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21화
[바로 저들이 내 영토에 발을 디딘 자들이느냐.]
얼굴을 가린 투구 속에서 절도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일지어니, 그 누구도 살아서 이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살고 싶다면 사력을 다하여 발버둥 쳐라.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파멸만이 있으리.]
그녀의 팔이 들어 올려졌다.
[나는 화산성주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의 말에 응답하듯, 분화구의 마그마가 다시 한번 솟구쳤다. 화산성주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그리고 뒤에 있는 한 사람.
'......너무 심취하신 거 아닌가.'
화산성주의 돌발행동을 말리기 위해 따라온 조교가 땀을 삐질 흘렸다. 그녀 또한 붉은 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일반 병졸 차림이었다.
짝. 짝. 짝.
그리고 뒤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또 한 명의 사람.
"훌륭합니다. 아주 훌륭하오! 대공!"
엔돌라스 보드빌이었다.
화산성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대공이라니 무슨 실언을 하는가. 이 자리에서 나는 화산성주이니라.]
"아, 하하! 그랬지요!"
앤돌라스는 처음엔 네프티스의 돌발행동에 화를 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무려 현역 군단장을 시험관 자리에 앉히다니! 이 무대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자가 있을까.
[나는 네프티스 님께 맹세했느니라.]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었다.
[이 시험 동안 주어진 힘, 사용할 수 있는 권한, 그 모든 것을 쏟아부어 도전자들에게 맞서겠다고.]
그녀가 천천히 주먹을 쥐자, 붉은 글러브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것은 진검승부다. 악역을 자처했으니, 도전해 오는 자들을 위해서라도 온 힘을 다할 것이니라. 그것이 그들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니.]
조교가 쓰게 웃었다.
'글쎄,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화산성주가 된 진 아르스칼트는 현재, 탈락한 학생은 퇴학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단지 네프티스가 직접 찾아와 부탁했고, 명령받은 대로 군인답게 철저히 이행할 생각뿐이었다.
가장 무서운 화산성주가 만들어진 셈이다.
저벅 저벅.
등을 돌린 그녀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화산성 내부로 걸어갔다.
화산성의 꼭대기 층.
그곳에는 커다란 왕좌가 있었고, 그 옆에는 용암을 빚어 만든 듯한, 붉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활이 놓여 있었다.
우우우웅-
활의 칠흑이 충전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그녀는 그것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누가 제일 먼저 내게 도달할지 궁금하구나.]
군단장으로서 사용하던 그녀의 주무기인 '광풍의 활'.
그것과 똑 닮은 외형이었다
* * *
레흘론 군도에서의 단체시험은, 화산성주가 출현한 뒤로 그 난이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
우선은 화산성주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분화구에서 마그마가 끊임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화산 쇄설물과 파편이 혜성처럼 떨어져 숲과 섬을 초토화시키고, 지면에는 마그마가 홍수처럼 흘려내려 닿는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휩쓸어 버렸다.
극한의 생존환경.
그리고 이 모든 용암 속에서 용암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자연재해를 피해 다니는 동시에 끊임없이 시험장 전역에 충원되는 몬스터의 공격까지 버텨내야 했다.
-쉬지 말고 계속 달려!
-위! 위를 봐! 머리 조심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산 몬스터들의 움직임까지 달라졌다.
화산이 떨어진 곳에 일어난 몬스터들은 그냥 주위에 보이는 학생들을 공격하는 게 전부였지만, 갑자기 전술적인 움직임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마그마의 범위로 유인하거나 바닷길을 막는 등 전술적인 움직임까지 보였다.
편한 방법 따위는 없다. 학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위기를 돌파할 수밖에 없었고, 탈락자들이 속출했다.
[밀레나 하츠가 탈락했습니다.]
[스베라 마티우스가 탈락했습니다.]
