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56화
환락과 유희의 도시, 베리노.
드레스덴 왕국 최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가운데에 바다를 둔 채 샤헤드 왕국 최남단과 이웃하고 있다.
아름다운 해변가가 가장 유명하지만, 밤이 되면 해변은 폐쇄되고 휘황찬란한 도박장들이 문을 연다.
일확천금의 꿈과 허황된 환상이 동시에 벌어지는 곳. 황금이 비처럼 쏟아지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길거리에 나앉는 곳.
마차에서 내린 시몬은 느긋하게 이곳의 길거리를 걸어보고 있었다.
'소문대로 해변이 예쁘네.'
시원한 바람, 부서지는 바닷소리에 마음까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곳곳에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파라솔에 누워서 주스 한 잔 마시거나, 공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신나게 헤엄치고 있었다.
'......음.'
그러나 여길 봐도 살색. 저길 봐도 살색.
괜히 보는 사람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다는 몇 번 놀러 와봤지만, 산골 출신인 시몬은 이런 해변의 광경이 심리적으로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곳은 지금까지 시몬이 와본 해변 중에서 사람이 가장 많았다. 괜히 다른 문제에 휘말리지 않게 앞만 보면서 걷고 있는데.
텁!
갑자기 다리에 뭔가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뒤를 돌아보니, 가로수의 나무뿌리가 삐져나와 있는 게 보였다.
'도시에서 이런 거 정리 안 하나? 사람들 다니기 위험할 텐데.'
시몬은 딱 그 정도만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
"우왓!"
우연의 연속이라고 하기에는 자꾸만 어딘가에 다리가 걸린다. 심지어 발이 나무뿌리에 파고들거나,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힐 뻔했다.
'오늘 그냥 운수가 안 좋은 건가? 아니면.......'
묘한 느낌이 든 시몬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훑어보고 있는데.
"찾았다!"
잔뜩 헐떡이는 음성이 귓가에 꽂혔다.
시몬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가 인파를 뚫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시몬 오빠! 시몬 오빠 맞지?"
"응?"
덥석!
시몬의 몸이 휘청였다. 소녀가 몸통 박치기를 하듯 그의 품에 힘껏 안긴 것이다.
시몬은 이제야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사샤!"
"보고 싶었어!"
키젠 1학년이자 특례 1번.
사샤 앤드라실.
그녀는 강아지처럼 시몬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부비 비비고는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오늘 운이 좋다더니! 이렇게 학교 밖에서 시몬 오빠를 만나게 되네!"
"그, 그래."
"멀리서 봐서 불렀는데 쌩 가버리길래 계속 붙잡았잖아!"
역시 아까 그건 사샤의 짓인 것 같았다. 시몬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준 뒤 말했다.
"그런데 사샤,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애들이랑 임무 중이야."
그렇게 대답한 사샤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뒤를 가리켰다.
마침 인파를 가르며 익숙한 얼굴의 후배들이 두 명 더 달려오고 있었다.
"학생회장 선배님!"
곱게 땋은 머리가 어울리는 우아한 몸가짐의 소녀. 일반 백성인 척하려고 복장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차림이었지만, 그 기품과 분위기를 숨길 수는 없었다.
드레스덴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 몰리 드레스덴이다.
"하하하하! 오랜만입니다! 시몬 선배님!"
뒤이어 나타난 건 검을 세 자루나 찬 빨간 머리카락의 소년.
이마가 훤히 드러나는 사자 머리가 인상적인 그는 용병왕 아서였다.
그 유명한 키젠의 1학년 삼총사가 한 자리에 있었다.
"넌 철 좀 들어."
그렇게 말한 몰리가 시몬에게 달라붙은 사샤를 강제로 끌어냈다. 이내 본인이 시몬의 앞에 서더니 공손히 예법대로 인사했다.
"인사드립니다, 학생회장 선배님."
"아, 안녕. 몰리."
"저번 사태로 신세를 좀 졌습니다. 몸은 어떠신지요?"
"나는 괜찮......."
촤르륵!
근처의 나무줄기가 늘어나 몰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억!'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젖혔고, 그 옆으로 사샤가 뚱한 표정으로 검지를 치켜올린 모습이 보였다.
"특례 1번끼리의 재회를 방해하지 마. 10번."
나뭇가지를 떼어낸 몰리가 버럭 소리 질렀다.
"누가 막차러라는 거야!"
"막차러라고는 안 했는데? 이제는 알아서 제 발 저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네. 바보."
