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11화
메리다 휴 이켈.
전체 4위에 저주학과 대표라는 배경보다도, '판타서스 휴 이켈'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이 더 유명한 인물.
그런 그녀가 본격적으로 오빠와 같은 힘을 각성했다는 건,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판타서스 선배님보다는 늦었지만, 거의 흡사한 능력을 깨우치게 됐대."
메르디아나가 말했다.
"단순 1:1이라면 아마도 시몬 폴렌티아보다 더 강할걸."
"......정말이야?"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아세라즈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메르디아나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그러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침대에 자리 잡은 소녀를 보며 말했다.
"실례할게, 숙면 중에 방해했다면 미안해."
메리다는 불청객의 등장으로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그녀가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잠옷 소매로 눈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다 소매가 내려가고, 서늘한 느낌의 연두색 눈동자가 치켜떠졌다.
"무슨 일?"
수면을 방해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짜증과 분노가 느껴진다.
아세라즈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모, 못 본 사이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가 있나?'
2학년 2학기가 학생들의 성장치가 가장 높았을 때라고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메리다는 독보적이었다.
원래도 Top10이었는데, 거기서 더 강해진 거라면 지금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메르디아나는 태연하게 '봤지?' 하고 중얼거리며 앞으로 한 발짝 더 걸어 나왔다.
"본론만 말할게. 이번 단체시험에서 협력을 제안하고 싶어.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
메르디아나가 이야기를 줄줄 읊어나갔다. 민트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다가 이내 다시 이불에 누웠다.
"관심 없어."
그러곤 이불을 홱 뒤집어썼다.
평소에 잠 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녀였다. 수면욕이 가장 중요하고, 그 외에 다른 모든 욕망은 수면욕의 아래에 있었다.
시몬 폴렌티아를 꺾는다느니, 전체 1위를 노린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메리다의 관심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거 알아? 시몬 폴렌티아는 발락 선배님과의 결투 승패와는 관계없이, 3학년 때 학생회장직을 확정받았어."
메르디아나는 역린을 건드리기로 했다.
"학생회장직을 이대로 허무하게 넘길 생각이야? 넌 '휴 이켈' 가문이고, 판타서스 선배님의 동생이잖아."
판타서스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메리다가 덮은 이불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연히 반응하겠지.'
메리다가 오빠인 판타서스에 집착한다는 사실은 유명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메리다의 유일한 역린은, 존경하는 오빠가 자신이 아닌 시몬 폴렌티아에게 학생회장 자리를 물려줬다는 점이다.
"시몬은-"
그때 메리다의 입에서 자그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격이 있어."
메르디아나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벌써 자격을 시험했단 소린가? 그녀가 시몬을 인정했다는 정보는 듣지 못했다. 언제 또 시몬의 마수가 이 녀석에게까지 뻗쳤단 말인가.
'어쩐다.'
메르디아나가 다른 부분에서의 공략점을 찾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세라즈가 앞으로 나왔다.
"물론 자격이 있으니까, 판타서스 선배님이 널 '거르고' 시몬에게 학생회장직을 물려주셨겠지."
이불 속에 숨은 소녀의 눈이 꿈틀했다.
그녀를 지나치게 자극하면 위험했기에 메르디아나가 말리려 했지만, 아세라즈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판타서스 선배님은 네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모르시잖아? 지금 가진 네 힘을 봤다면 선배님의 생각도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해."
"......."
"네가 시몬을 꺾고 회장직을 차지하면, 그분도 다시 한번 널 돌아봐 주시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시몬에게 회장직을 물려준 이유도 사실은 네게 시련을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
계속해서 여러 떡밥을 던졌더니, 그중 하나에 반응한 메리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가?"
메르디아나는 '잘했어.' 하고 아세라즈를 툭 건들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렸다.
"당연하지. 네가 학생회장직을 목표로 한다면,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
* * *
메리다의 대화를 끝마치고, 두 사람은 저주학과 기숙사에 빠져나와 함께 걸었다.
완전히 설득했다기에는 애매했지만, 그럭저럭 성과는 있었다.
"어떻게 하는지 느낌 왔지? 지금부터는 따로따로 움직이자."
메르디아나가 말했다. 그녀들의 목적은 이번 단체시험에 Top10을 움직여 전체 1위인 시몬을 견제하도록 하는 것.
키젠 학생은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경쟁과 승부욕을 추구한다. Top10에 오를 정도의 거물들은 그런 성향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
그들의 심리를 살살 긁으면 시몬과 싸우게 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은 누가 누구를 만나러 갈지 계획을 짰다.
"절대 안 될 것 같은 사람 있어?"
메르디아나의 물음에 아세라즈는 수첩을 펼쳤다.
