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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792화 (792/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92화

세르네는 대뜸 파라한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근처의 의자를 붙잡아서 시몬과 파라한이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 놓고는 합석했다.

관능적인 몸짓으로 다리를 꼬고, 흐트러진 백금발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 넘기고는 시몬을 향해 여우 같은 눈웃음을 흘린다.

시몬은 경계심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

"세르네, 네가 여긴 어떻게......."

"어떻게 알고 왔냐고요? 그야 시몬이 여기 있는 신성방어학 교수님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시몬이 얼른 파라한 쪽을 보았다. 파라한은 고개를 두어 번 내저어 보였다.

"둘러댈 말을 찾는 거라면 소용없네. 이미 그녀는 다 알고 있으이. 자네가 신성을 쓰는 것도. 내게 백마법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도."

......스토커냐.

시몬이 이마를 짚은 채 세르네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진하면서 영악한 얼굴이다.

"그보다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보세요. 뒤가 궁금하네요."

그녀의 등장에 워낙 놀라고 정신이 없던 탓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까먹었다.

하지만 세르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죽은 시체에 마나가 깃들면, 그 마나가 시체 안에 갇혀 탁해진 채 역방향으로 흐르고, 일종의 '코어'를 형성한다. 그게 칠흑이고, 언데드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다음은 신성을 설명하실 차례네요. 교수님."

깔끔한 정리다.

진짜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온 건가?

파라한은 가볍게 기침을 한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지, 신성의 기원은 지금은 불타 없어진 '낙원'이라고는 장소에서 찾을 수 있네."

"처음 들어보네요."

세르네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고, 시몬은 태연히 입을 열었다.

"신성연방에서 주장하는 '성지'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다네, 지금은 모종의 화재로 소실됐지만 실제로 존재했네."

낙원은 데바교의 기도문이나 찬송가 등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시몬은 어린 시절 안나에게 자주 듣기도 했고, 레테를 따라 신성연방에 갔을 때는 프리스트 흉내를 내야 해서 공부도 했다.

파라한이 눈을 감고 선선히 부채질했다.

"낙원은 이 대륙에서 가장 신비로운 장소였다네. 멀리서 보면 함박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하얀빛이 일렁이는 아름다운 곳이었지. 나뭇잎은 흰 이슬을 머금었고, 하늘에서는 빛의 비가 내렸으며, 골짜기에는 깨끗한 샘물이 솟아났지. 부정한 기운은 들어올 수 없었고, 이곳에 사는 그 모든 동식물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며 어떠한 변화도 바라지 않으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낙원이었지."

잠시 그 광경을 떠올리는 듯 말이 없던 파라한이 눈을 떴다.

"그런 그곳에 인간들이 들어왔다네."

잘 듣고 있던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인간이 들어왔다고 하니 벌써부터 불안하다.

"인간들은 이 낙원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추종했고, 이 생태계의 일부가 되어 함께 살기를 원했네. 그들은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의복을 벗었고, 이곳에 열리는 나무열매를 먹고, 이곳에 흐르는 샘물을 마시며 지냈네. 낙원에 들어온 대부분의 인간들이 지루한 삶을 견디지 못하거나, 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질적인 기운 때문에 도망쳤지만, 뜻이 깊은 소수의 인간만이 하루하루 버텨냈지. 그러다 보니."

파라한이 손바닥을 펼쳤다.

"낙원의 동식물에서 볼 수 있었던 그 하얀빛이 인간의 몸에도 흐르기 시작했지. 진정으로 낙원의 일원이 된 게야. 이것이 태초의 '성인(聖人)'의 탄생일세."

시몬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잠깐만요! 그럼 역시 그 낙원에 흐르는 힘은......!"

"신성이었네. 낙원의 정체는 마나가 아닌 신성을 기반으로 한 생태계였고, 신성에 오랫동안 노출된 인간이 마나를 신성으로 바꿀 수 있는 프리스트가 된 게지. 낙원이 모든 것의 기원이었던 게야."

그렇게 신성을 손에 넣은 성인들은 자신들을 허락해준 '신'에게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곳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름 모를 한 성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들만 낙원의 힘을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알리고 이 힘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낙원에서 어린 성목(性木) 한 그루를 뽑아 챙긴 뒤, 마을로 내려갔다.

