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752화 (752/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52화

어둠의 정령마법 연구 설명서.

블레타가 직접 쓴 것 같았다.

어둠의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은 물론, 네크로맨서의 칠흑을 정령에게 덧입혀 강화시키는 기술에 대한 내용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언제 어떻게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챙겨두기로 했다.

이후, 폐허 주위를 깨끗하게 치워놓은 시몬과 레테는 곧 나타날 리처드와 안나를 기다렸다.

시간이 꽤 흘렀다. 중간에 비가 내리기도 했고, 담요를 덮고 하룻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시몬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목에 건 모래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앞서 사라졌던 블레타와 같은 증상이다.

과연 그 두 사람이 무사히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시간이 되기 전에 그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런 걱정으로 먼 지평선을 보며 밤을 지새우다가, 꼬박 잠이 들었다.

"시몬."

그러다 깨어난 건 레테의 부름 때문이었다. 눈을 뜨니 레테가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오심다."

시몬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스름한 새벽이 지나며 서서히 올라오는 여명을 등지고, 상처투성이의 리처드와 안나가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한 채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몬은 괜히 가슴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수많은 암흑연합의 대군, 그리고 나중에는 봉서를 노리고 난입한 신성연방의 군대까지. 사실상 대륙 전체가 두 사람을 죽이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부상당한 군단장과 성녀는 세상의 모든 악의와 공세를 이겨내고 여기까지 도달했다. 얼마나 힘겹고 치열한 싸움이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안나의 부축을 받으며 걷던 리처드가 시몬을 발견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네가 적이었단 전개라면 귀찮아지는데, 너도 우리 목이 목적이냐? 감시자."

시몬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설마요. 저희는 영원히 두 분 편이에요."

"안나 선생니임!"

레테가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안나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레나......! 그리고 동료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네 사람은 다시 재회했다.

정확히는 그들 둘만 온 건 아니었다. 뒤에는 리처드가 탈취한 '봉서'를 실은 수레를 사령마가 낑낑거리며 끌고 있었다.

이내 폐허에 도착한 리처드는 사령마를 아공간에 불러들이고는 봉서를 내려다보았다.

"대륙의 모든 전력이 속속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다."

그가 입가에 흐르는 검은 피를 대충 쓱 닦으며 말했다.

"현재 군단의 손실은 80%가 넘는다. 피어가 최대한 남은 병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오래가진 못하겠지. 군단이 뚫리면 바로 우리가 있는 곳까지 들이닥칠 거다."

"......리처드."

안나가 슬픈 눈으로 리처드를 올려다보았다. 리처드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난 괜찮아, 안나. 당신도 힘들었을 텐데."

신성연방의 군대를 상대할 때, 안나는 성녀의 권능으로 그들과 싸웠다. 연방의 병사들은 기적의 성녀가 네크로맨서의 편을 들며 자신들을 공격한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타락한 성녀다!

-마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온갖 끔찍한 말들이 쏟아졌지만 안나는 심장의 상처를 붙들고 싸웠다.

여신이 허락해야만 쓸 수 있다고 알려진 힘인 '신성'.

하지만 안나는 리처드를 구하기 위해 신성을 발휘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선명한 신성을 발했다. 아이러니하다고 그녀 자신도 생각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봉서를 들고 이동하면 우리 위치를 들킬 수밖에 없어. 지금 이 자리에서 봉서를 파괴해야 해."

안나가 폐허 주위에 결계를 치는 사이, 리처드는 수레에 실려 있던 봉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공간을 열었다.

"오랜만에 꺼내보는군."

고오오오오!

아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끔찍한 기운을 흩뿌리는 그것은 검은색 단검이었다. 리처드가 칠흑을 부여하자, 단검의 날에 달려 있는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아티팩트를 부수는 아티팩트, '벽파의 단검'이다. 이걸로 못 부수는 물건은 없지."

그것을 두 손으로 붙잡은 그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들 준비됐나?"

다른 세 사람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레테가 슬쩍 시몬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입을 뻐금거렸다.

-당신은 안 나설 검까?

시몬은 고개를 내저었다.

봉서는 리처드와 안나, 두 사람이 파괴했다. 마지막 순간인데 굳이 변수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레테도 그 사실을 이해했는지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간다!"

리처드가 단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더니, 있는 힘껏 봉서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

단검의 날이 봉서에 닿기 직전, 의문의 보호막 같은 게 봉서를 감쌌다. 단검이 카각 거리는 소리를 내며 보호막의 겉면에 부딪혔다.

"큭!"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일어났다. 지켜보고 있던 다른 세 사람은 몰아치는 광풍 때문에 지면에 긴 신발자국을 남기며 뒤로 밀려났다.

"크으윽!"

