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48화
안나는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탁 트인 공간과는 거리가 먼, 협소한 산골짜기 같은 곳이었다. 몸을 숨기기 적합하고, 비밀스러운 만남에 어울리는 지형이었다.
안나는 리처드를 기다리며 몸가짐을 가다듬었다. 머릿결을 쓸어내리고 구겨진 옷의 주름을 폈다.
자꾸만 의식하게 된다. 설레는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분명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데.
자신은 지금 성녀로서 지탄받을 짓을 하고 있었다. 신성연방의 역사상 최악의 성녀로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가 먼저 편지를 보내 봉서를 파괴하자는 제안을 해주었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그 또한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전쟁에서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전쟁을 멈추려 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그 공범으로서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안나는 가슴이 벅차오는 것을 느꼈다.
"아."
멀리서 인기척과 함께 발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가슴 위에 손을 얹고 후우 심호흡을 했다.
이내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푸른 머리카락, 매끈한 턱수염, 그리고 장난스럽고 삐딱한 미소를 가진 청년.
"리처드."
홀로 그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의 울림마저도 달콤했다. 안나는 자꾸만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아 내리며 웃었다.
이에 다가오는 리처드도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두 사람이 마침내 재회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저, 저도 그래요."
어쩔 도리 없이 얼굴이 발갛게 익어가고, 버릇처럼 손발이 꼼지락거려진다.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안나는 표정을 고치고 진지하게 물었다.
"진심으로 봉서를 파괴하실 생각이신가요?"
"예."
리처드가 눈을 감았다.
"우리 중 어느 한쪽에 봉서가 넘어가면 끔찍한 대재앙이 발생할 겁니다. 더 이상 불필요한 희생자가 발생하는 걸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한쪽이 절멸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끝나지 않을 전쟁.
그렇기에 전쟁을 막고 평화를 되찾아야 했다.
안나가 숨을 고르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봉서를 확보해 놓았으니 우선 이쪽으로......."
리처드가 팔을 뻗었고, 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갔다.
두 사람은 시원한 바람을 받으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저기."
"예."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이 생각해 봤어요."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사실 처음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더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목적을 이룬 뒤 입도 떼지 못하고 헤어질까 봐 두려웠다.
"당신은 제게 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고, 지킬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줬어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던 안나가 눈을 질끈 감고 말에 힘을 주었다.
"그, 그러니 저도......!"
푸욱.
황홀했던 핑크빛의 꽃밭이 무너져 내리고.
핏빛으로 물든 죽음의 폐허가 드리워진다.
안나는 덜컥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고개가 덜덜 떨리며 아래로 향한다.
자신의 몸에, 낯선 사람의 손이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손은, 자신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동공이 흔들리고, 몸에 거짓말처럼 힘이 빠져나간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리고 등 뒤에서 들리는 건 음울하고 싸늘한 음색.
"진짜로 원로회의 괴팍한 망상이 맞았군."
리처드가 팔을 빼냈다.
안나가 허물어지듯 자리에 쓰러졌다. 가슴 한복판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덧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죽어라."
리처드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때 안나의 눈에 불똥이 튀더니, 힘을 쥐어짜 내 신성 마법을 일으켰다.
화아아아아악-!
눈부신 수 겹의 하얀 고리가 그녀의 몸에서 퍼져 나갔다.
리처드는 다급히 두 팔을 뻗어 방어 마법을 펼쳤다. 그러나 방어 마법은 일격에 깨져 버리고, 그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아. 하아."
안나가 제 가슴을 붙잡은 채 숨을 헐떡거렸다. 그녀의 손에서 연신 최고위 신성 마법이 펼쳐졌다.
<아우레올라>
<리스토어>
<디바인 프로텍트>
수 겹의 고위 회복마법이 무너진 심장을 수복하고 박살 난 장기를 되돌린다. 그 모습을 본 리처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심장이 뚫려도 살아 있다니. 이게 괴물이지 사람인가. 이제는 정말 어느 쪽이 언데드와 가까운지 모르겠구나."
안나의 기습적인 반격에, 리처드도 꽤 타격이 큰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안나가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 요나가 아니군요."
