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04화
피어의 유적에 에이션트 언데드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몬은 기숙사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만나겠네.'
쌀쌀한 저녁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댔다.
로브자락을 여민 시몬이 울창한 숲 한복판으로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꼼짝 마."
곳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나무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하나같이 활이나 석궁 따위를 들고 있는 이들은 금지된 숲과 로크섬의 생태계를 관리하는 '파수꾼'이었다.
'응? 파수꾼들이 여긴 왜?'
시몬은 의아함이 앞섰다.
금지된 숲에 한두 번 가는 것도 아니고, 키젠에서 생활하는 동안 파수꾼들의 정찰루트와 시간은 완전히 꿰차고 있었다. 뜬금없이 이런 타이밍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천천히 두 손 들어."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던 시몬은, 가장 앞에 나와 있는 파수꾼의 한쪽 눈동자색이 진홍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눈동자가 둥글고 쌍꺼풀이 길게 나 있는 여성의 눈이었다. 이내 신호를 주듯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시몬은 순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키젠 학생이니 쏘지 마세요."
"그대로 따라와라."
시몬은 팔을 들고 파수꾼들이 유도하는 대로 걸어갔다.
파수꾼들도 따로 포박하거나 팔을 붙들거나 하지 않고 석궁을 겨눈 채 시몬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이내 꽤 깊은 곳까지 들어온 뒤에야, 처음에 시몬에게 화살을 겨누었던 험상궂은 외모의 파수꾼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학생이 늦은 시간에 금지된 숲을 돌아다니다니! 혼자 목숨이 백 개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시몬은 대답하지 않고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파수꾼이 앞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안에 뭘 숨기느라 대답을 못 하는 건가? 살펴봐야겠다!"
그러고는 시몬의 뺨을 붙잡아 쭈우욱 눌렸다. 시몬의 표정이 한층 더 퉁명스러워졌다.
"이쪽은 이상 없군. 다음은 옷을 검사해......!"
"무슨 일이야? 에르제."
상의를 더듬거리려는 파수꾼을 떼어낸 시몬이 그렇게 말했다. 파수꾼이 히죽 웃더니 몸이 빠르게 녹아내리며 형태가 변화했다.
이내 액체처럼 늘어진 거미줄 속에서 에르제베트가 튀어나왔다.
[군단장니임! 보고 싶었사와요!]
그녀가 와락 시몬의 몸을 끌어안았다.
역시나 그녀였다.
거미부대의 대장, 에르제베트.
[소녀, 떨어져 있는 내내 하루하루 애타는 마음으로 달을 올려다보며 군단장님을 떠올렸사옵니다.]
"그, 그래. 그런데 왜 갑자기 파수꾼으로 변신한 거야? 무슨 일 있어?"
[아.]
에르제베트가 긴 혓바닥으로 제 입술을 훑었다.
[군단장님께 미행이 붙었사와요.]
"응?"
[감히 소녀의 앞에서 미행이라니, 추격은 간단히 뿌리쳤사옵니다. 키젠 학생들인 것 같은데 거미들에게 붙잡아 오라고 시킬까요?]
시몬이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소타 프쉬케의 얼굴이 떠올랐다.
"됐어. 아마도 학생회 쪽 사람이나 선도부겠네."
[못 본 사이 미행도 붙으시고, 확실히 거물이 되신 것 같아 소녀. 마음이 놓입니다.]
그녀의 모습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머리카락이 샤랄라라 핑크빛으로 물들며 복장도 키젠 여학생 교복으로 변했다.
그녀가 키젠 캠퍼스에 들락날락할 때 자주 변신하는 '엘리자베스 웨퍼'의 모습이다.
[짠.]
그녀가 양손에 바구니를 들었다.
[바구니 데이!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어, 그거. 에르제도 알고 있었어?"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스파이의 기본. 경쟁자인 10대 인간 여자들은 이런 기념일을 챙긴다기에 소녀도 따라 해보았사와요.]
그런데 바구니에는 달콤한 초콜릿이나 알사탕 같은 것들이 아니라 와인에 치즈 같은 안주들이 담겨 있었다. 시몬이 지적했다.
"내용물은 잘못된 것 같은데."
[뭐 어떤가요? 바구니에 담겨 있으면 됐지.]