아예 무릎까지 꿇은 리처드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전력을 다해 눌렀다. 하지만 단검은 좀처럼 보호막을 파고 들어가지 못했다.

'!'

그때 시몬은 보았다.

보호막의 색이 순간 하얗게 변하는 것을.

터엉-!

결국 단검이 봉서의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가며 리처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리처드! 괜찮아요?"

시몬의 물음에 바닥에 쓰러진 그가 휘휘 손목을 흔들었다.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번엔 제가 해볼게요."

안나가 나섰다. 그녀는 신성 아공간을 열고, 본인의 키에서 두 배는 될 법한 거대한 은빛 십자가를 꺼냈다.

성유물, '심판의 맹약'.

그녀는 본인의 몸보다 훨씬 큰 무기를 두 손으로 번쩍 안아 들고 저벅저벅 봉서 쪽으로 걸어왔다.

무기의 무게가 상당한지, 그녀의 신발 굽이 닿을 때마다 바닥에 균열이 생겼다.

"가겠습니다!"

'심판의 맹약'에 안나가 신성을 불어넣었다.

십자가의 형태가 눈부신 빛으로 변하며 타오르듯 세상을 밝혔다. 이내 그녀가 무릎과 허리의 힘으로 힘껏 십자가를 들어 올려 봉서를 향해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

후폭풍이 몰아치며 이번에도 봉서의 몸통에 정체불명의 막이 펼쳐졌다.

"윽!"

십자가를 껴안은 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온 힘을 다해 낑낑거리며 봉서를 찍어누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봉서의 보호막이 검게 물들었다.

터엉!

굉음과 함께 그녀의 십자가가 튕겨 나갔다.

안나가 그대로 십자가를 놓치며 넘어졌고, 일어나서 기다리던 리처드가 안전하게 뒤에서 그녀를 받아주었다.

"괜찮아?"

"고마워요. 리처드."

두 사람은 역력히 지친 얼굴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리처드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미치겠군. 뭐가 문제지?"

"......."

시몬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칠흑으로 공격하니 봉서의 색이 하얗게 바뀌었고.

신성으로 공격하니 봉서의 색이 검게 물들었다.

그렇다는 건.

"동시에."

"?"

"두 분이서 힘을 합쳐 동시에 공격해 보는 건 어때요?"

그 말들 들은 리처드가 히죽 웃었다.

"안 그래도 같은 생각이 들던 참이야."

그가 안나를 보았고, 안나도 리처드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단검과 십자가를 고쳐 쥐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리처드가 진중한 얼굴로 숨을 토해내며 말을 이었다.

"군단의 방어진은 곧 뚫린다. 지금 봉서를 부수지 못하면 대륙의 전 병력이 봉서의 마력을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될 거다. 그때가 우리의 끝이겠지."

"할 수 있어요, 리처드."

안나가 숨을 헐떡이며 웃어 보였다. 리처드도 힘겹게 따라 웃었다.

"마지막까지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야."

"나도 그래요."

마지막으로 가볍게 이마를 맞댄 두 사람은 자세를 바로잡은 뒤, 힘껏 단검과 십자가를 들어 올렸다.

이내 서로 다른 동작으로 봉서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악!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돌음이 일어났다.

오른쪽에서는 리처드의 단검이, 왼쪽에서는 안나의 십자가가.

대륙의 두 강자가 있는 힘껏 봉서에 힘을 가했다.

'변화는?'

시몬이 눈에 힘을 주고 봉서를 관찰했다. 봉서를 감싸고 있던 보호막은 혼란에 빠지기라도 한 건지, 흰색으로 변했다가 검은색으로 변했다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사이 쩌적! 쩍! 소리가 나며 보호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통한다!"

리처드가 외쳤다. 두 사람은 더더욱 칠흑과 신성을 폭발시키며 무기에 힘을 주었다.

카각!

카가가가각!

하지만 두 사람의 힘이 부족해 보였다. 처음엔 봉서의 보호막을 빠르게 깨트리다가 점점 지지부진하게 시간이 끌렸다. 이제는 단검과 십자가가 뒤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시몬이 식은땀을 흘렸다. 두 사람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지쳐 있다.

'역사대로라면 두 분의 힘으로만 봉서를 부수는 게 맞아. 하지만......!'

그 순간 팟 하고 머릿속에 지나가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배신의 사태'는 평소보다 며칠 앞당겨져 있다.

이번 사태의 원흉, 블레타가 자신이 사라질 것을 염려해 빠르게 상황을 앞당긴 탓이다.

블레타가 꾸민 일이라면 본래의 역사보다 병력이 더 많도록 상황을 준비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두 사람의 힘이 최대한 빠진 뒤 싸우는 게 블레타의 승률이 높을 테니까.

'그렇다면 과거를 고쳐잡는다!'

