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34화
공강일 오후.
오랜만에 늦잠을 잔 딕은 눈을 비비며 잠에서 일어났다.
"후으으으암."
해가 중천에 뜨고, 기숙사는 한적하다.
설렁설렁 걸어가 기숙사 내부 매점에서 아침밥을 샀다. 한 손에는 뜨거운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든 채 밖으로 나갔다.
"웃차."
샌드위치는 입에 물고, 나가는 길 책장에 꽂혀 있는 학생 신문과 잡지를 쥐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호르릅-
뜨거운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비로소 죽은 것 같던 뇌가 깨어난다. 신맛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신문을 훑어보고 있는데.
"헤이, 딕!"
저 멀리서 빗자루를 든 기숙사 관리원이 다가왔다.
하수인이 키젠 학생을 이름으로 호칭하는 건 극히 보기 드문 광경이었지만, 딕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형님! 무슨 일이에요?"
그러고는 과장된 동작으로 두 팔을 들어 보였다.
"이번 시험에 살아 돌아온 아우가 너무 반가우신가? 안아드려?"
"헛소리하긴."
딕의 이마를 살갑게 툭 친 하수인이, 이내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찔렀다.
"너 여자친구 있냐?"
"네?"
"웬 여학생이 기숙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랑 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던데, 무슨 사이야?"
"엥, 여자애? 누가요?"
"몰라. 가서 확인해."
"예뻐요?"
"가서 확인해 인마."
하수인이 딕의 뒤통수를 살갑게 툭 때렸다. 딕은 껄껄 웃으며 아직 포장도 다 뜯지 않은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하수인이 그것을 받으려는데 딕이 휙 다시 되돌려서 입안에 한 움큼 넣고 빈 껍데기를 그의 손에 얹어주었다.
하수인이 낄낄대며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고는 이내 크게 한마디 외쳤다.
"다시 한번 이번 시험에서 살아 돌아온 거 축하한다, 딕!"
딕도 뒤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하수인의 말대로 기숙사 정문 앞에 나가보았다.
'......누구?'
교복도 일상복도 아니고, 갈색 로브를 입은 채 후드를 꾹 눌러쓴 여학생이 서 있었다. 손에는 짐가방 같은 게 들려 있었다.
딕이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어, 음. 누구신지?"
덥석.
다짜고짜 딕의 손목을 붙잡은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딕은 그녀에게 반쯤 끌려가며 말했다.
"아, 뭔데 이래!"
휘익-
아까 딕과 담소를 나누었던 하수인이 휘파람을 불었다. 딕은 그런 거 아니라는 듯 얼른 손사래를 쳤다.
이내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근처에 인적없는 공터.
"아, 누구신데 자꾸 이러실까."
딕이 붙잡혔던 손을 빼내며 말을 이었다.
"무슨 소문을 듣고 왔는진 모르겠지만, 난 정체를 밝히지 않는 사람하고는 거래 안 해."
그 말에 여자 쪽에서 후드를 벗었다. 이내 드러난 얼굴을 본 딕의 입이 벌어졌다.
"아, 아세라즈 미켈?"
쉿.
그녀가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권태로움이 뒤섞여 있었고, 입가에는 달관한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딕이 어깨를 으쓱했다.
"시몬을 떨어뜨리려고 했으면서 무슨 낯짝으로 날 찾아왔냐? 뭐, 학과 내 여론 바꾸는 방법이라도 알려달라고?"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제보할 게 있어."
이내 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딕에게 건넸다.
딕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혹시나 뭔가 저주가 걸려 있지 않으려나 앞뒤로 휙휙 확인한 그가 이내 편지지를 꺼내 읽었다.
"이건......!"
이내 딕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세라즈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3학년 신 학생회가 날 사주해서 시몬 폴렌티아를 떨어뜨리려고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
"아, 아니. 스톱스톱......! 나 지금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런데. 잠깐만."
딕이 잠깐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응시했다.
"이런 걸 나한테 주면, 시몬 이전에 너부터 신 학생회의 타깃이 될 텐데?"
"그럴 일은 없어."
그녀가 또 하나의 서류를 꺼냈다.
"난 오늘부로 자퇴했으니까."
"......!"
그것은 정말로 자퇴서였다.
담당교수인 아론의 서명과, 부총장 제인의 도장까지.
'이번 시험이 원인이겠지.'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딕은 숨을 길게 한번 내쉬고는 뒤쪽 나무에 등을 붙이고 팔짱을 꼈다.
