쓸어넘기다가 분필을 던져 버렸다.
빠악!
분필이 군막 기둥에 부딪혀 반으로 쪼개졌다. 리처드는 럼주를 들고 힘껏 목을 축인 다음, 깃펜을 들고 보고서에 마구 써내려갔다.
<보고서 : 이 전쟁을 끝내야 하는 이유.>
벅벅.
그가 긴 머리를 긁으며 술기운에 마구 글을 써내려갔다.
내가 왜 이럴까.
대체 왜 이럴까.
놀아도 즐겁지 않고, 여자를 봐도 마음이 들뜨지 않는다.
전쟁을 끝내?
내가 왜 갑자기?
'X발.'
리처드가 팔을 축 늘어뜨렸다.
-당신이 요나였나요?
리처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뒤집고 의자를 걷어찼다.
부러지는 파편과 날리는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속이 매스껍고, 기분은 여전히 최악이다.
"감시자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안와!"
그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또 술 마시러 못 가게! 어? 똑바로 감시해야 할 거 아냐? 하이, 씨."
그러고는 제풀에 못 이겨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기분이 쓰레기 같았다.
* * *
늦은 새벽.
신성연방 내 아무도 없는 텅 빈 기도실.
"......."
바로 그곳에 안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창가 너머로 달빛이 비치는 곳에서, 그녀는 경전의 내용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경전의 어떤 구절을 외워도.
어떤 기도를 해도.
-오늘이 다가 아니에요. 계속 그렇게 도전해요.
그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머리를 붕붕 흔들고 다시 기도해도 그랬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쓰라리고 견디기 힘들어서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소매로 눈가를 쓱쓱 닦고 다시 두 손을 맞잡았다.
"여기서 뭐 하세요? 선생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레테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새벽까지 그렇게 기도하면 몸 상해요."
"......레나."
안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조금씩 조금씩.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보이는 거예요.
결심을 굳힌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레테와 눈을 마주했다.
"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