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93화
나는 대체 누굴까요?
세르네의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없다.
아니, 적어도 이 암흑연합 땅에는 없을 것이다.
"......."
시몬은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나풀거리며 내려오는 검은 깃털비 속에서, 가만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
어딘가 이질적이고 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면서도, 그와 동시에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러다 그녀의 눈이 움직여 시몬을 응시하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외로움이 살짝 가시는 것 같았다.
"우리는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네요. 그렇죠? 시몬."
"......."
칠흑과 신성을 모두 쓸 수 있는 자.
신성에 걸맞은 힘을 타고났으나 네크로맨서가 된 자.
본래는 희었어야 할, 까맣게 물든 깃털을 바라보는 지금처럼 묘한 기분이었다.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깃털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창문이 열리며 신선한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르네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걸어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턱을 괴고 파라한 쪽을 한번 본다.
"그런 의미에서 파라한 교수님, 전에 말씀드린 건은 어떻게 됐나요?"
"말씀드린 건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시몬의 물음에 그녀가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웃었다.
"아, 실은 파라한 교수님께 사람 한 명을 찾아달라고 명...... 아니 부탁드렸거든요."
너 지금 명령이라고 하려 했지.
시몬이 가만히 노려보자 세르네가 요조숙녀처럼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귀여운 제자의 부탁? 혹은 미래 권력자의 압력? 내가 아직은 교수님의 지시를 듣는 학생의 포지션일 때 전자를 택하길 바란다고 하니, 그러시겠다고 하셔서요."
대체 세르네의 사고방식은 어떻게 된 걸까. 늘 명령만 내려서 그런지 부탁을 한다는 행위 자체를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게 아닐까.
"......그건 일단 넘어가고, 누굴 찾아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신성연방의 '가휀'이라는 자요. 시몬이 꼭 찾아보라면서요?"
"내가?"
"정확히는 미래의 시몬이지만요."
-뿌리를 찾고 싶다면, 신성연방의 '가휀'이라는 사람을 찾아라.
시간의 탑에서 잠깐 만난 '미래의 시몬'이 세르네에게 남긴 말.
그녀는 여전히 가휀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아, 정말 황홀하신 분."
그녀가 또 미래의 시몬을 상상했는지,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타인에게 압도당했던 경험은 처음이에요. 늘 타인을 지배만 하던 내게 처음으로 지배당하는 기쁨을 선사하신 분이죠."
"뭔 소리야!"
다른 사람도 앞에 있는데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시몬이 벌게진 얼굴로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세르네는 고개를 움직여 피했다.
"깎아내린 듯한 어두운 푸른 머리, 살짝 기른 수염에 능글거리는 미소. 특히 그 모든 내재를 초월한 듯한 눈동자. 그 근사한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요."
당사자를 앞에 놓고 그런 말을 하니 상당히 낯뜨겁다.
그녀는 두 손의 검지와 엄지를 펼친 채 거꾸로 겹치게 해서 창문처럼 만든 다음, 시몬의 얼굴을 담았다.
"빨리 나이가 들었으면."
"자꾸 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녀가 손끝을 움직여 환상 마법을 사용했다. 시몬의 머리 색이 어두워지고 입가에 수염이 달렸지만, 그녀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직은 아이가 아빠 흉내 내는 느낌? 중후한 멋이 나오려면 조금 더 우러나야겠네요."
시몬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수염을 잡아떼어 냈다. 환상 마법도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자네에게 부탁받은 가휀의 이야기라면."
파라한이 불쑥 말했다.
"전 지인에게 부탁하여 신성연방에 있는 그 가휀 교수란 자에게 편지를 보냈네. 미안하지만 아직 답장을 받지는 못했으이. 워낙 바쁜 사람일 터이니, 뭐라도 답장이 오면 알려주겠네."
"그럼요, 교수님. 꼭 알려주세요."
시몬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그녀를 보았다.
"너무 초조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세르네. 틀림없이 찾을 수 있을 거야."
"네에."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 신성연방에 넘어갈 때 딱 마주쳤으면 좋겠네요."
"......그건 너무 확률이 낮지 않을까."