"그렇다."
우우웅-!
리처드의 몸이 벗겨지며 낯선 인상의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레스덴 남부 전선의 총사령관, 트라건.
키젠본부 첩보부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변신마법의 귀재였다.
"우습군. 이 정도면 의심을 해볼 만도 한데, 감정에 눈이 멀어 의심이라는 행위 자체가 말살된 것인가? 기적의 성녀."
안나의 안색은 극도로 나빠져 있었다.
신성 마법을 자신에게 퍼붓고 있었지만 쉽사리 상태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꿰뚫는 순간 연합 최고 수준의 저주와 맹독까지 사용했다. 즉사하지 않고 버티는 게 신기할 따름이군. 기적이라는 호칭은 과연, 그렇게 불리는 이유가 있었나."
안나는 점점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 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 몸 상태라도, 난 당신을 쓰러트릴 수 있어요."
"아, 물론 그렇겠지."
트라건이 신호하듯 팔을 들어 올렸다.
척! 척! 척! 척! 척! 척!
사방에서 수많은 병력이 튀어나왔다. 언덕 아래, 협곡 위, 계곡 너머, 계속해서 암흑연합의 병력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트라건이 이끄는 드레스덴 남부 전선의 병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북부, 서부, 그리고 칼로스와 샤헤드, 볼드윈의 병력까지.
암흑연합의 전 병력이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아무렴, 그 유명한 '기적'을 잡아 꺾으려는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겠나."
"크윽!"
안나가 트라건을 향해 오른팔을 뻗었고, 트라건은 들어 올린 팔을 내렸다.
"쏴라."
슈콰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흑마법이 날아왔다. 선명한 푸른 허공에 팔레트를 떨어뜨려 어지러운 물감들이 뒤섞이듯, 각양각색 수천의 흑마법이 오로지 안나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쇄도했다.
지형이 뒤바뀔 정도의 대폭격.
트라건은 멀찍이 물러나 지켜보다가 팔을 들어 올려 중지 신호를 보냈다. 폭격이 멈추고, 자욱한 연기 속에서 새하얀 방패가 보인다.
"내 눈으로도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헤븐즈 게이트>
안나는 멀쩡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새하얀 방어벽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네크로맨서의 공격을 단신으로 간단히 막아낸 것이다.
트라건은 눈을 감고 한탄했다.
"이런 자가 버티고 있으니 우리가 전선을 밀고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이내 그의 눈이 치켜 떠졌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끝이다. 우리는 '기적'을 꺾고, 봉서까지 차지하겠다! 그 후 이 대륙에서 여신과 신앙의 흔적을 티끌도 남김없이......!"
후우우우우우웅!
갑자기 몰아치는 돌풍에 트라건의 말이 끊겼다.
이내 그의 곁으로 검은 망토가 휘날렸다. 트라건이 입꼬리를 올렸다.
"왔는가. 요나."
푸른 창공에서 내리꽂히듯 등장한 망토를 두른 사내. 망토 안은 피어의 본 아머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껏 떠오른 옷깃이 서서히 내려앉으며, 남자가 눈을 떴다.
-게에에에에에에에엑!
-끼이이이이이이이!
망자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포위를 좁히려던 연합군의 군대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지면, 하늘, 절벽. 군단의 언데드들이 튀어나와 연합군의 병사들 이상으로 주위를 가득 메웠다.
"요나의 7군단이 왔다!"
"완벽하게 이겼군!"
곳곳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들렸다. 7군단의 명성과 악명은 다른 그 어떤 군단보다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패배를 모르는 파괴와 승리의 상징.
현 암흑연합에서 가장 확실한 승리의 보증수표였다.
요나! 요나! 요나! 요나!
망자의 울음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처드는 손끝으로 피어의 투구를 밀어 올려 얼굴을 드러냈다.
"......리처드."
안나는 방어막을 펼친 채, 떨리는 동공으로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리처드는 무심한 눈으로 안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안나는 이성적으로는 이해했지만 살을 에는 것처럼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꼈다.
"어서 오게, 요나. 하하하!"
