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73화
쿠르르르릉!
콰아앙-!
중력에 도전하듯 하늘 높이 떠올랐던 유적들의 지붕과 잔해 따위가 하나둘 바닥에 떨어지고 있다.
이제 이 고대도시에 탑은 없다. 모두 평탄하게 베어져 단면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메이린은 비처럼 떨어지는 유적의 잔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 지금. 피온 님께 안겨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니 노을 지는 하늘처럼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믿기 힘들어서 고개를 돌려보면, 얼굴 전체를 가린 그 무시무시한 해골 투구가 보인다. 동시에 그림자 같은 망토가 전신을 휘감고 있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은 사람.
쏟아지는 망상 속에서 문득 요즘 좀 많이 먹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애써 팔을 꼼지락거리다가 그의 목을 휘감아 둘러본다.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덤덤히 언덕에 서 있을 뿐이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메이린이 뜨겁게 익어가는 얼굴로 말했다.
예상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이 아니라 목석같지만, 팔을 둘렀을 때의 그 온기는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이번에도 오셨네요. 처음 만난 데스랜드 때도, 성녀 사태 때도, 중립지대에서도."
[.......]
우연치고는 자주 만난다.
우연일 리가 없지. 이렇게 자주 만나게 되는 건 뭔가 필연성이 있을 터이다.
"새로운 제7 군단장님."
피온의 정체를 단정 짓듯 그렇게 대꾸한 그녀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대체 누군가요?"
소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느새 투구에 맞닿는다.
목덜미와 투구의 경계.
여기서 이걸 벗기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벗길 수 있지 않을까? 두 손도 지금 이 자세로는 쓰지 못할 테고.
여기서 조금만.
조금만 용기를 내면.......
스윽-
그녀의 손끝이 투구를 살짝 들어 올린다. 매끄럽고 선명한 턱과, 남자답게 톡 튀어나온 목젖과 목덜미가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코밑이 시큰하고,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보고 싶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
강렬한 유혹.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다. 그의 얼굴을 보면, 지금까지 답답하기만 했던 의문이나 가슴 속 응어리들이 시원하게 해소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늘 도움만 받는 주제에.
그리고 배신의 군단장은 대륙 전체에 자신의 정체를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다. 그런 그의 정체를, 자신의 단순한 호기심으로라도 알아도 되는 걸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린은 투구에서 손을 뗐다. 다시 해골 투구가 밑으로 내려가 그의 턱을 온전히 덮었다.
[내 언데드를 확보하러 왔다.]
비로소, 저 무뚝뚝한 군단장의 입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깨가 움찔 떨릴 만큼 차갑고 으스스한 음성. 속으로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녀는 꿋꿋하게 웃었다.
[데스랜드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전 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가 있었다. 그뿐이다.]
"아."
그녀의 머리가 잽싸게 돌아갔다.
아까 싸웠던 거대한 뱀이 에이션트 언데드가 부리는 소환수나 사역마 같은 거였나 보다.
홍펭 교수님을 붙잡을 정도의 강력한 에이션트 언데드가 이 초원에 있었고, 새롭게 배신의 군단장 자리에 오른 피온이 바로 그 에이션트 언데드를 확보하기 위해 왔다.
복잡한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이곳에는 볼일이 없다.]
메이린은 자신의 고도가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군단장이 자신을 내려주기 위해 무릎을 굽힌 것이다. 허공에 붕 떠 있던 두 다리가 살짝 땅바닥에 앉는다.
[동료들 곁으로 돌아가라.]
싫었다.
그에게서 떨어지기 싫었다.
마음 같아선 철썩 들러붙어서, 어린아이 투정부리듯 버티고 싶은 심정이다.
이대로 그가 자신을 데리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 버리면 어떨까? 세상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와 함께 지내는 상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억지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몸은 얌전히 바닥에 내려와 똑바로 섰다. 그의 앞에서는 모든 걸 잘 보이고 싶었다.
펄럭!
메이린을 내려준 피온이 등을 돌렸다. 자락이 뜯겨 나간 듯한 망토가 휘날렸다. 메이린이 얼른 말했다.
"떠나실 건가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게 긍정의 침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피온의 등에 몸을 기댔다.
"사람들의 아픈 말에 너무 귀 기울이지 말아요."
[.......]
"저는 늘 지켜보고 있어요. 신성연방의 성녀들과 싸우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에이션트 언데드, 그리고 세상의 편견과 싸우는 당신의 모습을."
그녀의 목소리에 감정이 섞였다.
"나는 멀리서나마 진심으로 당신을 응원할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메이린이 생긋 웃으며 피온에게서 물러났다.
"이 세상도 곧, 당신의 노력과 헌신을 알아줄 거라고 믿어요."
[.......]
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긍정이나 부정의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자리에 서 있다가 무릎을 굽혔다.
후우우우웅!
한 번의 도약으로 그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내 단숨에 반대편 사원의 끝으로 사라져갔다.
"피온 님."
발갛게 물든 얼굴로 두 손을 맞잡은 메이린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쭉 바라보았다.
* * *
한편.
'......큰일 났다!'
메이린 앞에서는 위압적이고 근엄한 군단장의 모습을 보인 뒤, 사원 뒤로 퇴장한 시몬은 꽁지가 빠지게 지상을 내달리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다들 날 찾고 있을 텐데, 어디에 갔다고 하지?'
시몬이 피어의 투구를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얼굴이 후끈하게 달아올라서 뜨거웠다.
[크흐흐흐흐!]
머릿속에서 피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미있구나. 아까 소녀의 말에 부끄러워하는 거냐. 소년!]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시몬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부정하면서 근처의 무너진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히 기절해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상황은 끝났으니 곧 사람들이 절 찾으러 올 거예요. 피어는 아공간에 들어가 있을래요?"
