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12화
로크섬의 서부지역에는 황량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다.
본래는 수풀이 무성한 지역이었는데, 과거 이 자리에서 시행된 한 교수의 흑마법 실험이 실패한 이후로, 수백 년간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황무지로 변했다.
모래바람만이 부는 바로 이 황무지의 가장 높고 까마득한 언덕 위에는, 각종 훈련기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훈련하고 있다.
탈의하여 드러난 상의는 건강미 넘치는 탄탄한 복부와 근육들이 보이고, 몸 곳곳은 비늘로 덮여 있다. 한쪽 눈은 파충류처럼 일자 동공으로 변해 있었다.
전체 3위이자, 소환학과 대표인 헥토르 무어.
이곳 황무지 언덕은 그가 개인훈련을 위해 자주 방문하는 장소였다. 특히 이번 임무평가 기간 동안은 내내 이곳에 틀어박혀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우리가 공동의 적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봐."
그리고 지금 이곳엔 불청객이 들어와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로 아세라즈 미켈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라고 믿어, 과대."
쿵!
헥토르가 등에 부착한 시룡의 날개를 떨어뜨렸다. 성큼성큼 걸어가 바위 위에 쓰러져 있던 물병을 붙잡아서 뚜껑을 열고 들이켰다.
꿀떡꿀떡 목구멍이 움직이며 턱 아래로 물방울들이 주르륵 떨어져 목을 타고 흐른다.
툭.
물병을 바위에 올려놓은 헥토르가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의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수업 내내 죽상이더니, 시몬 폴렌티아를 그렇게 의식하고 있었나."
아세라즈가 냉소했다.
"의식하는 거야 피차 마찬가지 아냐?"
"......."
"나와 넌 동류야. 위에 누군가 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지. 우리끼리야 성적이 매번 엎치락뒤치락하지만, 우리 위에 서 있는 녀석은 특별해. 그건 단순한 '벽' 정도가 아냐. 넌 1학년부터 지켜봐 왔으니 더 잘 알 거 아니야?"
그녀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재능의 격이 반칙이라는 걸."
노력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대.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시간 동안 같은 수업을 들어도 그 결과물이 다르게 도출되는 괴물.
특히 이번 타락계 수업에서 아세라즈는 커다란 차이를 절감했다.
"애초에 뛰어넘을 수 없게 설계된 벽을 뛰어넘으려고 애써봐야, 무릎이 까지고 몸만 상할 뿐이야. 그런 벽은 넘는 게 아니라 망치로 부수고 가야 해."
그녀가 운동기구가 어질러진 주위를 자박자박 걸어 다니며 말을 이었다.
"난 시몬을 끌어내릴 거야. 이 학교는 그런 제도가 확립되어 있고,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고 있어. 이걸 써먹지 않는 사람이 바보 아닐까?"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헥토르가 긴 숨을 내뱉었다.
"그건 사실이다."
아세라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처음 학과에서 본 순간부터 느낀 거지만 이 녀석과 자신은 동류다.
이기기 위해, 정상에 서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족속.
"네 협력이 필요해. 이번 시험에서 같이 손을 잡고 시몬을 학교에서 몰아내자. 어때?"
헥토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말하는 꼴을 보니 이 제안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몇 명이나 그 계획에 참가했지?"
"Top10 거의 전원."
아세라즈가 미소 지었다.
"다른 애들은 우상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는 적어도 시몬을 꺾어야 할 경쟁자라고 생각하잖아?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공동의 적이라."
갑자기 공기가 바뀌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모멸에 가까운 냉소를 본 아세라즈는, 뒤늦게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놈은 '나'의 적이다."
헥토르의 음성에서 농밀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악명높은 '드래곤 피어'였다. 아세라즈는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헤집고 지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시몬 폴렌티아를 꺾는 건 반드시 나여야 한다. 내 손으로 꺾을 때까지는, 놈을 같잖은 수작 때문에 학교에서 나가게 둘 수는 없다."
헥토르가 쿵! 쿵! 커다란 발걸음 소리를 내며 아세라즈에게 다가왔다.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넘을 수 없는 벽은 망치로 부수겠다고?"
그가 이죽거리며 덧붙였다.
"패배자 따위가."
"......!"
아세라즈는 전율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번 시험에서 시몬 폴렌티아를 쓰러트릴 생각이었지만, 그 전에 방해되는 네놈들부터 손봐야겠군."
동류가 아니었다고.
이 녀석은 한층 더 미쳐 있었다.
* * *
그날 오후.
아세라즈와 메르디아나는 함께 걸으며 일의 경과를 주고받았다.
"헥토르 무어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네."
메르디아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낙엽색 머리카락이 각진 웨이브를 자랑하며 흔들렸다.