그녀가 바구니를 시몬의 팔에 들려주며 미소 지었다.
[그럼 가시겠어요? 소녀가 안내하겠사옵니다.]
"그래, 부탁해."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함께 피어의 유적으로 향했다.
* * *
피어의 유적 지하.
둥! 둥! 둥! 둥!
스켈레톤들이 북과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멜로디가 있고 심지어 박자까지 맞는 게 묘하다.
낄낄낄!
그르르르르르!
게에에에에!
유적 곳곳에 온갖 언데드들이 난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 군단형 언데드라 그런지 자아가 강한 편이다. 서로 싸우고 부딪히고 뒹굴고 비명을 질러대고 난리도 아니다.
[받아라! 하하!]
옆에는 프린스가 시몬이 가져온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군단형 언데드들은 에이션트 언데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편인데, 프린스의 영향을 받았는지 군단형의 좀비들도 장난기가 꽤 있는 편이다. 다들 공 하나에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다 같이 놀고 싶었던 송장거미 한 마리가 공중에서 나타나 공을 채가서 이빨로 물어뜯으니 그만 바람이 빠져 버렸다.
프린스가 와아악 화를 내며 시몬에게 일러바치러 뛰어왔다.
[시몬! 저 바보 같은 거미부대 녀석이 우리 공을......!]
[어머나, 왜 우리 아이 기를 죽이고 그래요?]
공을 찢어서 시무룩해 있는 송장거미를 쓰다듬은 에르제베트가 프린스를 노려보았다.
시몬이 쓰게 웃으며 두 대장들을 진정시켰다.
"그만, 공은 내가 나중에 새로 사줄게."
에르제베트의 송장거미들은 활동성이 왕성하다. 끊임없이 뽈뽈 돌아다니며 뭔가를 하고 있다. 어디서 음식을 가져오는 건지 시몬의 앞에 빵이니 과일이니 먹을 것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여기서 음식을 즐기는 건 시몬뿐인데 너무 양이 많았다. 시몬이 손사래를 치며 그만 가져오라고 일렀다.
반면 아케뮤스의 휘하 스컬윙들은 그를 닮아서 태연하다. 적당히 높은 곳에 앉아 가만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다.
헤르세바의 미라들은 하나같이 붕대에 매달려 그네를 타고 놀았다. 지팡이에 들어가 있는 헤르세바는 유적의 모래를 긁어모아 탑을 세우는 중이었다.
망자들의 파티.
뭔가 정신이 하나도 없고, 자꾸 괴이한 비명을 질러대서 시끄럽고, 무슨 상황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군단이라서 그럴까 어쩐지 마음이 편했다.
"좋아, 그럼 보고를 들어볼까?"
[나부터! 나부터 할래!]
프린스가 손을 번쩍 들며 튀어나왔다.
이내 그는 주먹을 치켜든 채 물끄러미 시몬을 응시했다. 뭘 요구하는지 알았기에 시몬은 기꺼이 핸드 셰이크를 해주었다.
탁. 탁. 착. 착.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속도나 동작이 제법 그럴듯하다.
[데스랜드에 갑자기 던전이 몇 개 생기는 바람에, 그거 박살 내고 오느라 시간이 걸렸어.]
핸드 셰이크를 마친 프린스가 어깨를 만지는 시늉을 했다.
방학 동안에 몇 번 프린스가 반지로 응답을 받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본체가 던전에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거기에 데스랜드의 지배자인 내게 끝까지 저항하던 언데드 무리를 3곳 격파했고, 잔당들도 정리했어. 아, 그리고!]
프린스가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식구들을 소개할게!]
쿵! 쿵!
보통의 좀비보다 크고 괴팍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간테스 좀비.
일반 좀비의 상위 개체였다.
[이 녀석들, 원래는 내 왕관의 힘으로 복속시킬 수 없었는데 최근엔 되더라고!]
프린스가 시몬을 돌아보았다.
[아마 네가 더 강해져서 가능해진 것 같은데.]
"그런가?"
시몬이 뿌듯함을 느끼며 웃었다.
군단장이 강해지면 그 칠흑으로 움직이는 에이션트 언데드들도 강해진다. 군단에 머릿수에만 의존하지 않고 군단장 본인의 강함에도 신경 써야 하는 이유였다.
[다음은 소녀의 차례이옵니다.]
