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29화
"우리 여기서 그만두자."
잠시 화산성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몇몇 학생들은 침을 꼴깍 삼키기도 했다.
"뭐, 뭐를 그만두자는......."
"이 시험 말이야."
메르디아나가 웃는 얼굴로 손목에 찬 출력장치를 보았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전체 생존자는 155명이야. 딱 좋지 않니? 그냥 이대로 멈춰 버리면 우리 329기는 이 155명만을 기점으로 돌아갈 거야.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이 학교는 우리 수중에 떨어지게 되는 거지."
"......."
"다들 늘 느끼지 않아? 우리 기수가 유독 많다는 거. 장학금, 동아리 자금, 그 외에 뭐 하나 사소한 것도 경쟁이 붙어. 너희들 중에서도 자리가 꽉 차서 원하는 학과를 가지 못한 애들도, 원하는 수업을 듣지 못한 애들도 있을 거야."
그녀가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시험을 끝내 버리면 모든 게 달라져. 상상을 해봐! 모든 재화와 지원이 우리에게 집중되는 거야. 교수님들의 직속제자 자리도 빌 거고, 동아리 부장 자리, Top10 자리, 학생회 자리까지."
그녀가 주위의 학생들을 둘러보며 점점 목소리를 높여 나갔다.
"키젠에서도 너무 많은 학생들이 퇴학했으니 살아남은 우리만큼은 무조건 졸업시키려고 할 거야. 지긋지긋한 퇴학의 공포도 이제는 끝! 완벽해. 더 이상 손해 보지 말고,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성과를 떡 하니 누리기만 하면 돼!"
메르디아나가 두 팔을 벌렸다.
"이게 뭐가 나빠?"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때 공략대원들 중 한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애초에 네 제안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
"우리가 여기서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화산성주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어."
"가만히 내버려 두던데?"
메르디아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여기는 안전지대야."
그녀는 이곳에 온 경과를 설명했다.
전체 4위, 메리다에게 배신당하고 Top10 난전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메르디아나와 아세라즈는 전략을 처음부터 완전히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바뀐 계획은 화산성에 가장 먼저 올라타는 것.
두 사람은 화산성주가 나타나는 24시간이 다 되기 전에 분화구 근처까지 도착해 있었다.
만약 화산성이 나타난다면, 이 레흘론 군도의 최정상이자 모든 지역에서 접근이 가능한 중앙화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예상대로 분화구 속 마그마에서 화산성이 올라왔다.
이후 메르디아나는 몸을 감추는 모종의 흑마법을 사용해서 아세라즈와 함께 화산성 내부에 아무도 모르게 잠입했다.
성안에 들어와 있으니 두 사람은 공격받지 않았다. 잠입할 때 썼던 흑마법을 벗어도 마찬가지. 애초에 1층부터 2층까지는 병력이 없었고, 외부에서 용암도 들어오지 않았다.
완벽한 안전지대였다.
"하지만 3층부터는 화산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어서 가보진 못했어. 꼭대기 층에는 화산성주도 있고. 화산성주가 진 아르스칼트라는 건 너희도 알지?"
그 이름의 무게에 몇몇 공략대 학생들이 흠칫했다.
"애초에, 학생이 현역 군단장을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을까? 어째어째 비등비등하게 갈 수 있다고 해도 여기 있는 인원 중에 살아남는 건 2~3명밖에 안 될걸."
메르디아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들이 만약 지면? 이대로 시험이 끝나게 돼. 그럼 키젠은 누구 손에 떨어진다?"
그녀가 밖을 가리켰다.
"자기 살기 바빠서 군도에서 가장 멀거나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 덜덜 떨고 있을 놈들의 손에 떨어진다."
메르디아나는 외부에 가상의 적을 만들고.
"그딴 놈들에게 이 학교를 넘길 거야? 우리는 시험에 떨어져서 일반인으로 돌아가는데, 그딴 놈들만 키젠이랍시고 떵떵거리면서 인생 펴는 꼴을 그냥 편히 지켜볼 수 있어?"
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간의 유대감을 형성한 뒤, 외부의 적에 대한 적대감을 끌어올린다.
"어차피 화산성주를 잡을 수 있는 건 우리뿐이야. 잘돼봐야 본전이고, 안 되면 모든 걸 잃어. 우리가 남 좋은 일을 왜 해야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멈추면 끝이야.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노력과 성과를 온전히 누리자."
그녀가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키젠답게 말이야."
상대는 진 아르스칼드.
미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자극하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속삭이며, 가장 안정적이고 평온한 결말을 속삭인다.
여기서 그만하자고.
이 정도면 잘했으니 충분하다고.
과연 어떤 인간이 이런 유혹에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우리도 한 가지 요구사항이 있어."
이번엔 아세라즈가 앞으로 걸어 나와 손끝으로 시몬을 가리켰다.
"시몬 폴렌티아를 넘겨줄 것."
"......."
"우리 Top10들도 석차 한 등급 정도는 올라가야 메리트가 있잖아? 그리 어렵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해."
공략대 학생들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시몬에게로 향했다.
시몬은 덤덤한 반응이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무거운 정적 속.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그때.
"하핫."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하하."
모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이마를 가리고 입을 찢으며 웃고 있는 한 사람.
"고마워, 아세라즈. 솔직히 말하면 좀 흔들렸었는데."
신디 비바체였다.
그녀가 이마에 올린 손을 내렸다.
"네가 시몬을 탈락시켜야 한다고 언급해 주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드네."
"?"
"아까 여왕벌이 뭐라고 말했더라? 자기 살기 바빠서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 덜덜 떨고 있을 놈들?"
신디가 팔을 들어 올려 출력장치를 가리켰다.
"그럼 이건 뭔데?"