"그 정도 악연이라면 당연히 협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그래도 유령선 엘리사의 협력을 얻어냈다니까 됐어."
이번엔 아세라즈가 물었다.
"마투학과 대표 쥴과, 혈류학과 대표 엘리시아는?"
"쥴은 시몬 폴렌티아를 잡는다는 목표에는 동의했지만 따로 움직이려는 것 같고, 엘리시아는 자꾸 말을 빙빙 돌리네."
"?"
메르디아나는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는 듯 눈을 감았다.
"티타임만 세 시간째 붙들려 있었는데, 대화에 진전이 없었어. 좀 이상한 애야. 머리에 나비라도 들어 있는 것 같아."
아세라즈도 엘리시아의 그런 소문을 들어본 적 있었다.
혈묘족.
그리고 미래를 엿보는 소녀.
Top10이지만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아니, 애초에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메르디아나가 눈을 치켜떴다.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되든 크게 문제없어. 이제 곧 만나게 될 녀석이 가장 중요해."
이곳은 로크섬 북부, 콜로브 산맥.
그녀들은 늦은 시간에 산을 오르고 있었다.
"다 왔다."
산등성이에 올라오니 커다란 초가집이 보인다.
마치 자연인의 오래된 거주지 같은 모습이다. 보통의 사람이 사는 것 치고는 상당히 거대했는데, 문도, 창문도, 심지어 바닥에 놓인 신발이나 항아리 같은 것도 컸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거인 혼혈 샤텔 마에르는 어린 시절에 산에서 인간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나 봐."
메르디아나가 주위를 쭉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이 집도 그때의 추억 때문에 지은 것 같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어."
그런 이야기엔 관심이 없는 지, 아세라즈는 창문으로 집 안을 확인했다. 이내 곧바로 마법진을 펼치고 광범위 탐색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가 손으로 옆을 가리켰다.
"이쪽."
그녀들은 초가집에서 조금 더 내려가서, 산 중턱에 위치한 커다란 동굴을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갔다.
"자연 생성된 동굴이 아냐. 샤텔이 산에 구멍을 뚫었나 보네."
앞장서서 걸어가던 메르디아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금방 걸음을 멈춰야 했다.
마법으로 막혀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세라즈가 즉각 주위에 마법진들을 꺼냈다.
"마법진 해킹을 시도해 볼게."
"오, 역시."
아세라즈의 손가락이 피아노 치듯 움직였다. 샤텔의 마법진에 자신의 마법진을 연결한 뒤 보안 수식을 하나하나 무력화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메르디아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소환학과에 간 거, 후회해?"
"......."
"넌 모든 영역에서 재능이 있었잖아."
아세라즈가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떴다.
"후회 안 해."
"그렇담 다행이고."
우웅!
마침내 그녀가 새로운 룬어를 마법진에 삽입하자, 모든 보안수식이 해제되며 마법진이 사라졌다.
두 사람은 동굴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조심해."
얼마 걷지 않아 드러난 동굴의 끝에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있었다.
아세라즈가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어둠 저편을 응시했다.
산의 내부가 커다랗게 파여서 방대한 규모의 인공동굴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이 올라온 산은 겉보기에 멀쩡했다. 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이런 비현실적인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칠흑대지계 마법의 스페셜리스트인 샤텔뿐이리라.
그 순간.
"아!"
두 사람이 딛고 있던 동굴 바닥이 훅 꺼졌다. 두 사람의 몸이 즉각 중력에 의해 곤두박질쳤다.
"뭐야?"
메르디아나가 인상을 구기며 교복 소매에서 '벌'들을 꺼내고, 아세라즈도 흑마법을 준비했다. 그러나 갑자기 지면 한쪽이 기둥처럼 올라와 두 사람을 받아내 움직였다.
그녀들은 이 공간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석상' 앞에 멈춰 섰다.
투둑.
툭.
인자하게 웃고 있는 석상의 얼굴에 금이 가면서 갈라지고, 그중에서 눈 부위가 박살 나며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이 튀어나왔다.
아세라즈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결계를. 깼군.]
안에 들어 있는 건 역시나 샤텔 마에르였다.
[수련 중에. 무슨 볼일이지.]
"제안할 게 하나 있어."
메르디아나가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반 시몬 폴렌티아 동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샤텔 마에르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 * *
"후욱! 하아!"
임무평가 기간 동안 시몬이 훈련장소로 정한 곳은 '금지된 숲'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른 학생들에겐 극히 위험한 곳이겠지만, 시몬은 여기가 익숙했다.
특정 시간대에 순찰하는 파수꾼 외에는 인적도 없고,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시몬은 목이 타오르고, 폐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전력을 다해 금지된 숲을 내달렸다. 숲의 지형지물을 자유자재로 피하면서 점점 속도를 올렸다. 체육복은 금방 흙으로 더러워졌고 이마에는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좋아, 좋아.'
