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05화
로체스트 앞 항구.
"이게 마지막 짐인가?"
"그런 것 같으이."
웃차차!
인부들이 항구의 짐들을 배로 옮기고 있었다. 로크섬에서 랭거스틴으로 가는 화물들이 선박 위로 가득가득 쌓여갔다.
그리고 바로 그 옆으로 에르제베트와 시몬이 걸어가고 있었다.
"괜찮겠어?"
시몬은 그냥 로브 한 벌만 뒤집어쓴 상태였고, 에르제베트는 변신했다. 최고급 정장 슈트에 선글라스, 팔에는 서류판을 낀 채다.
이 섬에서 저런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두 부류다. 키젠 교수이거나, 혹은 본부 직원이거나.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소녀에게 맡겨주시와요."
정장 차림의 여성이 항구에 등장하자, 인부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부두 앞에 멈춰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으려니, 곧이어 인부들의 리더격으로 보이는 수염 난 남자가 허허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본부의 높으신 분께서 기별도 없이 여긴 어쩐 일로......."
에르제베트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바로 낮은 자세로 나온다.
그녀는 우아하게 손바닥을 착 펼쳤다. 수염남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장부를 내밀었고, 그녀는 팔랑팔랑 서류를 넘겨보다가 시몬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배에 올라타서 짐을 훑어보는 척했다.
"과적이네요."
에르제베트가 장부를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말했다.
짠 것처럼 곧바로 곡소리가 튀어나온다.
"나으리! 이런 것도 하나하나 잡으시면 저희 같은 잡것들은 그냥 다 굶어 죽습니다요!"
"우리가 뭐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다음 주 분량을 조금 더 실었을 뿐이잖소! 기일에 맞추려면 이렇게 하는 방법밖에......."
에르제베트가 생긋이 웃었다.
"규정은 규정이라서요."
"......."
선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수염남이 흠흠험! 하고 과장된 헛기침을 하며 걸어왔다. 그러고는 뭔가 돈봉투 같은 것을 그녀의 정장 주머니에 찔러주기 시작했다.
"저, 허허! 많은 건 아닙니다만."
"어머나, 세상에. 저를 뭘로 보고 이러시는 건가요?"
"아하하하! 세상살이가 원래 더불어 사는 삶 아니겠습니까! 팍팍하게 살아봐야 서로가 피곤할 뿐이지요!"
잠시 실랑이가 벌어진 뒤,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돈을 받았다.
"하는 수 없죠. 참, 마침 나도 랭거스틴에 갈 일이 생겼는데......."
"누, 누추하지만 타십시오!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혹여나 에르제베트의 마음이 바뀔까 봐 선원들이 후다닥 번개처럼 배로 올라탔다. 선장이 출항한다! 출항한다! 하고 외쳤다. 빠릿빠릿한 모습이다.
"짠?"
배에 올라탄 에르제베트가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두 팔을 벌렸다.
시몬은 한숨을 푹 쉬었다.
"다 좋은데, 뇌물은 왜 진짜로 받아?"
"그야 인간은 대가를 치러야 비밀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갖게 되니까요."
그녀가 잔망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권력으로 찍어눌러서 배에 올라타면 원망만 받사와요. 이런 식으로 대가가 오가야 저들도 감사해하고, 뇌물도 바쳤으니 괜찮겠지 하면서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낀답니다."
"......근래 들어본 이상한 소리 중에 가장 이상해."
그렇게 시몬과 에르제베트를 태운 배가 물살을 가르며 출발했다.
혹시나 중간에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미 키젠 측에 출항 신고가 끝난 선박이었기에 무사히 결계를 통과해서 중립 해역으로 넘어왔다.
"안전하게 랭거스틴에 들렀다 가시겠사와요? 아니면......."
"서두르자."
시몬이 말했다.
"그레이슨이 데드나가를 발견한 지 시간이 꽤 지났잖아. 최대한 빨리 현장으로 가보고 싶어."
"네, 그럼."
에르제베트가 선장에게 걸어가 말을 걸었다. 이 속도로는 늦을 것 같으니 먼저 랭거스틴에 가보겠다는 이야기였다.
선장은 좋을 대로 하시라며 동의했다. 거의 등이라도 떠밀 기세였는데, 어떻게든 번거로운 그녀를 떼어놓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시몬은 수상전용 고래뼈 언데드, 데이모스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도록 수면에 대기시켜 놓은 다음, 에르제베트와 함께 올라타 배에서 벗어났다.
이내 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지자 시몬은 아공간을 열었다. 스컬윙 부대의 대장, 아케뮤스가 검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에르제베트와 데이모스는 다시 아공간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도련님.]