그제야 시몬이 뛰어들어 단검을 쥔 리처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하아아아아아!"

터질 듯한 함성을 토해내며 남아 있는 모든 칠흑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감사자! 너......!"

카가가가각!

뒤로 밀어나던 단검이 서서히 내려간다.

"안나 선생님!"

레테도 발맞추어 안나의 등 뒤로 돌아와 몸을 밀착하고는,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레나?"

"힘주세요! 하나 둘-!"

꾸우우웅!

시몬과 레테가 두 사람에게 합류하며 다시 단검과 십자가가 보호막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봉서를 감싸는 막에 균열이 빠르게 생겼다.

"너 뭐냐."

단검에 힘을 주면서도 리처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네가 어떻게 나와 같은 군단의 힘을......!"

시몬은 그저 웃었다. 어느새 그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레나!"

성녀의 힘을 사용하고 있는 레테 또한 서서히 몸이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이미 두 사람의 목에 걸린 모래시계의 시간은 거의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모래시계에서 네프티스의 황금빛 아우라가 일렁였다.

리처드가 당황하며 말했다.

"이봐 너!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니냐? 몸이......!"

"리처드!"

시몬이 숨을 헐떡이며 그의 말을 막았다.

"돌아보지 말아요! 봉서에 집중해요! 그리고 잘 들어요!"

"새끼......! 너 누구한테 명령을......!"

"앞으로 누가 당신을 욕하든! 역사가 얼마나 당신을 깎아내리든! 나만큼은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의 편일 거예요!"

리처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니 계속 앞만 보고 나아가세요!"

"야, 이봐. 잠깐.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금방 사라질 사람처럼, 어?"

"내가 언젠가!"

시몬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사람들이 당신이 한 일들을 다시 평가하게 만들 거야! 반드시!"

카가가가가가가각!

이번엔 왼쪽에서 안나의 십자가가 봉서의 보호막 깊게 파고들었다.

"안나 선생님. 나는 처음에 선생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니, 다른 사람들 누구나 그랬겠죠."

안나의 손을 포개고 몸을 기댄 레테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기적의 성녀로서 고생하셨어요. 앞으로는 늘 행복하세요.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세요."

"레나?"

"남들이 말하고 평가하는 행복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행복한 삶을 살아주세요. 선생님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레나, 왜 그래요? 불안하게! 우린 앞으로도 같이......."

레테가 눈물을 글썽이며 웃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거예요."

콰콰콰콰콰콱!

그 순간, 드디어 봉서의 방어막이 깨졌다.

보호막이 깨지는 순간, 리처드의 안나의 집중력이 올라갔다. 두 사람의 무기가 깨진 방어막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고.

꽈드득!

봉서를 파괴했다. 이내 파괴된 봉서의 책장에서 거대한 푸른빛이 올라오더니.

화아아아아아아아아-!

산산이 깨져나갔다. 리처드와 안나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기를 손에서 놓친 채 쓰러졌다.

고요하다.

세상이 깨진 봉서의 푸른 방울이, 마치 반딧불처럼 떨어진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힘을 쥐어짜 낸 두 사람은 벌러덩 쓰려진 채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리처드는 쓰러진 채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잘했다. 감시......."

하이파이브를 하려던 리처드의 눈이 커졌다.

시몬의 몸이 사라져 있었다.

"레나?"

안나도 급히 뒤를 둘러보았다.

레테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푸른 반딧불 속에서 은은히 흐르는 금빛의 아우라뿐.

"......."

고요한 세상 속에서, 이제는 대륙 모두가 부정하는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리처드는 이마를 짚었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방금 감시자 감시자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놈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목소리 또한 흐릿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당신이 한 일들을 다시 평가하게 만들 거야! 반드시!

리처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목소리 또한 기억에서 흐릿해지고 있었지만 어쩐지 기분은 좋았다. 기억과는 관계없이 그 순간의 감정은 여운처럼 남아 잊히지 않았다.

"다 끝났군."

리처드와 안나는 서로에게 기댄 채 우두커니 하늘에 내리는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문득 누군가의 공백에 대한 외로움이 들었지만, 그것 또한 흐려져 사라졌다.

"안나."

"네, 리처드."

"갑자기 생각난 건데 말이야. 이런 상황에 말하긴 뭣하지만."

리처드가 제 뺨을 긁적이더니 이내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나, 아들이 갖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안나가 생긋 웃더니 자세를 고쳐서 두 손을 맞잡았다.

"뭐 해?"

"기도해요."

안나가 리처드의 품에 얼굴을 기댄 채 은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황새가 날아와서 우리 아들을 물어달라고요."

그 말을 들은 리처드가 픽 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갈 길이 먼 것 같군."

여정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어, 함께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