이어서 다른 에이션트 언데드들도 보고를 시작했다.
에르제베트의 경우는 방학기간 동안에 '벌레무덤' 일부를 점령한 뒤, 거미줄로 뒤덮어서 거미소굴로 변환. 송장거미들의 충원에 더더욱 힘을 썼다.
아케뮤스 또한 '비명의 정글'에서 세를 불렸다고 보고했다. 정글 한복판에 드높은 스컬윙 둥지들이 가득 들어선 모습은 이야기만 들어도 장관이었다. 강력한 고위 토착 몬스터들까지 꺾어놨으니 당분간은 공격당할 일도 없다고 했다.
"다들 수고했어."
북신과의 전투에서 잃은 언데드들을, 방학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빠르게 복구한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스트 필드에서 온 북신 부대의 그레이슨입니다.]
커다란 북부의 새의 입 앞으로 마법진이 벌어지더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북신의 심복이자 '삼형제'인 그레이슨은 죽은 새를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프로스트 필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자이로스 님 대신 제가 보고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해요. 그레이슨."
프로스트 필드에서는 뮤르의 전함을 무사히 인계받았고, 자이로스가 머무는 하이브 가장 깊은 곳에 철저하게 보관해 두기로 했다.
자이로스는 '군단장께서 나에게 군단의 핵심 임무를 맡기셨다'며 상당히 들뜬 반응을 보였다는 것 같았다. 어떤 빈틈도 없이 지킬 것이고, 뮤르가 공격해오면 북부의 2군단과도 협력해서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군단의 지침으로, 제5군단 매그너스와 망자의 죄악 뮤르의 흔적은 계속해서 찾고 있었습니다만, 이곳에 오는 도중 작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시몬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과요?"
[네, 새의 머리에 손을 대주시길.]
시몬이 다가와 새의 머리에 손을 올리자, 사념이 더 강하게 연결되었다.
"아!"
시야가 출렁거리며 주위가 파랗게 변했다. 발아래는 까마득한 바다가 보이고, 바람 부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새의 시야로 보는 과거의 한 장면이었다.
'여기는......?'
어마어마하게 드넓은 바다. 아무래도 대륙의 남부 해역 쪽으로 보인다.
새는 그리 높게 날고 있지는 않은 지 섬 몇 개가 보인다. 섬들이 모여 '군도'를 이루고 있었다.
[가장 아래쪽의 섬을 주목해 주세요.]
그레이슨의 목소리에 시몬은 군도에서 가장 아래쪽 섬을 바라보았다.
'!'
섬에서 어떤 생물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확대하겠습니다.]
시간이 그대로 멈춘 채, 시몬의 시야가 안쪽으로 확대되었다.
'이건.......'
[제5군단 에이션트 언데드, 뱀공주 라미아.]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그녀가 통솔하는 언데드 몬스터, '데드나가'의 모습입니다.]
이내 시야가 바뀌며 다시 피어의 유적으로 돌아왔다.
시몬은 숨을 헐떡이며 잠시 진정했다.
피어가 말했다.
[크흐흐! 라미아라면 매그너스의 심복 중의 심복이다! 이거 좋은 정보를 건졌군!]
"여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을까요?"
[지도를 보고 확인해야 할 것 같다!]
피어가 바닥에 지도를 펼쳤고, 시몬과 에이션트 언데드들이 들여다보았다.
[바로 여기입니다.]
그레이슨이 조종하는 새가 지도 한 곳을 지목했다. 그곳을 살펴보던 시몬의 눈이 커졌다.
"어, 잠깐만......."
[무슨 일이냐 소년!]
"이 지도의 지형.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시몬이 이마를 짚으며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단체시험이 2학년 버전 섬 생존평가라는 소문은 들었어요! 어떤 시험일까요?
-그럴 줄 알고 내가 몇 가지 후보지들을 추려왔거든?
불과 얼마 전, 딕이 말했었다.
-세린 섬, 체논 섬, 가라온 군도, 레흘론 군도. 그 외에 다른 곳들까지 합쳐서 총 여덟 군데야. 로크 섬 내 물류가 직접적으로 움직인 지역이지.
거기까지 떠올린 시몬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해."
[군단장님?]
시몬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기, 이번 2학년 단체시험 후보지 중 하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