"잘 부탁해요."
펄럭!
아케뮤스는 시몬을 날개로 감싼 채 공중으로 치솟았다. 새까만 점이 창공을 가르며 나아갔다.
* * *
고공비행 속에서도, 아케뮤스의 깃털 속은 나름대로 포근했다.
이불 속에 몸을 묻은 채 떠 있는 느낌. 소음도 먹먹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미는 심하다.
아케뮤스를 타고 이렇게 먼 거리를 비행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시몬은 컨디션이 극도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세삼 텔레포트 마법진의 위대함을 느꼈다. 시간이 되면 이 마법을 처음으로 개발한 대마법사의 묘지에 꽃 한 송이라도 바쳐야겠다는 잡생각도 잠시 들었다.
[다 왔습니다, 도련님. 바로 저깁니다.]
아케뮤스가 날개를 움직여 앞이 보이도록 해주었고, 시몬은 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탁 트인 바다의 전망 아래로 여러 섬들이 얽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가라온 군도입니다.]
시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여기에 5군단이 있다 이거지.'
사실 매그너스 본인이 이런 외딴 섬에 직접 주둔하고 있을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매그너스는 여전히 시몬을 노리고 있고, 그런 그가 이번 단체시험에 간섭할 생각이라면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군단장 간의 문제에 다른 사람들, 특히 친구들이 휘말리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바로 내려가 보죠."
이번 2학년 단체시험의 후보지 중 하나인 가라온 군도.
후보지인 만큼, 십중팔구 섬을 탐색하러 온 키젠 측 인원이나 그들에게 고용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군단의 칠흑을 어마어마하게 흩뿌리는 아케뮤스가 접근하면 바로 들킬지도 몰랐기에 우선 바다 한가운데에 내려왔다.
이내 아공간에서 작은 배를 꺼내고, 에르제베트의 거미줄로 뒤집어써서 최대한 기척을 숨긴 다음 직접 노를 저어서 섬까지 갔다.
쏴아아아아-
그렇게 도착.
하얀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섬이었다. 파도가 부서지고, 막 알에서 태어난 새끼 바다거북들이 물살을 헤엄쳐서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평화롭네."
[보기보다 특별한 건 없어 보이네요.]
5군단의 공격을 받지 않고 도착한 건 좋았지만, 문제는 생각했던 것보다 섬이 너무 넓다는 사실이었다.
둘이서 섬 전체를 다 뒤지려면 주말로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기에, 우선은 그레이슨의 새가 '데드나가'를 발견한 지역부터 가보았다.
기암괴석들이 가득한 바위지역. 파도가 철썩거리며 몰아치고 있었다.
'여기가 맞는데.'
시몬은 그레이슨의 사념으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옷에 매달려 있는 피어의 분신을 콕콕 두들겼다.
"피어, 뭔가 느껴져요?"
[크흐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군. 낌새조차 없다!]
급한 대로 장거리 비행까지 하면서 오긴 왔는데, 막상 여기서 5군단을 찾으려니 막막하다.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 같은 느낌이다.
[일단 제 아이들을 뿌려놨사와요.]
에르제베트가 뒤를 가리켰다.
수백 마리의 송장거미들이 뽈뽈거리며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찾아내면 바로 알리도록 했어요.]
"수고했어 에르제."
[그럼 이제 섬에서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라도?]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이 섬에 파견 온 키젠 측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들을 찾아서 정보를 캐보자."
[어쩔 수 없네요.]
시몬과 에르제베트는 바로 움직였다.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던 송장거미들이 인간들이 머무는 파견캠프를 찾아냈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캠프에는 10개의 크고 작은 천막이 처져 있었고, 고고학자 같은 갈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썰렁한 농담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불을 피운 흔적이 있고, 바위에는 화장실로 사용한 오줌발의 흔적이 보인다.
[옵니다!]
마침 그중 연구원 두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시몬과 에르제베트는 입을 틀어막고 바위 뒤편에 기척을 최대한 숨긴 채 등을 기대어 있었다.
잠시 후 쏴아아- 하고 적나라한 소리가 들렸다.
[소녀가 시선을 끌겠사와요.]
그녀는 거미줄을 뒤집어쓰고, 연구원과 똑같은 복장을 한 남자의 모습으로 걸어갔다.
"음?"
오줌을 누고 있던 연구원들이 눈을 끔뻑였다.
"당신 뭐야? 우리 캠프인원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그들의 눈에 힘이 풀리며, 몸이 흐물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시몬이 뒤로 돌아와 '슬립' 저주를 건 것이다.