바다를 타고 넘쳐흐른 용암들은 시작지점의 섬을 모두 초토화시켜 버렸다. 학생들은 배를 타고 중앙섬으로 옮겨가거나, 더 멀고 외딴 섬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았다, 우리는 살았어!"
외딴 섬으로 가는 2인조가 손을 번쩍 들며 웃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화산성에서도 공격이 진행되고 있었다. 2인조 중에 오른쪽의 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엔키, 이제 어디로 갈까?"
[엔키 다프트가 탈락했습니다.]
"엔키?"
그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틀림없이 같은 배에 타 있던 동료가 사라져 있었다.
저 멀리 펑! 하고 솟아오른 바닷물이 그의 마지막을 알려줄 뿐이었다.
"아, 아니. 뭐에 당한 건데......?"
화산성에서의 공격에, 학생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시험장의 공포는 학생들을 점점 더 극한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남은 시간 : 22:10:54]
[생존자 수 : 288/370]
* * *
화산성주가 출현하고 시험의 난이도가 극단적으로 올라간 지금, 키젠 학생들은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받았다.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는 데 집중할 것인가.
혹은 화산 꼭대기에 있을 화산성주를 잡아서 이 시험을 끝낼 것인가.
"화산성주를 잡으러 가야 해."
시몬의 생각은 후자였다.
그는 딕과 신디 비바체에게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퇴학당할 거야. 진짜 친한 친구가 탈락한 뒤에 움직일 결심을 하면 늦어.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해."
두 사람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겠지만, 딕은 금방 고민을 접고 히죽 웃으며 시몬의 손을 붙잡았다.
"좋아, 네가 있는데 못 할 거 뭐 있냐? 한번 해보자고!"
시몬과 함께하며 여러 역경을 넘었던 딕은 결단도 빨랐다.
반면 신디는 조금 더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더 생각하다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화산성주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 생존이 제일 중요해."
"이해해."
"그래도 전체 1위 옆에 붙어 있는 게 생존에 유리한 것도 사실이니까."
신디가 시몬의 손을 붙잡았다.
"동료로서 도울 수 있는 데까진 최대한 도울게. 대신 위험하다 싶으면 난 너희들을 버리고서라도 살아남을 거야."
시몬이 씩 웃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
그렇게 시몬은 딕과 신디와 함께 밀려 내려오는 용암을 피해 이동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산을 타고 분화구에 떠 있는 '화산성'에 진입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있는 산비탈 쪽으로 용암이 끊임없이 내려오는 바람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우회해서 올라가는 길을 찾자."
딕이 말했다.
"이 넓은 산 전체가 계속 흐르는 용암에 덮여 있진 않을걸? 분명히 올라갈 수 있는 루트가 있을 거야."
시몬도 딕의 말에 동의했고 다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걷지 않아, 일행은 다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왜 그래 신디?"
앞장서서 걷고 있던 신디가 뭔가에 골똘히 집중하고 있었다.
쫑긋 쫑긋.
그녀가 귀를 몇 번 쫑긋거리더니 말했다.
"애들 소리가 들려. 숫자는 일곱 명에서 여덟 명 정도?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나 봐."
"!"
그녀는 이들 중에서 가장 탐지에 능한 네크로맨서였다.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다른 정보는?"
"으음, 소리를 들어보니까 여기서 나온 용암 몬스터들이랑 싸우고 있나 봐. 숫자가 많아서 위험해 보이는데."
그 말을 들은 시몬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구하러 가자."
딕이 움찔했다.
"야, 괜찮겠어? 기껏 도왔다가 우리랑 싸우려고 하면 어쩌려고."
학생들의 알력 다툼으로 요새를 잃은 딕은 염려스럽다는 반응이었지만, 시몬은 고개를 내저었다.
"상황이 바뀌었잖아. 이제는 키젠 학생 모두가 힘을 합쳐야 이 시험을 승리로 끝낼 수 있어. 한 명이라도 더 전력이 필요해."
