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66화
소녀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홍펭 님은...... 뵐 수 없어요. 지금은 붙잡혀서 지하에 갇혀 있어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일행들 사이에서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교, 교수님이 붙잡혔다고? 누구한테?"
어린 소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요. 로브로 몸을 두르고 있는 존재였어요."
"말도 안 돼."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메이린이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진짜로 홍펭 교수님이 붙잡히셨단 말야? 그렇게 강한 분이......."
"호, 홍펭 님은!"
그때 소녀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싸움에 패배해서 붙잡히신 게 아니에요!"
"?"
소녀는 어떻게 된 사정인지 설명했다.
방학이 되고 홍펭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녀는 늘 학교에서 벌어들인 봉급으로 마르라트 일족과 초원의 발전에 힘썼다. 먹을 게 없는 겨울에 식량을 제공하기도 했고, 고품질의 털이 자라는 가축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거주지를 자주 바꿔야 하는 유목민족도 교육에 힘써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아이들은 그녀의 도움 덕분에 선생님에게 대륙어와 글자를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방학을 맞아 초원에 돌아온 홍펭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이곳에 초대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학생들에게도 즐거운 시간일 테고, 초원의 아이들에게도 키젠 학생들을 접하는 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말했다.
일족은 홍펭의 뜻에 흔쾌히 동의했고, 모든 것은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홍펭 교수님이 주변 조사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마을에 이상한 괴물들이 들이닥쳤어요."
그때를 상상하는 듯, 소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괴물들은 마을 사람들을 붙잡아 이곳 지하에 가두었어요. 홍펭 교수님이 우리를 구출하려고 오셨지만, 결국 '그자'가 마을 사람들의 목숨으로 협박해서......."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한 소녀가 눈물을 보이자, 카미바레즈가 다가와서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이내 훌쩍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남은 세 사람은 굳은 얼굴로 모여서 회의를 시작했다.
메이린이 격분한 얼굴로 말했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러는 거지? 초원을 공격해 봐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잖아!"
"난 짐작 가는 게 있어."
딕이 말했다. 시몬과 메이린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다.
"뭔데? 딕."
"생각해 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고대문명의 사원들. 그리고 정체불명의 주민들과 괴물들! 그 사람들은 뭔가 막 수상쩍은 의식을 치르고 있었잖아?"
"그랬지."
그가 손을 펼쳤다.
"멸망했던 문명의 원혼이, 다시 옛 문명을 현대에 재건하려는 거야! 홍펭 교수님은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방해물이니까 붙잡은 거고, 마을 사람들은 산 제물로 쓰이겠지."
"뭐? 산 제물? 너무 과한 망상 아냐?"
메이린이 눈을 흘겼지만, 딕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초원의 고대문명에는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던 거 기억나? 그건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한 게 아니라, 사실은 모두 흑마법의 제물이었던 거야!"
"잠깐만."
시몬이 끼어들었다.
"그 시절 사람들이 흑마법을 썼다는 건 시기가 맞지 않아."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는 대륙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가장 처음에, 존재했는지 아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고대문명시대'.
뒤이어 유목민족의 전성기였던 '기마시대'.
오러와 순수마법의 각축장이었던 '기사와 마법사 시대'.
그리고 비로소 현재의 '네크로맨서와 프리스트의 시대'다.
"하부의 유적들은 고대문명시대 쪽이야. 이때는 흑마법의 존재 자체가 없었어."
"아니지, 아니지."
딕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시대에도 아주 원시적인 흑마법은 존재했을 거야. 산 제물을 사용한 것만 봐도 그래. 현대의 흑마법계에서 산 제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비도덕적이고, 공정이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굳이 산 제물을 이용한 의식을 썼다면 아주 원시적인 체계인 게 틀림없어."
시몬이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또한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만약 이 모든 일이 7군단에 속해 있었던 '뮤르'의 소행이라면? 피어도 분명 7군단의 대장 중에서 뮤르가 가장 위험한 녀석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이션트 언데드.'
에이션트 언데드는 천 년 이상을 존재해 온 개체다. 뮤르는 다른 에이션트 언데드들 보다 수명이 더 길었을 수도 있다.
만약 뮤르가 고대 흑마법의 원조격인 존재라면, 그리고 산 제물을 이용해 어떤 흑마법을 사용하려고 한 거라면.......
'서둘러야 해.'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측은 이만하고 일단 움직이자."
시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도 마침 진정된 듯 울음을 멈추었고, 카미바레즈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를 홍펭 교수님이 붙잡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네."
소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좁은 통로를 가리켰다.
"이쪽이에요."
* * *
시몬 일행과 초원 소녀는 정신없이 고대사원 내부를 헤집고 다녔다.
마치 미로와도 같은 곳이었다. 제사나 흑마법을 위한 시설이라 그런지, 인간이 다니기에 효율적인 공간 설계는 아니었다.
뱀처럼 길쭉한 생명체가 다닐 수 있는 통로나, 분해된 인육을 벽 너머로 넘길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많았다.
어린 소녀야 몸집이 작아서 이런 곳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었지만.
"......나 하체가 꼈어!"
나머지 일행들은 고생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들어가지긴 했다. 특히 딕이 벽면에 미끈이 포션을 바른 뒤에 빠져나가는 방법을 개발한 뒤로는 비교적 수월하게 쭉쭉 나아갈 수 있었다.
"제가 먼저 가볼게요!"
소녀 다음으로 몸집이 작은 카미바레즈가 정찰을 맡았다. 작은 통로로 쏙 들어가서 괴물이나 원주민들이 오가는지 체크한 뒤에, 일행들에게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냄새나고 비좁은 미로 같은 구간을 지나, 일행들은 처음으로 꽤 널찍한 공간에 들어왔다.