시몬은 이 남자들의 존엄성을 위해 얼른 그들의 바지를 추슬렀다.
이어서 에르제베트가 다가와 남자들의 몸을 뒤적거리며 신분증을 체크한 뒤, 그들이 가진 서류들을 확인했다.
"뭔가 알아냈어?"
[예상대로 키젠의 의뢰를 받고 섬을 조사하는 사람들이네요. 적절한 시험장소를 찾고 있었던 것 같사와요.]
"매그너스나 제5군단과의 연관성은?"
그녀가 다시 한번 꼼꼼하게 서류를 확인했다. 시몬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기다렸다.
[없네요. 그냥 평범한 연구자일 뿐이에요.]
시몬이 한숨을 쉬었다.
그사이 에르제베트는 다시 한번 거미줄을 스스로 뒤집어쓰더니, 이번엔 옆에 잠들어 있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소녀가 직접 정보를 뜯어내고 오겠어요.]
시몬은 연기력이 부족해서 들킬 염려가 있었기에, 에르제베트 혼자서 하기로 했다.
그녀는 천막 근처에 앉아 있는 연구원들 무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자연스럽게 농담을 해댔다.
왜 혼자 왔냐는 물음에, 빌보 그놈이 작은 건 줄 알았는데 큰 거였다며, 냄새가 고약해서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욕을 반쯤 섞어서 말했다. 다른 연구원들도 껄껄 웃으며 받아쳤다.
처음 본 사람의 몇 마디, 그리고 소지품에서 본 자료들을 조합해서 그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역시 첩보일 전문인 에르제베트다웠다.
"근데 말이야."
에르제베트가 천연덕스럽게 주제를 던졌다.
"빌보 그 겁쟁이가 밤에 뱀처럼 생긴 몬스터를 봤다고 염병을 떨던데, 혹시 또 본 사람 없어?"
"아, 빌보가 그거 봤을 때 나도 옆에 있었어."
한 남자가 말했다.
"반대편 섬에 나가처럼 생긴 괴물이 몇 마리 쭉 서 있던데. 막 뼈가 드러나 있어서 언데드 같기도 하고. 괜히 자극할까 봐 가만히 있었지."
"반대편 섬?"
"어어. 게홀라 섬 말이야."
성공이다.
그들에게 더 볼 일이 없어진 에르제베트는 적당히 쿵짝을 맞춰주다가, 다시 오줌이 마렵다는 핑계로 슬쩍 빠져나갔다.
이제 시몬과 에르제베트는 망설임 없이 달렸다.
[바로 저 섬이와요!]
군도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 게홀라 섬이라고 했다.
시몬은 바로 아공간에서 배를 꺼내고 노를 저어서 이동했다.
그러니 과연.
[느껴진다!]
섬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도 피어의 분신이 외쳤다.
[색채가 옅고 희미하긴 하지만, 에이션트 언데드의 기척이다!]
이제는 속도전이다.
시몬은 열심히 노를 저어서 게홀라 섬에 도착했고, 내리자마자 전투를 준비했다.
"이리 와 프린스."
시몬은 좀비를 꺼내 프린스를 불러들이고, 아공간에서 아케뮤스와 헤르세바를 꺼냈다.
에르제베트는 섬 곳곳에 거미줄을 쳐서 결계를 펼친 뒤, 송장거미들을 배치했고 아케뮤스도 공중전을 대비해 스컬윙들을 대기시켰다.
[꼬맹아. 사실 이거 매그너스의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지팡이의 형태를 한 헤르세바가 날아와 말했다. 시몬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5군단이 있다는 게 확실한 이상,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어. 피어! 에이션트 언데드의 기척은요?"
[여전히 단 한 기의 기척만 느껴진다.]
본 아머 상태의 피어가 답했다. 에르제베트가 혓바닥을 달싹였다.
[우후후! 이 기습이 잘 먹히면, 5군단의 위협적인 전력을 여기서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사와요.]
시몬이 피어의 투구를 꾸욱 눌러쓰고는 말했다.
"준비해."
시몬이 한 손에는 파멸의 대검을, 다른 한 손에는 헤르세바를 쥔 채 성큼성큼 걸어갔고, 그 뒤를 에르제베트, 프린스, 아케뮤스가 뒤따랐다.
북부를 지키고 있는 자이로스를 제외하면 핵심 전력을 전부 투입한다.
눈앞에 보이는 건 바위로 교묘하게 가려진 해저동굴. 에르제베트가 손짓을 휙휙 해보더니 말했다.
[결계도 없네요.]
시몬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진입하자."
7군단과 5군단.
두 세력의 전투가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