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51화
-발락에 대한 도전권이요. 이제 학생회장직을 돌려받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시몬이 본부 직원과 만나 면담하기 약 두 시간 전.
그보다 앞서 시몬은 한 사람을 먼저 만났었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을까?
기숙사에 도착한 시몬을 부른 건 3학년 소환학과 대표의 레오나드였다.
그는 늘 그렇듯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지만, 시몬은 살짝 긴장했다. 최근에 있었던 메리다와 샤텔 사태 때문에 말을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시몬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용건이었다.
-전에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 3학년 2위와 만날 약속을 잡게 해주겠다고.
-아!
소문만 들었던 3학년 전체 2위.
어떻게 본다면 이번 학생회장직 쟁탈전의 핵심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리모와르가 널 찾아.
* * *
시몬은 바로 그 전체 2위를 만나러 레오나드와 함께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키젠 교내 도서관.
슬슬 중간고사를 앞둔 시점이었기에 학생들이 많았다. 빈자리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입구에서 도서관 안으로 들어오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건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시몬은 걱정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반면 레오나드는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리모와르를 만날 때마다 몇 마디 넌지시 건네보기는 했는데, 별 관심이 없어 보였거든. 최근에는 이런저런 일로 흥미가 생겼는지 너랑 만나보고 싶다는 것 같아."
"아, 네. 그렇군요."
"이쪽이야."
시몬과 레오나드는 시험공부 중인 학생들로 바글거리는 곳을 지나, 오래된 책과 문서들이 가득한 도서관 끝으로 왔다.
천장까지 닿아 있는 책장에 고서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이곳은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놓치지 말고 뒤에서 잘 따라와."
"넵."
레오나드는 무수한 책장과 장서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다녔고 시몬은 그 뒤를 바짝 붙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까 봤던 책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같은 구역을 계속 빙빙 돌고 있어?'
레오나드의 표정은 진지해서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내 시몬은 이질적인 현상을 눈치챘다. 그저 같은 장소를 반복해서 돌고 있는데 주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나둘 보이던 학생들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고, 책 넘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모와르의 저주가 걸리길 기다린 거야. 그녀와 만나려면 이렇게 해야 하거든."
이면세계.
마치 거울 속에 들어온 것처럼, 고서들의 글자와 방향이 거울로 비춰보는 방향으로 정립되었다. 세상은 음울한 빛으로 가득 찼고, 도서관은 스산한 침묵에 휩싸이게 되었다.
"됐네."
이어서 몇 바퀴 더 돈 레오나드가 손짓했다.
"이제 그리모와르를 만나러 가자."
도서관의 끄트머리.
공부하는 학생들로 가득하던 도서관이 텅 빈 장소로 변해 있었다. 놀란 시몬은 연신 눈만 깜빡였다.
'이건 대체 무슨 흑마법인 거야?'
교내에서 허가받지 않은 흑마법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까지 자주 들락날락하는 키젠 도서관에 떡 하니 이런 흑마법을 걸어놓고 숨어 있을 정도라면 절대로 들키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그리고 실력이 있으리라.
시몬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창밖을 보았다. 보통의 하늘이나 키젠 교정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지러운 색감이 뿌려진 세계다.
"창밖은 보지 않는 게 좋아."
레오나드가 충고했다.
"정신이 나가거나 미쳐 버릴지도 모르니까. 아, 마침 저기 앉아 있네."
시몬은 흠칫했다.
어두워진 도서관 책장 위에, 난데없이 부엉이들이 자리 잡고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부엉이들을 거느리듯 앉아 있는 여자.
교복이 아닌 검은 거적때기를 몸에 두르고, 그 아래로는 맨다리와 맨발바닥이었다. 무릎에는 검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여 있었으며 머리엔 거적때기와 연결된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다.
'이 사람이구나.'
이 음울한 분위기의 여학생이 3학년 전체 2위 그리모와르.