그는 마을 중앙에 성목을 심고 가꾸며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설파했다. 당시 이 마을 사람들은 돌림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성인이 손을 대서 신성을 일으키자 그 병이 깨끗이 나았다.

칼에 찔린 상처가 회복되고, 귀가 들리지 않던 자가 귀가 들리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성인의 능력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엎드려 그를 섬기기 시작했다.

-나는 위대한 여신 데바를 섬기는 피조물이며, 이 힘은 위대한 여신께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시간이 흘러 마을에 심은 성목은 곧게 자라 열매를 맺었고, 성인은 그 열매를 제자들에게 먹였다.

제자들은 여신께 감사하며 열매를 먹었다. 어떤 제자들은 덤덤히 받아들였으나, 어떤 제자들은 극도로 괴로워하거나 심지어 쇼크로 죽기도 했다.

<스승께서 가라사대, 불경한 마음을 품은 자는 괴로워할 것이오, 여신의 뜻을 경건히 이해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인 자만이 그 힘 또한 받아들이리라.>

그렇게 성목의 열매를 받아먹으며 수행하던 제자들 사이에서, 놀랍게도 전신에서 하얀 힘을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성인이 기적을 일으켰던 것처럼, 병을 낫게 하고 다친 자를 구원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번 엎드려 신의 힘과 뜻에 감복했다.

성인은 기뻐하며 이 제자들에게만 '전도사'의 호칭을 내리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여신의 뜻을 전파하라 일렀다.

전도사들은 스승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목'을 얻기 위해 낙원으로 향했다. 다만 낙원에 당도할 때 티끌만큼이라도 불경한 마음이 남아 있으면 아니 된다는 스승의 당부에, 일부러 험난한 가시밭길을 통과하거나, 음식을 먹지 않거나, 햇빛에 끓는 모래바닥을 맨발로 걸으며 스스로 수행했다.

이 일화는 그 유명한 신성연방의 '19고행'의 기반이 되었다.

그렇게 낙원에 당도한 제자들은 낙원의 어린 성목과 식물들을 가지고 각 지역으로 흩어졌고, 많은 곳에서 믿음을 전파하며 또 다른 신성 사용자들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신성연방과 프리스트의 기원이었다.

신성과 데바교는 단순히 정신적으로 민중에게 기댈 곳을 주는 종교 그 이상이었다. 의료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대륙에서 병에 걸리거나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고, 죽음과 부정한 힘을 파하는 특유의 성질로 언데드를 물리칠 수 있었기에 그 위세와 명성이 급속도로 커졌다.

특히 네크로맨서들이 득세했을 때, 그 대항마로서 빠르게 성장하여 '신성연방'이라는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제국을 이룩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신성이란 것은 낙원이라는 장소의 토착 이상현상으로 시작했다네. 이는 특이하게도 '전파성'이 있었고, 신성에 오랜 시간 노출된 동물은 신수가, 인간은 성인이 되었네. 이러한 힘이 대륙 전체에 퍼져나가며 프리스트가 탄생했고, 신성연방이 세워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군."

"어머나- 멋진 분석이네요."

세르네가 생글생글 웃었다.

"세상에, 신성이 '토착 이상현상'이라니! 자신의 역사와 뿌리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프리스트는 처음이에요. 그쪽 사람들은 신성모독이니 뭐니 하면서 신화 속 이야기를 한없이 떠받들기만 하잖아요?"

파라한이 미소 지었다.

"나는 신성연방과 암흑연합을 고루 접했으이. 이곳에 교수로서 있다 보면, 네크로맨서들이 프리스트의 성전을 학술적으로 분석한 연구들을 읽어볼 수 있지. 연방과 연합, 신학적 연구와 학술적 연구. 두 가지 모두를 정리한 결론일세."

시몬이 듣기에도 무서운 이론이었다.

이 사실이 퍼져 나간다면 신성연방에 어떤 혼란이 찾아올까? 물론, 철저하게 언론과 소문을 탄압하는 연방에서 그런 이야기가 제대로 퍼지지는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쪽 연구를 훑어보다 보면 오히려-"

세르네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교수님의 신앙심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사실은 여신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고."