"만약 국경에 가게 된다면 두 사람 다 몸조심하게."
파라한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연방 파견이야 키젠 학생들에게는 그리 특별하지도 않네만,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국경의 상황만큼은 심상치 않으이."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 * *
며칠 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전의 아론 수업이 모두 그레리온의 재료학 수업으로 대체되었다.
갑작스럽게 수업장소가 바뀌는 바람에, 학생들은 헐레벌떡 마차를 잡아타고 그레리온의 동굴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모두가 모이고 수석조교가 출석을 부른 뒤, 그레리온이 나타났다.
"오느라 수고 많았다!"
그가 동굴 안에서 선글라스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상황의 경과를 말해주마! 아론 교수가 끝내 데스나이트 재료 확보 작전의 허가를 따냈다!"
학생들 사이에서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으셨네!"
"그럼 우리 진짜로 신성연방에 가는 거야?"
손뼉을 맞부딪히며 좋아하는 학생들 반, 다리를 떨거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해하는 학생들 반이었다.
"소,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토토는 후자였다.
암흑연합의 주민들 사이에서 신성연방은 그야말로 들어가면 죽는 악의 구렁텅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본부의 허가를 따낸 만큼 이 작전은 안전하니 말이야. 그럼 작전에 참가한다는 서명을 받겠다! 이 서명을 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 심사숙고해라!"
흔히 말하는 자신에게 문제가 생겨도 학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명.
사실 이 정도는 섬 생존평가나 진급시험 같은 큰 시험을 치를 때마다 쓰는 서류라, 키젠 학생들은 이젠 대수롭지 않게 사인했다.
서명이 모두 끝나고, 그레리온이 바퀴 달린 칠판을 끌어서 가져왔다.
"그럼 작전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그가 칠판 위에 지도를 붙였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앞다투어 고개를 쭉 들거나 무릎을 꿇고 상체를 일으켰다.
생전 처음 보는 군사작전의 전선 지도. 각종 군사 용어와 은어들이 가득했다.
"이러니 진짜 연방에 간다는 게 실감 나네."
동굴에 긴장감이 몰아쳤다.
그레리온이 호탕하게 웃으며 지휘봉 끝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작전 당일! 우리들과는 별개로, 네크로맨서 요원들이 전선에서 어떤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다. 그 내용은 기밀이니 밝힐 수 없지만, 그냥 작전이 진행된다고만 알고 있도록!"
그가 지휘봉으로 지도 중간중간을 짚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신성연방의 국경에는 거대한 결계가 쳐져 있다. 물리적인 공격은 물론 외부에서 오는 그 어떤 종류의 파장도 감지해낸다! 텔레포트 마법진 같은 건 시도도 하지 못하지!"
팔락!
조교가 얼른 국경의 결계를 마력촬영기로 찍은 사진을 지도 옆에 붙였다. 그레리온의 지휘봉이 그쪽으로 향했다.
"우리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임무를 받은 네크로맨서 요원들이 결계에 구멍을 숭숭 낼 거다. 어디로 진입했는지 모르도록, 결계에 순간적으로 200개 이상의 구멍을 낼 예정이다!"
그가 지휘봉으로 허공을 꿰뚫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이내 요원들이 결계 안으로 진입, 20분 안에 해당 지역으로 돌입해 작전을 수행할 것이다! 커다란 폭발과 소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겠지. 근방에 있는 신성연방의 모든 전력이 그쪽으로 쏠릴 것이다. 그사이 우리는!"
터엉!
그레리온이 지도의 구석을 짚었다.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미리 요원들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침투한다!"
학생들이 급격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슈가 번쩍 손을 들었다.
"에슈 아르젤입니다! 결계에 머리카락 한 톨이라도 닿으면 온몸이 새까맣게 타들어 죽는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그레리온이 하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걱정 마라! 결계에 통과하는 것도, 작전장소로 이동하는 것도 내 키메라로 할 거다! 너희들은 안에서 편안히 대기했다가 나오라고 할 때 나오면 된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키메라는 20분 안에 작전지역에 도착할 것이다! 작전지역은 텅 비어 있을 거라 예상하지만, 먼저 출발한 조교들이 혹시나 모를 적의 경비들을 무력화시킨 채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키메라에서 내려 작전지역에 침투!"