그녀는 전체 2위지만 학과대표가 아니라고 했다. 이번 신 학생회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높은 자리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일까 싶기도 했다.
"기다렸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시몬 폴렌티아."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다소 차갑고 이형의 목소리다. 그녀가 손짓하자,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처럼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나타났다.
시몬은 가볍게 묵례한 뒤 자리에 앉았다. 레오나드도 옆자리에 걸터앉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편한 곳에서 보자니까, 굳이 이런 멀미 나는 곳으로 부른 이유가 뭐야?"
"지켜보는 자들의 눈은 어디든지 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레오나드의 푸념을 일축한 그녀가 시몬을 응시했다.
"너도 내게 할 말이 있는 눈치구나."
"......."
시몬은 부정하지 않았다.
조용히 아공간을 연 뒤, 저주인형 하나를 꺼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 선배님이 한 짓이죠?"
볏짚으로 엮은 저주인형에는 시몬의 머리털 하나가 매여 있었다. 중간에는 못이 꽂혀 있는 모습.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일이다. 국경을 넘기 전 시몬이 신성방어학 테스트를 치를 때, 누군가 저주인형을 써서 시몬을 방해했었다. 이후 시몬은 계속 누구의 소행인지 찾고 있었다.
"맞다. 내가 했다."
그녀는 부정하지도 않았다.
모른 척한다면 여러 심리전이라도 걸 생각이었던 시몬은 조금 멍해졌고, 레오나드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라고? 그런 이야기 난 못 들었어."
"모든 걸 네게 이야기해 줄 이유는 없다, 레오나드."
"그리모와르!"
"도서관에서는 정숙."
그녀가 긴 후드를 붙잡아 살짝 이마 쪽으로 당겼다.
다시 시몬이 물었다.
"왜 그때 저를 방해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넌 발락과 싸워서는 안 되니까."
그녀의 양홍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네가 여러 과정을 거쳐 데스나이트를 손에 넣으면 결국 발락에게 도전하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소타 프쉬케와 의견이 일치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야기가 다르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오나드가 그렇게 소리치자, 그녀가 검지 끝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뒤편의 책상이 회전하더니 레오나드의 몸을 반대편으로 넘겨버렸다. 시몬은 레오나드의 기척과 칠흑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걸 느꼈다.
"도서관에서는 정숙.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손을 내리며 시몬을 응시했다.
"시끄러우니 방해꾼은 잠시 이탈시켰다. 대화를 속행하지."
시몬은 심장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본인의 영역이라지만 레오나드 선배를 저렇게 쉽게......!'
생각지 못했던 그리모와르와의 단독 대면.
식은땀이 흘렸지만 당황해서는 될 일도 안 된다. 시몬은 애써 태연히 말했다.
"제가 발락과 싸우면 안 된다고 하셨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발락과 싸우면 너는 죽는다."
그녀가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암서(暗書)에 대한 대책은 있나?"
"암서요?"
"발락이 속에 품고 있는 최악의 악이자, 죽음의 비기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방금 찻잔이 들려 있던 손안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수정구'가 나타났다.
"이미 발락은 암서를 너에게 한번 사용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수정구는 시몬과 발락이 싸우는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물론 시몬도 기억하고 있었다.
저번 학기, 에이젤을 쓰러트리고 나타난 발락과의 마지막 교전에서, 서로의 공격이 서로에 목에 닿으려고 하던 그 순간이었다.
발락이 늘 쓰고 있던 금속 마스크가 잿더미로 변해 사라지고, 그의 벌어진 목구멍으로 끔찍한 뭔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원소나 생명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아귀 떼를 모아 엮은 듯한 원색적인 어둠의 뱀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발락.
물론 그 바로 다음 장면에 결투에 교수들이 난입했고, 특히 저주학 교수 바힐이 직접 그 흑마법을 막아냈다.
"그래, 네가 맞을 뻔했던 그 기술이 암서다."
수정구를 사라지게 한 그리모와르가 말했다.