"떠나기 전에,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3학년 학생회에 복수라도 하겠다 이건가? 아님 뭐, 시몬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거나."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창한 이유들은 아냐."
"오, 그럼?"
"변덕."
그녀가 다시 후드를 눌러쓰고는 등을 돌렸다.
"대답이 됐으려나?"
"......."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보던 딕이 편지를 흔들며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자! 이건 이번 사태의 당사자인 시몬한테 줘야 하는 거 아냐? 왜 나한테 주는 건데?"
"그걸 시몬 폴렌티아에게 주면-"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활용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 녀석은 여론전이니, 모략이니, 정치니,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러고는 딕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넌 달라 보여서."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딕이 이내 입술을 씰룩였다.
"제대로 알아보셨군."
* * *
반 발락 대책회 아지트.
사무실로 개조한 이곳 자재창고에는 대책회 학생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책자를 정돈하고, 로체스트 시위 일정을 체크하고 있었다.
"하아."
그리고 중앙 책상에 앉아 있는 2학년 여학생.
클라우디아 멘지스는 이마를 찌푸린 채 서류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활동 동력이 부족해.'
학기 초, 시몬이 학생회장에서 물러난 이슈로 촉발된 반 발락 대책회는 강력한 입김을 뿜어냈고, 시위를 몇 차례 성공시켰으며, 심지어는 영향력 있는 학부모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해 3학년 교수들을 긴장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학기가 시작된 지금은 너무 바쁜 학사 일정 때문에 학생들의 관심이 멀어지고 있다. 거기에 대책회는 신 학생회의 거센 반격에 직면한 상황.
클라우디아의 대책회 학생들에게 교묘한 페널티가 주어지고 있었다. 이들 인원이 속한 동아리의 예산이 삭감된다거나, 번거로운 행정 절차가 추가된다거나, 받고 있던 교내 혜택이 감쪽같이 삭제된다거나, 선도부에게 사소한 일로 붙잡혀 벌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한 부분을 항의하려고 해도, 소타 프쉬케의 솜씨인지 페널티가 교내규칙과 연관되도록 교묘하게 적용되고 있어서 항의할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 신 학생회는 '시몬이 발락과 합의했다.', '3학년에 학생회장 자리를 확정받았다.'라는 논리로 여론전을 펼치고 있었다. 어느새 일반 학생들도 이 이슈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황을 되짚어가던 클라우디아가 인상을 썼다.
'무엇보다 2학년들의 군기를 잡으면서 실력을 행사한 신 학생회는, 이제 회유책으로 돌아가고 있어.'
채찍과 당근.
차후에 쓸 예산까지 최대한 박박 긁어서 수행평가 기간에 간식을 제공하거나, 화장실이나 비품을 고쳐주는 등 학생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챙겨주었다. 학생들도 '이번 학생회도 꽤 괜찮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아에게는 위기였다.
"선배님, 그래도 이번 단체시험에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곰 같은 인상에 덩치가 커다란 1학년이 다가와 커피잔과 디저트를 내려놓았다.
"커피 드시고 하시죠."
"고마워."
클라우디아는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그러다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엔디가 안 보이네?"
"아."
곰 같은 1학년이 고개를 숙였다.
"엔디는 이번 시험에서 떨어져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
커피맛이 씁쓸해진 클라우디아가 잔을 내려놓았다. 지금 시기의 키젠 1학년들에게 퇴학은 흔한 일이었다.
"1학년들은 고생이네 정말."
"버텨내야죠. 선배님들도 다 겪은 시기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은 다들 학사생활로 바쁘고, 신 학생회의 여론은 반전되고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클라우디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고 있는데.
"헤이이!"
콰앙!
강의실 문을 발로 박차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대책회 학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쪽을 보았다.
"클라우디아 있냐!"
그의 등장에 곰 같은 1학년이 인상을 부라렸다.
"당신 뭐야. 왜 함부로 들어와서 소란이야?"
한 덩치 하는 남학생이 눈을 부라리며 위협하자 딕의 눈이 좁쌀만 해졌다.
뒤에 앉아 있던 클라우디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만둬.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동기야."
"아."
클라우디아의 말에 그 1학년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실례했습니다, 선배님."
잠시 쫄아 있던 딕이 비로소 음하하! 웃었다.
"에잉, 새끼. 귀엽기는."
그가 1학년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너 막 캠퍼스에서 그렇게 눈 부라리고 다니지 마라. 어? 형이 성격 좋아서 참는 거야. 그리고 너희 동기 중에 아서 블레만 알지? 특례 2번! 걔가 형 말 한마디면 끔뻑 죽어요."