여전히 사이가 좋은지 아닌지 모를 두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한 나라의 공주를 저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건가? 지켜보는 시몬은 괜히 자신이 식은땀이 다 났다.
"그런데."
시몬은 마지막으로 아서를 보았다.
"넌 그 차림으로 뭐 해?"
다들 해변에 어울리는 차림으로 다니고 있는 가운데, 아서만 완전무장 갑옷 차림이었다.
사방에서 시선이 끌리고 있다.
"임무 중입니다! 선배님!"
아서가 검집을 들어 올려 이마 앞에 세우는 시늉을 했다.
"방학 중에는 본업으로 돌아와서 용병으로서 활동하고 있거든요!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도박장에 '괴도'가 예고장을 보내서 조사 중입니다."
"......역시 용병왕. 고생이 많네."
몰리가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저희도 아서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임무를 도와줄 겸 해서 이렇게 와 있어요."
"괴도는 무슨."
사샤가 팔로 뒷머리를 받쳤다.
"보나 마나 시시한 좀도둑이 관심받으려고 한 짓이겠지. 빨리 해치우고 놀자."
시몬은 잠시 1학년 중에서도 특히 탁월한 세 후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임무인지 구체적인 건 모르겠지만, 그들이 나서준다면 문제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번 예의상 묻기로 했다.
"도와줄까?"
세 사람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말씀은 감사드리지만 괜찮습니다."
몰리가 정중하게 거절하며 웃었다.
"하하! 이런 좀도둑 잡기에 학생회장이 직접 움직이면 키젠의 체면이 상하죠!"
아서가 제 팔뚝을 매만지며 말했다.
"맞아, 시몬 오빠! 여긴 우리한테 맡겨!"
사샤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시몬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심히 해."
사샤가 헤실거리며 헤벌쭉하게 웃었고, 뒤에서 몰리가 여전히 화가 덜 풀린 표정으로 제 동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서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시몬 선배님은 베리노엔 어쩐 일이십니까?"
"난 여기가 중간 경유지야."
시몬은 여기에 하루 정도 잠깐 머물렀다가 홍펭의 초대를 받아 초원에 간다고 밝혔다.
그 말을 들은 세 사람의 눈에 엄청난 부러움의 불길이 휘몰아쳤다.
"너무너무너무 재밌겠다! 나도 데려가 시몬 오빠!"
사샤가 바로 시몬의 다리에 철썩 들러붙었다.
"...맡은 임무랑 너희 동기들은 어쩌고?"
"저 바보왕이랑 막차러도 일단은 키젠이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잠깐! 너 이번엔 확실히 막차러라고 말한 거 들었어! 내가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시몬은 같이 가겠다고 떼쓰는 사샤를 힘겹게 떼어놓았다.
물론 그녀의 식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이능은 초원에서 유용하겠지만, 이 세 사람은 키젠에서 첫 방학이 아닌가. 적어도 첫 방학은 동기들끼리 같이 있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마음대로 놀러 가는 게 아냐. 홍펭 교수님의 초대를 받아서 가는 거거든."
"그래? 아쉽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샤는 끝까지 시몬을 따라다닐 기세였다.
바로 그때.
퍼어어어엉!
뒤쪽에서 뭔가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관광객들의 비명이 멀찍이서 들리고, 누군가가 '도둑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빙글빙글 사람 좋게 웃고 있던 아서의 눈빛이 일순 진지해졌다.
"사건이다! 가자! 사샤! 몰리!"
아서가 바닥에 쾅! 하고 크레이터를 남기더니, 두 팔을 냅다 흔들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학생회장 선배님!"
몰리도 아공간 사령마를 꺼내 올라타며 그를 뒤따랐다.
"아니, 그러니까. 우리는 괴도만 잡으면 된다니까."
사샤가 한숨을 폭 쉬고는 본인의 넝쿨 소환수를 꺼내 올라탔다.
"나중에 봐 시몬 오빠! 시간 나면 놀러 갈게!"
"알겠어. 무리하진 말고."
시몬은 멀어지는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떠들썩하네.'
시몬이 큭큭 웃으며 기지개를 쭉 켰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주위는 거짓말처럼 한적해졌다.
'그럼 나도 내 동기들을 찾아볼까.'
* * *
시몬은 한동안 쭉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1학년들이 사라지고 차분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도시 중심가를 벗어나 그럭저럭 한산한 해변가로 나왔다.