"암서란 게 대체 뭐죠?"
"설명하기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맞은 대상의 목숨을 빼앗는 죽음 그 자체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발락이 '아크 팔라딘'을 죽였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방심하는 틈을 타 암서를 사용했다면 죽이는 게 가능했겠지. 네게 암서를 사용했을 때 바힐 교수는 비슷한 저주로 집어삼켜 파훼한 것 같지만, 그 또한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을 거다."
그녀가 시몬을 보았다.
"키젠 교수도 그럴지언정, 너로서는 암서를 막을 수 없다."
"......."
시몬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하지만 제가 이번에 도전권을 쓰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장소에서 싸우게 될 거예요. 과연 발락이 그런 기술을 사용할지는......."
"적의 자비와 안일에 네 목숨을 걸겠다는 건가."
시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모와르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는 교수들이 사전에 허가되지 않은 결투를 막는다는 명목이 있었으나, 이번엔 다르다. 무엇보다 발락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다. 보통의 인간과는 사고방식이 달라."
지금까지 발락이 암서를 쓰지 않은 건, 대부분 그에게 도전했던 학생들이 발락의 맹독마법 선에서 쓰러졌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당시 맹독마법을 확실히 뚫을 수 있던 자는 학년 내에 에이젤뿐이었는데, 발락 또한 에이젤과의 승부를 중요시했기에 패배할지언정 그에게 암서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몬이라면 다르다. 이미 한번 시몬을 죽일 기세로 암서를 썼고, 다음에는 누구도 간섭하지 못할 만큼 더 확실한 순간에 사용할 것이라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도전을 포기해라, 시몬 폴렌티아. 그와 싸우면 네가 죽는다."
그 말을 들은 시몬은 선선히 웃었다.
"무슨 말씀이신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서 잘 모르는 남의 이야기만 듣고, 상대와 싸워보지도 않은 채 두 손 놓고 포기할 수는 없어요."
사선이라면 충분히 많이 넘었다.
군단장으로서든, 학생으로서든,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적들 중에서는 시몬의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자들이 더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선배님의 경고는 새겨듣겠습니다. 암서 대처법을 마련해 볼게요. 하지만 말리신다고 해서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그가 등을 돌려 돌아갔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리모와르가 말했다.
"잠깐."
시몬이 걸음을 멈추었다.
"암서의 대처법은 내가 가지고 있다."
"......."
"내가 도와주겠다. 암서에 대해서는 발락 다음으로 가장 잘 아는 게 나다."
시몬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절 도우시려는 거죠?"
그녀가 눈을 감았다.
"2년 전, 발락의 몸에 깃들어 있던 암서를 끄집어내고, 쓸 수 있도록 도운 건 나니까."
"......!"
"내 후배가 암서에 죽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내버려 두기엔, 아무리 나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녀가 손을 움직이자 커다란 지팡이가 튀어나왔다.
"대신, 내게도 조건이 있다. 발락을 이긴다면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을 맹세해라."
그녀의 말에 시몬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우선 그 부탁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 * *
그 사건 후, 시몬은 키젠 본부 직원에게 발락에 대한 도전권을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본부 직원은 시몬의 뜻에 동의했지만, 현재 발락은 외부에서 학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돌아오고 정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시몬에게 양해를 구했다.
본부 직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2주에서 3주 정도의 시간.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는 시점을 생각해 두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 시몬도 시험공부는 해야 했고, 무엇보다 데스나이트의 컨트롤을 익히는 데 시간이 조금은 필요하니 기꺼이 동의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만에, 시몬이 도전권을 사용했다는 소식이 교내에 파다하게 알려졌다.
-드디어 시몬 폴렌티아가 움직였다!
-발락에게 도전을 선언했대! 직접 선봉에서 불을 붙인 거지!
시몬은 그저 자신의 일정에 맞춰서 결투를 신청한 것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장작더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2학년 전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지!
교내 무차별 결투신청의 서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