그가 주먹을 꾹 쥐었다.
"데스나이트의 가장 중요한 재료를 확보한다."
100년이 지난 팔라딘의 유골.
보존 상태가 좋아야 하는 건 물론, 여러모로 확보가 힘든 물건일 테지만 그게 작전장소에 있다고 아론과 그레리온은 확신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 후, 작전은 단 '30분' 동안만 진행된다. 30분 후에는 핵심재료를 확보했건 안 했건 즉각 떠나야 한다. 아쉬움에 질질 끄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마라! 아무리 데스나이트를 만들고 싶어도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다! 만약 시간에 맞춰 집합장소에 도착하지 않는 자는-"
그레리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버리고 갈 것이다."
꿀꺽.
곳곳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레리온이 살짝 표정을 풀며 웃었다.
"무얼, 너희들이 지시에 제대로만 따라준다면 전원 무사히 학교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재료를 확보한 뒤 다시 내 키메라를 타고 왔던 길로 무사히 결계를 빠져나간다. 알겠나?"
"네!"
몇몇 호전적인 성향의 학생들은 시원하게 대답하며, 프리스트와의 교전이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야 물론 계획상 문제는 없어 보인다. 속된 말로, 네크로맨서 요원들의 작전에 학생들이 슬쩍 끼어든 느낌이다.
결계 파괴와 전투, 후퇴까지 전부 네크로맨서 요원들이 진행할 테고, 혹시나 작전지역에 있을지 모르는 경비들은 그레리온이나 조교들이 상대한다.
학생들은 슬그머니 작전지역에 들어가서 재료만 확보한 뒤 나오면 된다. 전투가 발생할 가능성은 몰래 숨어 있을 프리스트를 발견하면 상대하는 정도. 나머지는 해당지역의 방범장치나 함정 등을 조심하면 될 뿐이었다.
이렇게 그레리온의 말대로 작전 자체는 쉬웠지만 이런 시국에 국경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질문이 있다면 해라!"
곳곳에서 학생들의 손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비센테 보로메오입니다! 그 작전장소란 곳이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그레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임무상 기밀이다! 프리스트 놈들의 귀에 들어가면 매복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지. 현장에 가면 어딘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그레리온은 대답한 뒤 뒤쪽의 한 학생을 지목했다.
"맷 코머입니다! 아론 교수님은 같이 안 가시는 겁니까?"
"아론 교수는-"
그레리온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뒤 입을 열었다.
"메인 미션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 말을 들은 시몬은 걱정이 스멀스멀 몰려오기 시작했다. 로레인도 시몬을 보았다.
"시몬 아무래도......."
"우리 학과생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요원들에게 자신이 조력하겠다는 조건을 내건 것 같네."
아무래도 아론은 이번 일에 많은 것들을 건 것 같았다. 이 위험한 시국에 데스나이트 재료 확보 임무를 허가받은 것만 봐도 그랬다.
정황상 이 모든 것은 아론의 무한 책임일 것이다. 작전지역에서 학생이 부상을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신성연방 측에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아론은 즉각 교수직을 박탈당할 것이다.
이내 몇 가지 질문을 더 받은 그레리온이 '주목'하고 외쳐서 학생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럼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해, 지원자를 세 명 뽑으려 한다."
지원자?
학생들의 불안한 시선이 모여들었다.
"너희들의 안위는 나와 조교진이 책임지겠지만, 정말 만에 하나 프리스트들의 공격이 너희들에게 도달했을 경우, 그들을 막아낼 방어조가 필요하다!"
방어조.
만에 하나 전투가 일어난다면, 그레리온이나 조교진과 함께 프리스트와 직접적으로 싸울 인원.
그레리온이 손에 든 서류를 펄럭 흔들며 말했다.
"신성방어학 성적이 뛰어나고, 이번에 했다던 실전훈련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좋겠군! 자원하는 학생 없나?"
주위가 조용해졌다. 동기들을 위해 자원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결단을 내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제가 가겠습니다."
그중에 누군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