"세르네."

실례되는 말이었기에 시몬에 그녀에게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파라한은 허허 웃으며 손끝으로 십자가를 그었다.

"오히려 이 늙은이의 믿음은 더 충만해졌네. 여신께서는 병으로 신음하고 언데드에게 고통받는 대륙민들을 구원하기 위해 낙원을 만드셨고, 낙원의 힘에 전파성을 부여하여 대륙 널리 퍼뜨리게 해주셨으이. 이 모든 과정에는 도저히 인간의 생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있었다네."

세르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는 시몬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성 열매를 먹거나 하지 않고, 신성관에 들어가잖아요?"

"그렇다네. 그편이 신성에 눈을 뜨는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

신성연방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려면 프리스트가 많아야 한다.

신성관은 어느 정도 평범한 사람도, 다소 과격하고 무식하게 신성을 투여하는 방식으로 프리스트가 되게끔 만들 수 있었다.

"이야기가 너무 돌아왔으이. 이 늙은이가 젊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 신이 난 모양이니 용서하게나."

파라한이 부채를 내려놓고는 무릎 위에 깍지를 꼈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오지. 이론적으로 죽은 팔라딘의 시체가 어떻게 데스나이트가 되어 칠흑을 쓸 수 있는가? 그게 자네의 물음이었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지금은 이제 이해가 되나?"

"......."

시몬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결국 칠흑과 신성은 마나가 기반...... 아니, 변질된 마나에 불과하네요. 그러니 오랜 시간이 지나 신성이 모두 빠져나간 팔라딘의 몸으로도 데스나이트를 만들 수 있고, 과거의 사념을 이용해 신성기를 쓰도록 시킨다면-"

시몬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신성 대신 칠흑을 에너지로 사용할 테고, 신성기를 칠흑으로 재현하게 된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렇지."

파라한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우리 대륙민들은 칠흑과 신성이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사고방식이 머릿속에 꽉 박혀 있으이. 그러한 편견을 벗겨내고 보면 사물을 이해하는 눈을 기를 수 있을 게야."

"그렇다면-"

그때 세르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한번 봐주실래요?"

그녀가 우아한 동작으로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번쩍이며 어두운 방 안이 극도로 밝아졌다. 그녀의 등 뒤로 눈처럼 새하얀 날개 한 쌍이 펼쳐져 나왔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다.

노을빛을 반사시킨 채 날개를 뽑아낸 그녀의 모습은 마치 경전 속에 나오는 천사를 연상케 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매해서, 순간 아무런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볍게 손짓하자, 날개가 펄럭이며 위로 치솟더니 이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방 안이 가득 찼다.

눈처럼 하얀 깃털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는 내 과거를 몰라요. 기억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어요. 아는 거라곤, 내 양아버지인 전 상아탑주가 어딘가에서 나를 주워왔다는 거죠."

나풀나풀 떨어지는 깃털의 비 아래에서, 세르네가 생긋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 순간 분위기가 바뀌면서.

스윽-

그녀의 눈빛이 번뜩였다.

"......!"

평화롭고 고매하던 세상이 반전되며, 깃털들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녀가 이능에 칠흑을 더한 것이다.

하얗고 종소리가 들릴 것 같던 그녀의 주위가, 어둡고 컴컴하며 지옥의 비명소리가 들릴 것처럼 변질되었다.

깃털들이 칠흑으로 분해되고 마법진으로 바뀌며, 이윽고 무서운 눈동자의 형태로 변했다.

충혈된 눈동자들이 먹잇감을 찾듯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칠흑과 신성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했잖아요? 교수님."

그녀가 파라한을 보았다.

"만약 내가 프리스트였다면 어땠을까요?"

파라한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게 생각하듯 오랫동안 말이 없던 그가, 이내 눈을 감고 무겁게 말했다.

"자네는 프리트스였다면이 아니라, 프리스트였어야 했겠지. 그 힘은 역시......."

"그렇다면."

그녀가 무섭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파라한을 응시했다.

"나는 대체 누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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