"으으, 살았다."
메이린이 허리를 펴며 울상을 지었다. 딕이 큭큭 웃었다.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느끼는...... 억!"
고개를 젖혀 메이린의 발차기를 피한 그가 카미바레즈의 뒤로 숨었다. 시몬도 허리를 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이 방의 벽면에는 온갖 기이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사실 글자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했다. 거의 그림에 가까운 원시적인 상형문자. 시몬은 천천히 내용을 훑어나갔다.
"이거 그거네."
마찬가지로 벽면의 그림을 훑어보고 있던 딕이 팔을 들어 올렸다. 사람의 시체 일부로 보이는 게 그려져 있었다.
"심장, 콩팥, 간. 그리고 여기 봐. 심장이랑 뭔가를 섞으면 '비'가 내린다고 되어 있어."
"......맞네. 혓바닥과 가죽에 뭔가를 더하면, '뱀'이 만들어진다고 되어 있네. 여기가 산 제물을 이용한 흑마법의 공식이 적혀 있는 곳인가 봐."
카미바레즈와 소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메이린이 한숨을 쉬었다.
"니들, 모험욕 샘솟는 건 이해하지만 적당히 하지?"
그녀의 말대로, 더 해석해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 홍펭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허리를 펼 틈도 없이 일행은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오."
또 메이린에게 맞을까 봐 빠르게 걷던 딕이 앞을 가리켰다.
"저기 넓은 통로가 보여. 저쪽으로 가면 돼?"
"아뇨, 거기가 아니라......."
우우우우웅!
갑작스러운 소리에 모두가 움찔하며 자세를 낮췄다. 갑자기 바닥에 마법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방 곳곳이 문처럼 열리더니, 아까 밖에서 봤던 그 얼굴 없는 피투성이 괴물들이 뛰쳐나왔다.
"드, 들켰다!"
"뛰어!"
모두들 꽁지가 빠지게 달렸다. 피투성이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쫓아왔다.
<아이스 볼트>
<혈류탄>
메이린과 카미바레즈가 급히 쓸 수 있는 흑마법을 영창해서 날렸지만 가볍게 튕겨 나가고 말았다.
시체로 만들어진 상당히 강력한 소환수로 보인다.
'진짜로 뮤르가 있나 본데.'
시몬은 걸음을 멈추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시선을 끌게! 다들 저쪽 통로로 빠져나가!"
"뭐?"
시몬은 칠흑을 일으킨 채 넓은 공간으로 괴물들을 유인했다. 통로에 들어온 카미바레즈가 다급히 고개를 내밀었다.
"시, 시몬!"
"난 괜찮아, 카미!"
시몬이 본 니들을 보내서 괴물들의 시선을 계속 끌었다.
"역할분담일 뿐이야! 너희들은 계속 들어가서 홍펭 교수님을 구해줘!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교수님뿐이야!"
카미바레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몬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몬!"
"믿는다!"
"다치기라도 하면 진짜 화낼 거야!"
딕과 메이린도 한마디씩 하며 좁은 통로로 몸을 던져넣었다. 혼자가 된 시몬은 계속해서 몬스터들을 넓은 공간으로 유인했다.
중간에 '본 스피어'나 '착검' 등으로 공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상당히 강력한 개체인 듯, 표면에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슬립 같은 저주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홍펭 교수님의 탈출은 네 사람에게 맡기고.'
시몬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나는 뮤르를 만나러 가야겠어.'
주위를 둘러본 시몬은 또 하나의 좁은 공간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괴물들도 뒤따라 들어왔다.
시몬보다 훨씬 큰 몸집이었지만, 좁은 곳으로 들어오자 몸집이 공간에 맞게 줄어들었다.
이대로는 따라잡힐 것이다. 피어는 아직 행방이 묘연하고, 프린스의 반지는 반응이 없다. 시몬은 아공간을 열었다.
"헤르세바!"
[뭐야, 또 내 차례야?]
아공간에서 튀어나온 헤르세바가 시몬의 손에 착! 잡혔다.
시몬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황금화>
주위의 좁은 공간이 금빛으로 물들더니, 벽을 좁혀 나갔다. 뛰어드는 괴물들을 간발의 차이로 붙잡아 일그러뜨렸다.
드드드드득!
"큭!"
시몬이 잽싸게 고개를 뒤로 뺐다. 좁은 틈에서 뻗어 나온 괴물의 팔이 시몬의 코앞에서 허우적거렸지만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시몬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아직 힘이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겠지만 도와줘, 헤르세바."
[뭐, 하는 수 없네! 계획은 있어?]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피어를 만나야겠어. 틀림없이 초원에 와 있을 거야."
* * *
메이린과 딕, 카미바레즈. 그리고 초원 소녀는 시몬과 헤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했다.
지하 미로는 끝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 곳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슬슬 호흡할 산소도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시몬은 괜찮겠죠?"
카미바레즈는 못내 걱정스러운 듯했다. 딕이 애써 씩씩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지금까지 그 녀석이 해낸 일들을 봐왔잖아? 지금은 시몬을 믿자."
"네, 딕!"
그때 초원 소녀가 팔을 뻗었다.
"이제 다 왔어요! 홍펭 님께 식사를 드릴 때 늘 이 통로로 왔어요!"
"좋아."
메이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시라도 빠르게 홍펭 교수님을 구해내야 해."
좁은 통로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주위를 살폈다.
이내 그녀의 동공이 급격히 커졌다.
"아."
햇빛 한 줌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둠 속.
이끼가 잔뜩 껴 있는 사원 벽면에.
쇠사슬에 붙들려 있는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차, 찾았다!"
"진짜 맞지?"
모두가 잘 아는 그 얼굴.
틀림없는 키젠의 마투학 교수, 홍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