트라건이 다가와 리처드의 어깨를 두들겼다. 리처드는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 군의 유능한 첩보원들이 기적의 성녀의 위치를 포착했고, 이렇게 대군으로 포위하는 데 성공했네."
트라건이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유명한 '기적'을 꺾고 봉서까지 손에 넣다니. 말년에 복이 넝쿨째로 들어오는군! 이제 전쟁의 승기를 잡은 건 우리 암흑연합이야!"
"......."
"그런데 축제라도 벌여야 할 이 좋은 날에,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이는군. 요나."
트라건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은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상부의 우려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자네가 죽이게."
트라건이 결계를 펼치고 있는 안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리처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자네가 저 '기적'의 목숨을 빼앗고 상부의 우려를 해소하게. 내 성녀를 죽이는 공을 자네에게 양보하려는 걸세."
"......."
"왜, 혹시 못하겠나?"
스릉!
발끈한 리처드가 망토 속에서 팔을 빼내어 거칠게 흔들자, 새하얀 파멸의 대검이 손안에 잡혔다. 사방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트라건은 깊게 미소 지었다.
저벅.
리처드가 파멸의 대검을 든 채 안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나는 여전히 방어벽을 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
안나는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아주 희미하게 끄덕인 다음, 눈을 질끈 감았다.
리처드는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결계의 방어력이 약해졌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전장에서 기적의 성녀와 맞서온 리처드는 느낄 수 있었다. 안나가 결계에 투입하는 신성의 양을 줄였다는 사실을.
파멸의 대검을 휘두르면 단 일격에 결계는 걷히고. 그다음 공격으로 안나의 목을 날릴 수 있으리라.
안나는 자신의 검 앞에 스스로 목을 가져대 댄 것이나 다름없었다. 혹시나 연합에서 다른 말이 나올까 결계를 걷지도 않고 유지한 채, 리처드가 자신의 힘으로 성녀를 베었다고 말하고 다닐 수 있도록.
리처드는 이를 까득 갈아붙였다.
'죽는 순간까지 남을 배려하는 건가.'
"왜 그러나, 요나."
뒤에서 트라건이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많지 않네. 기적의 성녀는 시간을 끌면서 신성연방의 병력이 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버틸 셈이야! 결계를 가르는 자네의 검이라면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걸세."
"그래."
푸우우욱!
살이 갈라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트라건의 입이 벌어졌다.
"덩달아 네 수명도 말이다."
어느새 리처드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트라건이 안나에게 했던 그대로, 그의 오른팔이 트라건의 가슴을 관통해 있었다.
"커헉!"
그의 입에서 선혈이 튀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공공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다.
리처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빼냈다.
"어, 어째서......!"
털썩.
트라건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지며 얼굴을 흙바닥에 파묻었다. 시뻘건 피가 웅덩이를 이루며 그의 주위를 뒤덮었다.
이내 정적 속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초, 총사령관님이!
-군단장 요나에게 살해당했다!
전장이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란 말인가. 네크로맨서들과 병사들이 웅성거리며 패닉에 빠졌다.
그때 리처드가 대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더니.
꾸우우우우웅!
바닥에 내리찍었다.
주위가 순식간에 정적으로 뒤덮였다.
"내 도구에 저주를 걸어 성녀를 꾀어낸 걸 모를 줄 알았나. 감히 내 뒤통수를 친 자는 상관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다."
펄럭!
그가 망토를 휘날리며 다시 안나에게 걸음을 옮겼다.
"피어."
리처드의 말에, 본 아머 상태로 입혀져 있던 피어가 스켈레톤으로 돌아와 뒤로 떨어져 나왔다.
리처드는 자신의 손으로 파멸의 대검을 들어 올린 채 크게 한번 휘둘렀다.
카아아아아아앙!
마치 유리장벽이 깨져나가듯 결계가 박살 났다. 안나는 위태롭게 휘청거렸지만, 간신이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심장을 회복하고 있는 신성 마법을 유지하느라 반격하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안나 크로스."
처억.
마침내 안나의 앞에 온 리처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왔지?"
안나가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리처드가 불렀으니까요."
"......."
여전히.
멍청할 정도로 착해빠진 여자다.
리처드는 손에 쥔 대검에 힘을 꾹 주었다.