그것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말했다.
"전체 8위의 메이린 빌렌느는 힘들겠지."
"아, 그렇네."
상아탑의 메이린은 시몬 학생회 시절에 부회장까지 했던 학생이다.
시몬의 핵심적인 관계자이자, 가장 중요한 조력자 중 하나.
무조건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으으음, 상아탑의 네크로맨서는 까다로워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네."
메르디아나가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세라즈는 수첩에 쓴 메이린의 이름 옆에 X자 표시를 했다.
"그럼 나머지 애들 찾으러 움직여보자. 그 수첩에 정리해 둔 거야?"
"응."
전체 1위 - 시몬 폴렌티아
전체 2위 - 샤텔 마에르
전체 3위 - 헥토르 무어
전체 4위 - 메리다 휴 이켈
전체 5위 - 아세라즈 미켈
전체 6위 - 메르디아나 앤 서든데스
전체 7위 - 엘리사 셀린
전체 8위 - 메이린 빌렌느 (X)
전체 9위 - 엘리시아 로젠펠트
전체 10위 - 쥴 빈체레
수첩을 훑어보던 메르디아나가 말했다.
"소환학과 대표, 무어 가문 도련님은 네가 맡을 수 있지?"
아세라즈가 한숨을 쉬었다.
"별로 친하진 않은데 해볼게."
"혈류학과 대표와 마투학과 대표는 내가 맡을게. 구면이라 말이 잘 통할 거야."
"그럼 난 엘리사를......."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정리한 뒤, 빠르게 움직였다.
시간이 생명인 사안이었다.
* * *
메르디아나는 부단히 걸음을 옮겨서 한 장소에 도착했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되는구나.'
로크섬 내 버려진 고성.
과거에는 왕족들의 기숙사로 쓰였지만, 현재는 담력시험 용도나 시험 장소로 전락한 장소다.
하지만 바로 이곳에, 사실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일급 정보다.
그녀는 랜턴을 들어 올리며 고성의 한 방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도 되지?"
불쑥 그렇게 물은 메르디아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완전히 밤이 되지는 않았지만 커튼이 창가를 가리고 있어서 어두웠다. 그녀는 랜턴을 먼지 쌓인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후욱-
갑자기 랜턴의 불이 꺼지며 주위가 다시 어두워졌다.
"......."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고성 안의 어둠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음침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동자만 굴려 창문을 응시했다.
[.............]
검은 로브를 입은 괴인이 등 뒤에 서 있는 모습이 유리창에 비춰 보였다.
홱!
얼른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왜 이러실까, 꼭 그렇게 숙녀를 겁주고 싶어?"
그렇게 말한 그녀가 커튼을 쳤다.
빛이 들어오며, 비로소 방의 내부가 분간이 되었다.
방의 구석. 새까만 로브를 두른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로브 안에는 교복이 보였고, 피부 곳곳이 괴사된 듯 말라붙어 있었다. 한 손에는 부적 등으로 잔뜩 봉해둔 자신의 키만 한 장검을 검집에 넣은 채 쥐고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네."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두 눈을 모두 마검에 팔아넘겼다는 게."
전체 10위, 마투학과 대표.
마검 사용자, 쥴 빈체레.
원래는 한쪽 동공에만 안대를 쓰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예 두 눈을 붕대로 봉하고 있었다.
완전한 맹인이 된 것이다.
"주위를 분간하는 데 불편함은 없소."
소년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곳까지 무슨 일로 왔소? 싸울 생각이오?"
"로크섬 내부에서 학생 간의 비공식 결투는 중징계감이야. 마투학과 과대면서 모른다고 하진 않을 테고."
어깨를 으쓱한 메르디아나가 미소 지었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 단체시험 때 협력을 제안하러 왔어."
그녀가 장황한 계획을 쥴에게 설명했다.
쥴은 장검을 손에 쥔 채 잠자코 설명을 듣기만 할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녀가 옆으로 느릿하게 걸어가며 말했다.
"마검 사용자는 무언가를 버리느냐에 따라 강해진다고 들었어. 너는 두 눈을 버렸고, 미각을 버리고, 숙면을 버리고, 다른 모든 흑마법에 대한 가능성을 버려야 했지. 뭐, 당사자가 아니라 모르겠지만 내가 나열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을 거야."
그녀가 창가에 쳐진 먼지 쌓인 커튼을 쭈욱 걷어서 햇빛을 드러냈다.
"반면 시몬 폴렌티아는 어땠지?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도 널 정면에서 능가했어. 앞도 보이고, 음식도 즐기고, 낮잠도 자겠지. 너와는 다르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학생회장까지 됐어. 심지어 네가 자랑하는 단 하나, 순수한 전투능력도 너보다 우위야."