"딕."
클라우디아가 턱을 괴었다.
"1학년 괴롭히지 말고, 왔으면 용건을 말해."
"으흐, 그러지 뭐."
딕이 으스대며 다가오더니, 옆의 의자를 끌어당겨서 클라우디아 앞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세상 자연스럽게 포크를 집더니, 아까 덩치 큰 1학년이 커피 디저트로 준비했던 푸딩을 집어서 한입에 삼켰다.
"미안, 아침에 샌드위치 하나밖에 못 먹었더니 배가 고프네."
곰 같은 1학년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감히 클라우디아 선배님 앞에서 저리 건방지게......!'
"용건이 없으면 나가줄래? 바빠서."
클라우디아는 딕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딕은 씩 웃으며 교복 재킷을 열었다. 그러고는 편지봉투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 뭔데."
"읽어보기나 해."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그러다 두 동공이 급격히 확 커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이거! 어디서!"
너무 놀라서 말까지 더듬는 클라우디아의 모습에, 딕이 낄낄대며 말했다.
"아세라즈 본인한테 직접 받은 거야. 오늘 자퇴했어."
와락!
감격한 클라우디아가 달려들어 딕을 끌어안았다.
곰 같은 1학년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주먹을 입에 처넣었다.
'클라우디아 선배님을 저런 놈이!'
이내 클라우디아가 뒤로 물러나 딕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너 이거 장난 아니지? 출처는 확실하고? 나 진지해!"
"아, 확실하다니까 그러네."
간신히 진정한 클라우디아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이내 편지를 딕에게 돌려주고는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준비해! 내일 정규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이 일을 널리 퍼뜨려야 해! 버나는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대책회 애들 전부 소집하고! 코널리는 로체스트에 내려가서 인쇄소에 대자보 지금 바로 출력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
"물어봐야 소용없어."
딕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딕에게로 향했다.
"로체스트 쪽 인쇄소는 지금 예약 물량으로 꽉 차 있어. 그리고 거기 직원 한 명이 신 학생회의 끄나풀이거든? 대자보 뽑는다고 거길 가면 바로 선도부가 들이닥칠걸."
클라우디아가 창백한 얼굴로 손톱을 깨물었다.
"그럼 어떻게......!"
"랭거스틴 쪽에 연락해서 대자보 뽑아달라고 연락해 놨어. 편지 내용 그대로 실었고, 30분 뒤에 500장 완성이야. 오늘 오후 로크섬으로 들어올 선박 물량에 슬쩍 끼기로 했어."
착.
딕이 명함 하나를 꺼내 클라우디아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4시간 뒤 세관일 끝내고 하얀소 상단 소속 5번 창고에 물량 들어온다. 항구에서 바로 옮겨서 이리로 가져와."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딕을 보았다.
"참! 그리고 지금쯤 전체 5위의 아세라즈가 자퇴했다는 사실이 전교에 싹 퍼졌을 거야. 다들 그 이야기만 하고 있을걸? 왜 자퇴했는지 궁금해서 팔짝 뛰고 있겠지. 그 뒤는 너희들 차례야. 너희가 이유를 알려주는 거야."
딕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자보를 어디에 붙여야 사람들이 많이 보는지 그런 장소 선정이나 위치 같은 거. 너희들 전문이잖아. 신 학생회에서 움직이기 전에, 동시다발적으로 쫙 붙여야 해."
클라우디아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들 움직이자. 대자보가 항구에 도착하는 즉시 움직이는 거야. 로체스트 광장이랑 학생회 건물은 피해. 거기 붙여봐야 직속 학생회 하수인들이 와서 뗄......."
"앞으로 네 시간 뒤."
딕이 소매를 걷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예언 하나 하자면, 학생회 직속 하수인들은 그 시간에 모종의 사태로 자리를 비우게 될 거야. 급식실에 폭발물이 설치됐다는 무명의 신고를 받을 예정이거든. 아마 시답지 않은 작은 이슈로 끝나지 않을까? 아, 그냥 그럴 것 같다고."
"......!"
"그러니 하수인들 걱정 없이 광장에 붙여도 될 거라고 봐."
웃차차.
딕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려 걸어갔다.
"선배님."
곰 같은 덩치의 1학년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흐흐흐!"
딕이 바로 그런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가리켰다.
"미래 학생회장의 브레인이라고 해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