컨디션이 쾌조다. 초원에서 다쳤던 다리도, 레이트에게 베였던 상처도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다.
-크르르르르.
마침 이 숲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금지된 숲에 자주 출몰하는 몬스터, 웨어울프였다.
'간다!'
시몬은 달리는 속도를 높이고, 두 손은 깍지끼듯 모아서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이내 두 손을 쫘악 벌리는 순간, 야광처럼 번쩍이는 에메랄드빛 칠흑이 액체처럼 주욱 늘어졌다.
시몬은 그대로 두 손을 머리 뒤로 보낸 뒤, 힘껏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시몬 오리지널 - 친위대>
나무 위.
바위 옆.
후방.
곳곳에서 시몬과 함께 달리고 있던 스켈레톤의 몸이 에메랄드빛으로 번쩍이더니 친위대로 변모했다. 그들이 청록빛 망토를 휘날리며 총탄처럼 튀어나가 검을 휘둘렀다.
촤릉!
촤아악!
시몬에게 달려들던 웨어울프들이 모조리 조각나 바닥에 흩뿌려졌다.
"나이스!"
시몬은 이번 시간 동안, 기본기를 특히 갈고닦았다.
그리고 친위대 또한 준비시간을 단축해서 기본기 급으로 쓸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제는 블러드 골렘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더 빠르게 시전할 수 있었다.
터엉!
수풀이 울창한 숲을 빠져나온 시몬이 절벽을 딛고 날아올랐다.
-께에에에에!
이번엔 숲의 하피들이 소란을 듣고 덤벼든다. 시몬이 팔을 뻗자, 곧장 소환형 언데드로 만들어둔 스컬윙 한 마리가 날아왔다.
텅!
시몬이 스컬윙 위에 올라탔다. 이내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손을 내리치는 것으로, 하늘에서 청록빛 섬광이 날아와 스컬윙에 깃들었다.
<친위대>
우우웅!
뼈로 이루어진 스컬윙 날개가 끝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했다. 그대로 돌파하여 하피들의 몸통을 찢어버렸다.
"잘했어!"
시몬은 스컬윙에서 뛰어내려 계속해서 달렸다.
금지된 숲에서도 꽤 깊은 곳, 여기서부터는 중형, 대형 몬스터들이 출몰한다.
-거어어어어어!
인간보다 1.5배는 큰 홉고블린이 뛰어오고 있다. 시몬은 침착하게 아공간을 열었다.
철컥! 철컥!
이번에는 아공간에서 굵고 두꺼운 뼈들이 튀어나왔다. 나오는 즉시 형태가 변화하며 갑옷의 형태로 형태를 바꾸었다.
<시몬 오리지널 - 본 헤비아머>
거대 갑옷에 탑승한 시몬이 다시 한번을 손가락을 내리자, 공중에서 청록빛 섬광이 벼락처럼 내려오며 '친위대' 상태로 변한다.
시몬을 집어삼킨 대형 뼈 갑옷이 맹렬하게 돌진하는 모습은, 마치 요새 한 채가 움직이는 것과도 같았다.
쿠우우우웅!
콰아아앙!
본 헤비아머가 홉고블린 떼를 향해 돌진했다.
압도적인 힘과 파괴력.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도 헤비아머의 동선에 있던 홉고블린들은 곤죽이 되어 주변에 널브러졌다.
슬쩍 갑옷 사이로 빠져나온 시몬이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개문!'
시몬이 오버로드를 들어 올려서 몬스터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지만, 아차 싶었다.
습관이 무섭다고. 오버로드를 바닐라 그룹에 맡겨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본 스피어>
그래서 다른 마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거대한 본 아머가 공중으로 올라가 장창 형태로 변해 몬스터를 연달아 내리찍어 분쇄했다.
이내 죽은 몬스터들로부터 필요한 재료들을 챙긴 시몬이 손바닥을 털며 걸어 나왔다.
[크흐흐! 인상적이군!]
시몬의 신기술을 확인한 피어가 미소 지었다.
[필요한 순간과 타이밍에 친위대를 짜낼 수 있는 건 물론, 친위대가 부여된 순간의 형태 변화에 더욱 집중했나!]
"네. 이렇게 해야 혼돈 마법과 데스나이트, 본 드래곤까지 이어지도록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본 드래곤이나 데스나이트 같은 강력한 기술을 손에 넣기 직전일수록, 기본기가 중요했다. 지금의 시몬에게 반드시 필요한 훈련이었다.
"후우."
시몬은 그렇게 금지된 숲을 정면으로 돌파했고, 저 멀리 도시가 보인다.
학생도시 로체스트였다.
"가볼까."
그리고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렸던 벤야 바닐라와의 미팅날.
드디어 필요한 것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