[아니, 난 아직 할 일이 있다!]
촤르르르륵!
시몬의 몸에서 피어가 떨어져 나왔다. 큰 키의 스켈레톤이 큭큭 웃으며 대검을 어깨에 짊어졌다.
[나는 이대로 뮤르의 뒤를 쫓겠다.]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충분하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너무 무리는 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피어는 자신의 '분신'을 떼어내어 시몬에게 주었다.
시몬은 그것을 옷 위에다 배지처럼 매달았고, 피어는 사원 밖으로 나갔다.
'그럼 난 어디에 있는 게 좋을...... 아!'
마침 천장이 내려앉은 곳에 작은 틈이 보인다. 시몬은 그 안으로 몸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대충 몬스터들을 유인하며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사원이 무너지는 바람에 기절해 있었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시몬! 어디 있어!
-대답해 주세요! 시몬!
마침 사원 밖에서 시몬을 찾고 있는 딕과 카미바레즈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몬은 더더욱 마음이 급해져서 필사적으로 몸을 잔해 안으로 밀어 넣었다.
[크흐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피어의 분신이 이 상황을 보고는 한마디 했다.
"해야죠. 저는 이번 전투 내내 빠져 있었으니까요."
시몬이 천장을 툭툭 쳐서 무너진 잔해가 튼튼하게 고정됐는지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군단장과 시몬의 연관성을 들키지 않으려면, 조금 위험하더라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크흐흐!]
자, 이제 기절할 일만 남았다.
머리를 천장에 세게 부딪힐까?
그게 아니면 방금 깨어났다는 느낌으로 구해달라고 소리를 지를까? 하지만 그건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이 머리를 마구 굴리고 있는 그때.
까각!
뭔가.
돌 사이에 낀 돌 같은 게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
잠시 후.
시몬의 커다란 비명소리를 들은 딕과 카미바레즈가 다급히 뛰어들어왔다.
* * *
시몬이 눈을 뜬 건 다음 날 오후였다.
'아.'
그는 홍펭의 집에 들어와 있었다. 다리를 보니 붕대가 칭칭 휘감긴 채 고정되어 있었다.
카미바레즈의 말에 따르면, 발견된 당시 무너진 천장의 잔해가 기울어져서 다리가 살짝 끼인 것 같다고.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시몬은 아무리 급해도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을 다짐했다.
-시몬! 정말 죄송해요. 저희를 구하려다가......!
-무리하지 말라니까! 못살아, 정말!
혹시나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못해서 비난을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들 부상당한 시몬을 보고는 빨리 나아라. 힘내라. 그리고 미안하단 말을 가장 많이 해주었다.
어쨌거나 상황은 잘 마무리됐다.
에일다르 히드라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시몬은 히드라의 머리를 베는 순간, 자신이 마지막 머리를 베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자각했는데 그것이 사실이었다.
홍펭과 마투학과 학생들, 그리고 1학년 삼총사가 힘을 합쳐 아홉 번째 히드라의 머리를 베었고, 시몬이 마지막 히드라의 머리를 베는 것으로 뮤르가 공들여 준비했던 비장의 소환수인 에일다르 히드라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뮤르 또한 에일다르 히드라가 소멸한 이후로는 초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뮤르가 붙잡았던 마을 사람들도 무사히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다음 의식에 쓰일 예정으로 저주에 걸린 채 실험구 안에 들어가 있다가, 탈출하던 마투학과 일행에게 발견됐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자유를 만끽했다.
그렇게 시몬은 눈을 뜬 뒤 홍펭의 집에서 내내 시간을 보냈다.
맞은편 침대 자리에는 홍펭이 있었다. 시몬이 입은 부상과 탈진 등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녀의 상태는 나빴다.
한 달 넘게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로 무리해서 싸웠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근처에 있는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코끼리냐.'
근처에서 지켜보던 시몬이 질릴 정도로, 그녀는 50인분의 식량을 앉은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이어서 중간중간 명상을 하고, 심호흡하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음식물을 소화시키더니 점점 몸에 살이 붙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초인이란 말은 실로 홍펭을 뜻하는 말이리라.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된 당일은 모두 정신이 없었지만, 다음 날 저녁. 무사귀환을 감사하며 마르라트 일족 내에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중간에 나무들을 겹쳐 커다란 캠프파이어를 만들고, 사람들은 전통춤을 추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즐겼다.
학생회 멤버들과 사샤를 비롯한 1학년 삼총사, 마투학과 학생들도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홍펭이 일족의 교육에 신경을 쓴 덕택에, 젊은 사람들 중에는 대륙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다들 주민들과 춤을 추고, 잔을 부딪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끙."
시몬은 여전히 발에 붕대를 두른 채, 반쯤 누운 자세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술은커녕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딕이 마르라트 일족의 사람들에게 히드라와 싸웠던 모험담을 들려주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그때.
"몸은 좀 어때?"
메이린이 생긋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아, 메이린."
"옆에 앉아도 돼?"
"물론이야."
메이린이 시몬의 옆에 털썩 앉았다.
시몬은 바짝 긴장했다.
-저는 늘 지켜보고 있어요. 신성연방의 성녀들과 싸우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에이션트 언데드, 그리고 세상의 편견과 싸우는 당신의 모습을.
-이 세상도 곧, 당신의 노력과 헌신을 알아줄 거라고 믿어요.
그 말을 들은 직후, 시몬은 메이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탓이다.
"있지, 시몬."
"응."
"할 말이 있는데."
그녀가 빤히 시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 어제 피온 님 만났어."
시몬은 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