"비열한 수로 네게 치명상을 입혔다. 이는 요나라는 이름과 명예에 크나큰 수치이니, 너 역시 나를 찔러라."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싫습니다. 당신이 내게 입힌 상처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저 병력을 뚫고 네 집으로 돌아가라."
"싫습니다. 저 또한 명령을 거역하고 이곳에 나온 몸.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럼 어떻게 하길 원하지?"
안나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 슬픈 웃음을 보는 순간 리처드는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마음을 도려내고 싶었다.
"요나! 지금 당장 기적의 성녀를 죽여!"
멀리서 거대한 외침이 들렸다.
리처드의 동기이자 같은 직위의 사령관인 '킨 무어'였다.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이제 네가 돌아올 방법은 이제 그것뿐이야! 다른 건 무어 가문인 내가 책임진다!"
"부탁이다! 기적의 성녀를 죽여!"
"그 여잘 찢어 죽이고 이쪽으로 돌아와!"
죽여라!
죽여라!
곳곳에서 그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나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게 보인다.
"저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이래라저래라. 지랄 났네, 지랄 났어."
리처드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반골이라, 하지 말라면 하고 싶고, 하라면 하기 싫거든."
"리, 리처드?"
리처드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지금부터 엄숙히 맹세하지. 나는 너를 위해-"
그의 목소리가 착 깔렸다. 그의 굳건한 팔이 안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모든 걸 던지겠다."
힘껏 입을 맞추었다.
──────────!
기겁한 비명과 폭음이 울려 퍼졌다.
괴음.
충격.
분노.
증오.
경악.
그 모든 소용돌이의 가운데.
폭풍의 눈처럼, 이 한가운데만은 한없이 조용했다.
평화로웠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안나가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가에 작게 이슬이 맺혔다. 몸에 힘을 빼고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까치발을 들었다.
두 남녀의 입술이 거칠게 부딪히고 떼어지기를 반복했다. 만인이 경악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만이 서로를 끌어안고 격정적으로 서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암흑연합과 신성연방의 수백 년 역사 중에서 이런 일은 없었다.
'나는 살아 있다.'
리처드가 미친놈처럼 웃었다. 사념으로 연결된 군단의 언데드들이 흥분하여 괴성을 부르짖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그녀를 위해 살아 있다.'
입술을 떼어낸 안나가 부끄럽게 웃었다.
"우린 이제, 대륙 역사상 최악의 프리스트와 네크로맨서로 남겠죠?"
"남들이야 마음대로 지껄이라지."
리처드가 큭큭 웃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할 거다. 절대로 후회 안 해."
세상에게 엿을 먹이듯, 중지 손가락을 하늘로 들어 올린 그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7군단!]
리처드의 절대명령.
그의 외침에 이미 반쯤 폭주해서 날뛰던 군단의 언데드들이 더더욱 격렬히 반응했다.
"다들 정신 차려라! 총사령관이 죽었으니 연합군은 지금부터 나 사령관 킨 무어가 지휘한다!"
이에 대응하듯 앞으로 튀어나온 킨 무어가 큰소리로 외쳤다.
"전 병력, 지금 당장 군단장과 성녀를 죽여라!"
군단의 10배에 달하는 연합군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에 리처드가 씩 웃으며 자신도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내가 내릴 명령은 단 하나다!]
그렇게 말한 리처드가 광기에 절은 눈으로 피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약해지려고 했으나.
[크흐흐! 망설이지 마라. 군단은 군단장의 '의지'다.]
피어는 리처드와 똑같이.
아니, 더 괴물같이 웃고 있었다.
[네가 지금 폭발시키려는 의지는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 나는 널 섬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네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 군단을 움직여라!]
리처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7군단은 길을 열어라! 방해하는 자들은-]
그의 입이 벌어졌다.
[군단의 이름으로, 흔적도 없이 없애라!]
게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군단에 소속된 망자들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군단장 최후의 기술이자, 금기 중의 금기.
군단의 계약을 대가로 언데드를 광기와 대혼돈으로 몰아넣는 기술.
<군단기-마성전염(魔性傳染)>
배신의 군단이 이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