"으으음...... 그 말도 맞긴 한데. 좋아, 가보자고. 대신 메르디아나 쪽 애들이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튀는 걸로."
그들은 신디가 소리가 들렸다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흑마법이 펑펑 터지는 소리가 시몬의 귀에도 들렸다.
"저기다!"
마그마에서 일어난 용암 괴물들이 한 무리의 학생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전세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한참을 싸우면서 여기까지 온 걸까. 그 학생들은 옷이나 장비가 성한 곳이 없었다.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펼치려던 마법진이 중간에 뭉개지기도 했다.
"큭!"
싸우다가 바닥에 쓰러진 한 여학생을 향해 용암 몬스터가 입을 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몬은 지체 없이 지면을 짓밟고 뛰어나갔다.
"개문!"
촤르르르르르륵!
바닥에서 일어난 거대한 칼날이 일자로 그어졌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용암 몬스터들이 일제히 멈칫하더니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동시에 시몬이 손바닥을 펼치고 주먹을 내리꽂는 시늉을 했다.
"친위대!"
공중에서 에메랄드빛 섬광이 떨어져 오버로드의 긴 몸체에 코팅되었다. 은빛의 칼날이 선명한 청록빛으로 변했다.
<시몬 오리지널 - 테러 블레이드>
"참격이야!"
후우우우우웅!
두 배나 길어진 오버로드의 칼날이 시몬의 팔이 휘둘러진 방향으로 허공을 한번 그었다.
그러자 칼날 끝에 맺힌 검기가 초승달형태로 날아가 용암 몬스터들 수십 마리를 일제히 갈라 버렸다.
"누, 누구?"
공격받던 학생들이 고개를 돌려 시몬을 보았다.
"우리도 간다!"
딕과 신디도 뒤따랐다.
딕은 아공간에서 포션병을 한 움큼 붙잡아 던졌다.
이내 병에 걸린 인챈트를 해제하는 것으로, 포션을 담은 병이 새하얗게 얼어붙더니 깨져나가며 그 안에서 푸른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파스스스스스!
용암 몬스터들이 급속 냉각효과에 식어버리더니 그대로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타닷! 탓! 탓! 탓!
신디는 고양이 같은 몸놀림으로 쇄도해, 용암 몬스터들의 머리 위를 툭툭 한 대씩 때리며 지나갔다.
<휴엘라(Huella)>
이내 그녀가 손짓하자, 꽝! 소리와 함께 용암 몬스터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찌부러진 그들의 몸에는 하나같이 커다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도와주러 왔나 봐!"
"사, 살았다."
공격받던 무리의 학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심할 때가 아니야! 우리도 반격해!"
이내 공격받는 학생들까지 반격으로 전환하며 나머지 용암 몬스터들을 모두 무사히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전투가 끝나는 순간, 그들 모두가 바닥에 주저앉거나 쓰러졌다. 다들 하나같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다.
시몬은 걸어 다니며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버로드. 그 재수 없는 소환수를 쓰는 사람이라 누군가 했더니."
그중에서는 시몬이 아는 얼굴도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한쪽만 긴 앞머리로 눈을 가린 금발의 소년이 다가왔다.
"말콤!"
전 특례 10번 입학생이자, 저번 학기에 선도부장을 맡았던 말콤 랜돌프였다. 그가 히죽 웃었다.
"일부러 도와주러 와서 고맙다."
"당연히 도와야지."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네가 이 무리를 이끌고 있었어?"
시몬의 물음에 말콤이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도 그냥 부하에 불과해."
말콤이 옆으로 턱짓했다.
한 여학생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시몬의 눈이 커졌다.
'이 녀석은.......'
"힘이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렸거든요. 당할 뻔했네요."
머리에 두 개의 커다란 귀가 튀어나와 있는 여학생.
다름 아닌 혈류학과 대표이자, 전체 9위.
괴짜로 이름 높은 그녀는 다름 아닌.
"엘리시아 로젠펠트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