[도전자들이 봉인석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또 뭔데?"
[다윈 캐러딘이 탈락했습니다.]
[아멜리 피시번이 탈락했습니다.]
[카니스 맥그로리가 탈락했습니다.]
다른 공략대 학생들도 하나둘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출력장치를 바라보았다. 탈락 메시지가 계속해서 출력되고 있었다.
"샤텔이 화산을 막고 있는데 이 무수한 탈락자들은 뭘까? 또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걸까? 그럴 리가."
신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밖에 애들도 지금 이 순간까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단 뜻이야. 우릴 위해, 우리가 화산성주를 잡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
"이 길이 맞아.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이 정도(正道)야. 모두가 힘을 합쳐서 승리의 길로 가고 있는데, 이 키젠에서 유일하게 방해가 되는 것들."
그녀가 팔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싸우고 있는데 화산성에 틀어박혀서 시몬 폴렌티아를 어떻게 잡을지만 궁리하던, 바로 너희 둘뿐이야."
메르디아나와 아세라즈의 표정이 굳어졌다.
"참. 우리의 성과란 말도 틀렸다. 이건 우리의 성과가 아니다."
그때 또 한 명의 남학생이 걸어 나와 아래를 가리켰다.
"화산성에 틀어박힌 너희들은 모르겠지. 우리를 여기까지 올려보내느라 일부러 희생한 애들도 있었다. 자기들이 퇴학당할 수 있는데 화산성주의 화살을 맞기도 했지. 이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을 운반해 준 말총머리의 여학생, 기네비어가 걸어 나왔다.
"키젠답게라고? 그 어떤 교수님도 꼬리를 말고 등을 돌리는 게 키젠답다고 가르친 적은 없는데."
그녀가 칠흑을 일으켰다.
"키젠답게, 이기기 위해 뭐든지 하겠어."
모두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공략대 전원이 상기된 얼굴로 결연하게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지켜보던 헥토르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혹하는 쓰레기가 있으면 먼저 태워 버릴 생각이었다만."
쥴과 엘리사도 자세를 다잡았고, 앞장서 있던 시몬도 칠흑을 끌어올렸다.
'쩝, 안 통하네.'
메르디아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세라즈. 일단 물러나서......."
"정말-"
아세라즈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꽈악 깨물었다. 그녀의 눈이 희번득 뒤집혔다.
"이해가 안 돼!"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세라즈가 모든 칠흑을 개방했다. 뒤쪽에 있던 마도골렘들이 즉각 반응하며 몸에 박힌 마법진을 펼쳤다.
"그냥 여기서 끝내면 우리 모두가 이득이잖아! 약한 놈들은 탈락하는 게 경쟁이잖아! 승리? 뭐가 승리인데? 그냥 우리가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게 승리 아냐? 굴러들어온 기회를 안 잡고! 잘해도 본전인 미래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너희들 제정신이야?"
그녀가 발악하듯 소리 질렀다.
"제발! 제발 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라고! 감정에 휘둘려서 이해 안 되는 멍청한 짓거리 좀 하지 말고!"
그때 뒤에서 스피릿의 꼬리를 일으킨 신디가 주먹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아세라즈가 흡! 하고 제 목을 붙잡았다.
"뭐 이쯤 되면, 불쌍하네."
"끄으으으윽!"
목을 붙잡힌 아세라즈가 눈을 부릅떴다. 세 개 마도골렘의 마법진이 일제히 열리더니 수백의 크고 작은 흑마법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각종 원소 칠흑계와 저주. 맹독이나 혈류마법까지. 몇십 명이 쏘는 것 같은 흑마법의 향연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러서!"
공략대 키젠 학생 두 명이 앞으로 뛰쳐나와 두 팔을 벌렸다. 커다란 문이 일어나고, 배리어 마법진이 펼쳐지며 흑마법을 막아냈다.
그 바람에 사령마법이 취소된 신디가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거두어들였다.
"저딴 패배자들에게 할애할 시간 따윈 없다."
헥토르가 자세를 낮췄다. 단번에 비늘이 덮이고 날개가 붙더니 덩치가 커지며 시룡의 형태로 변했다.
[내가 맡을 테니 가라.]
시몬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돌아봤다.
"괜찮겠어?"
[4위 녀석이 있으면 내 대타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헥토르가 등에 업힌 메리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난리 와중에도 아주 잘 자고 있었다.
이내 용으로 변한 헥토르가 자신의 전면으로 마법진을 펼치고는 입을 벌렸다.
<드래곤 브레스>
후와아아아아아아악!
일그러진 검은 화염이 중간이 텅 빈 터널의 형태로 뿜어져 나와 아세라즈의 마법을 물리치고, 마도골렘을 밀어냈다.
[가라!]
터어어엉!
헥토르가 살벌하게 날아올라 골렘 한 기를 다리로 낚아채 벽에 박살 냈다.
"고마워!"
"먼저 간다!"
시몬과 학생들이 빠르게 헥토르가 만든 화염 속으로 들어갔다.
"안 놓쳐."
옆으로 살짝 물러난 메르디아나가 흑마법을 시전하려 두 팔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검격이 그녀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
"그대의 상대는 이쪽이오."
마검 손잡이를 붙잡은 쥴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 결국 그쪽에 붙었구나. 박탈감은 극복하셨어? 마검 사용자."
"느물거리지 마시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오. 손속을 두는 일은 없을 터이니."
세 기의 마도골렘 중 하나를 박살 낸 헥토르가 이내 공중에서 아세라즈를 노려보았다.
아세라즈가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었다.
"헥토르 무어! 분명 너와 난 같은 동류라고 생각했는데!"
[불쾌한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의 입이 벌어지며 입구멍에 칠흑이 일렁였다.
[너는 그저 패배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