'세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해변에 놀고 있을 법한데.'
시몬이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니, 어느새부턴가 해변가의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파라솔부터 선베드까지 온통 럭셔리하고 고급스럽다.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수영복 차림이었지만, 하나같이 몸에 물 한번 적시지 않았다.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걸 보니 바닷물에 몸을 담글 생각도 딱히 없는 모양.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수영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다소 우스꽝스러운 차림의 웨이터들이 와인을 따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반인들보다는 돈 많은 귀족들이 머무는 장소 같았다.
시몬이 다시 등을 돌려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다소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하인들 없이 혼자 온 건지요? 저희가 안내해 드릴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아, 글쎄 싫다니까요!"
시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 땍땍거리는 목소리.
익숙하다.
소리가 난 곳에는 부기 넘치는 귀족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우리 가문 별장으로 초대를......."
"저녁 파티에 같이 갈래?"
"싫다고 몇 번을 말해요!"
시몬이 걸어가니, 남자들이 찝쩍거리고 있는 선베드에 앉은 여성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하게 보였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말았다.
냇물처럼 찰랑이는 푸른 머리카락.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와 백옥같은 피부. 잔뜩 화가 난 듯 가운데로 모인 눈썹.
그리고 흰 수영복과, 겉에 두르고 있는 투명한 겉옷.
손에는 레몬에이드가 든 잔을 들고 있었다.
'설마.'
마침 그 여성 쪽에서도 이쪽을 발견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표정이 거짓말처럼 풀리며, 푸른색 눈동자가 환한 광택을 발했다.
"시몬, 이쪽이야!"
그녀에게 작업을 걸던 귀족들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시몬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귀족들 때문은 아니었다.
'메, 메이린?'
오랜만에 본 교복 차림이 아닌 그녀의 모습. 어쩐지 조금 더 성숙하고 어른스러워 보인다.
시몬의 반응을 본 귀족들이 표정을 굳혔다.
"에이, 설마. 지나가는 사람한테 아는 척하는 건......."
시몬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도 시몬이 다가오자 활짝 웃으며 제 발로 뛰어나가더니, 대뜸 시몬의 팔에 들러붙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시몬의 얼굴이 벌게졌다.
"미, 미안."
이런 상황에 두말할 필요 뭐 있겠는가. 다른 귀족 두 명은 체념하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한 명.
톡 튀어나온 올챙이 배, 그리고 남자 수영복에 달린 이상한 프릴을 휘날리는 금발의 귀족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쿵쿵 다가왔다.
"그대!"
그가 시몬을 향해 손짓했다.
"나는 베르토노트 후작가, 안토니오 베르토노트라고 하오!"
일단 후작가 신분을 밝히고 본 안토니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아가씨를 잠시 내 별장으로 초대하고자 하는......."
"키젠 학생회장, 시몬 폴렌티아입니다."
안토니오의 얼굴에 일순 혼이 나갔다.
어지간한 신분 따위는 씹어먹는 절대적인 커리어. 같이 온 두 명은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제 부회장을 데리고 가서."
여유를 되찾은 시몬이 메이린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양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업무에 관해 논하려는데. 괜찮을까요?"
"크, 크윽!"
얼굴이 흙빛이 된 안토니오가 팔을 덜덜 떨며 말했다.
"후작가 앞에서 무슨! 거짓말도 어느 정도 성의가 있는 걸로......!"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일순 모래사장이 검게 물들며 주위에 광풍이 몰아쳤다. 하늘이 조금씩 흐릿해지며 모래사장이 쩍쩍 금이 가듯 일그러졌다.
끼긱.
끼기긱.
젊음과 생명력 가득하던 해변가에 갑자기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래사장 곳곳에서 좀비들의 팔과 해골의 팔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흐억! 헉!"
겁에 질린 안토니오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어둠 속에서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년이 눈을 번뜩였다.
안토니오의 다리가 벌벌 떨렸다.
'설마 진짜 키젠의......!'
그 순간, 발밑에서 해골의 뼈가 튀어나와 안토니오의 다리를 덥석 붙잡았다. 안토니오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입에는 거품이 물렸고 바지는 축축해졌다.
짜악!
청명한 박수 소리가 들리자, 다시 하늘이 맑아졌다.
푸른 머리의 소년이 웃는 얼굴로 손뼉을 친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저희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시몬이 메이린을 데리고 사라졌다.
안토니오는 혼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시몬의 등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