그녀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한쪽은 강해지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데, 다른 한쪽은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고도 모든 면에서 앞서지. 이런 게 '불공평'이 아니면 뭘까?"
메르디아나의 혀가 독사처럼 살랑거렸다.
"어때, 저울의 수평을 맞춰볼 생각이 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진 알겠소."
쥴이 목소리를 착 내리깔며 말했다.
"날 자극해서 어떻게든 시몬 폴렌티아와 싸우게 할 생각인 것 같소만."
"눈을 잃고 독심술이 생겼네."
메르디아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나는 이번 시험에서 시몬 폴렌티아에게 다시 도전할 것이오."
스릉!
그가 마검을 살짝 여는 순간, 검 끝에서 불길하기 그지없는 칠흑이 흘러나왔다.
그는 살짝 보이는 마검의 칼날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었다.
"내가 가진 나락이 얼마만큼 그에게 닿을지, 시험하고 싶소."
메르디아나의 눈동자가 요사하게 빛났다.
"그런 거라면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
* * *
로체스트 신 지하수로.
평범한 하수도에 불과한 이곳을 개조해서 쓰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극소수만 알고 있는 정보였다.
물이 졸졸 흘러들며 작은 저수지가 형성된 이곳에는 투명한 함선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유령선에 퉁명스럽게 앉아 있는 한 소녀.
활기 넘쳐 보이는 양 갈래 머리에, 제독 코트를 교복 위에 멋들어지게 두르고 있는 그녀는 사령학과 대표이자 전체 7위, 엘리사 셀린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그녀는 잔뜩 경계하는 투로 불청객을 보았다. 아세라즈는 눈을 감으며 답했다.
"비밀."
"젠장. 그냥 필기공부에 미친 전형적인 모범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하는지 엘리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래나 저러나 하수도를 유령선의 제조시설로 바꾼 건 불법개조였다.
아세라즈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랑 일 하나만 같이하자."
"일? 우리?"
그렇게 되묻던 엘리사가 뒤쪽을 보며 꽥 소리 질렀다.
"거! 뒤에 아재들 조용히 좀 하쇼오!"
유령선 위에 투명한 죽은 선장들과 선원들의 망령들이 맴돌며 술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으하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쬐그만 게 성질머리하고는!]
[제독, 친구도 있었어?]
"닥치쇼! 다 성불시켜 버리기 전에!"
다시 요란한 망령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하라 그런지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녀가 씩씩거리며 망령들을 한번 째려봐 준 후,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미안, 말해봐."
"이번 단체시험에서, 우리가 시몬 폴렌티아를 잡는 데 협력해 줘야겠어."
"뭐어?"
엘리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엘리사 너는 학생회장직에 관심 없어? 신분상승욕이 가득하다고 들었는데."
"됐거든."
엘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1학년이랑 2학년 여론이 어떤지 몰라? 괜히 발락의 대항마인 시몬 폴렌티아를 건드렸다가 피 볼 수 있어. 나 괜한 오해 사는 거 싫거든."
"역시 재상의 딸이라 그런지 평판에 신경 쓰네. 그럼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아세라즈가 말을 이었다.
"너희 아버지 사업이 키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야."
엘리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너 그걸 어떻게......!"
"지독한 정치꾼 집안이라고 들었는데, 분위기 파악을 해줬으면 좋겠어."
엘리사 셀린의 아버지의 신사업은 키젠 본부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닌, 교내 학생복지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학생회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었고, 엘리사는 학생회 권력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몬이 학생회장이던 시절에 그렇게 알랑방귀를 뀌었던 것이다.
"나는 네가 아버지의 발목을 잡는 못난 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맏딸인 엘리사가 키젠 재학생인 상황에서, 재상의 사업에 악영향이 간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컸다.
외교 실패.
즉, 딸의 무능이다.
엄격한 정치인 집안인 셀린가의 가주가 그런 무능을 용서할 리 없었다.
"크, 크윽......!"
얼굴이 벌게진 채 바들바들 떨던 엘리사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외통수다.
아세라즈의 계획이 3학년들, 그것도 신 학생회와 연결되어 있다면 답이 없다.
"아,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냐!"
"협력해 줘서 고마워, 당연하지만 이 모든 사항은 비밀이야. 자세한 계획은 나중에 만나서 설명할게."
아세라즈가 스커트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사가 뚱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Top10들에게도 제안하는 거야?"
"물론."
"다음은 누구한테 가는데?"
"헥토르 무어한테 가볼까 해."
아세라즈가 미소를 띄웠다.
"시몬과 헥토르의 관계는 워낙 유명하니, 이번만큼은 말이 잘 통할 것 같네."
엘리사는 슬쩍 미소 지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