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57화
경기 시작.
심판의 그 외침이 들리는 동시에.
-체내 칠흑 격화.
엘섬 펜지는 상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시야가 거꾸러지고, 난데없이 바닥에 쓰러진 채 머리가 짓밟혀 있었다.
"?!"
경기 시작 초 단위 안에 벌어진 일.
경기장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크웁!"
쓰러진 엘섬이 한쪽 팔로 바닥을 짚고 억지로 다리를 차올렸다. 에이베스는 손바닥으로 공격을 받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시작부터 꼴불견인 모습을......!'
마투라면 이쪽도 뒤처지지 않는다. 칠흑역학과 중에서는 최상위권이라 자부할 정도.
물론 엘섬의 진가는 칠흑 수류계였다. 그가 한쪽 팔을 움직여 등 뒤에 짊어진 수레바퀴 형상의 아티팩트를 만졌다.
'가장 빨리 쓸 수 있는 흑마법으로 단번에......!'
터덕.
턱. 턱.
그때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캐스팅이 취소되었다. 전면에서 빨간 뿔테안경을 쓴 에이베스가 손을 휘두른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엘섬이 잽싸게 뒤를 돌아보니 금속의 작은 뭔가가 아티팩트 표면에 붙어 있었다.
'표창?'
표창의 표면에 새겨진 문자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아티팩트 쪽으로 넘어왔다. 아티팩트에 새겨진 마법진이 일제히 오작동을 일으켰다.
'마법진 해킹인가? 아니!'
상대의 마법진에 수식과 회로를 강제로 삽입해 문제를 일으키는 흑마법.
바로잡는 데 5초면 충분하다. 그가 다시 아티팩트를 붙잡고 수정하려 했으나.
쩌어어어억!
에이베스가 그런 시간을 줄 리가 없었다. 난데없이 신발 앞창이 엘섬의 눈앞까지 나타났고, 발에 찍힌 엘섬이 '크아압!' 소리를 내며 뒷걸음칠 쳤다.
"뭐 하는 거야 엘섬! 방심하지 마!"
옆에서 엘리사의 외침이 들렸다. 엘섬은 네가 와서 상대해 보라고 외쳐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퍼버버버벅!
경기는 완전히 에이베스의 페이스로 넘어와 버렸다. 그녀의 주먹이 엘섬의 복부를 다져댔고, 충격을 연달아 받은 그가 비틀대며 뒷걸음질 쳤다.
"훕!"
팔꿈치를 들어 그녀를 찍으려 했지만, 가볍게 회전하면서 피한 그녀가 왼쪽 종아리를 걷어차서 엘섬을 무릎 꿇리고, 머리채를 붙잡은 뒤 무릎으로 콧잔등을 찍었다.
뿌드드드득!
코가 짓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엘섬의 고개가 젖혀지며 쌍코피를 왈칵 뿜어냈다.
'뭐냐 이게.'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읽히고 있다.
수치스럽다. 이렇게 마법진 한번 못 쓰고 당할 수는 없다. 그의 눈에 힘이 빡 들어갔다.
'다음 공격은 무조건 반격한다!'
부우우웅!
오른쪽에서 그녀의 발차기가 날아오고 있다.
'왼손으로 가드하고 오른손에 착검으로.......'
"방어 후 착검이지?"
'!'
틀림없이 직선으로 날아오던 발차기의 방향이 수정되며, 에이베스는 가드를 올리려던 그의 왼팔을 다리로 뱀처럼 휘감았다.
"이 동작을 보여주면 2학년들은 다들 그렇게 해."
이내 엘섬의 팔을 타고 발레 하듯 빙그르르 돌아온 그녀가 손바닥으로 엘섬의 오른손을 찰싹 때렸다. 그가 오른손에 준비하던 '착검'이 거짓말처럼 풀려 버렸다.
'아니!'
"홍펭 교수님 류의 마투 스타일 분석은 끝났어. 2학년들은 모두 그분께 배우잖아."
빠아아아악!
뒤이어 안면에 충격을 받은 그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잔뜩 오기가 생긴 엘섬은 쓰러지는 것보다 빠르게 일어나 오른팔을 뻗었다.
"큽!"
"3.7M 우측에 '워터 블래스트' 마법진."
엘섬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그는 워터 블래스트를 준비하려 했으나, 이미 그가 마법진을 펼치려는 곳으로 좌표 장애 효과가 부여된 표창이 먼저 날아가고 있었다.
'그럼 뒤에!'
"후방에 '타이달 웨이브' 마법진. 소용없어."
도대체 언제 펼쳐놨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등 뒤에 에이베스의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좌표 혼동 마법이다.
엘섬의 마법을 사전에 차단한 에이베스가 돌진했다.
"제길!"
<홍펭 오리지널 - 취타>
엘섬이 취타를 휘감은 오른팔을 휘둘렀지만 에이베스는 갑자기 바닥에 쑥 꺼지듯 사라졌다가, 오뚝이처럼 불쑥 일어나 엘섬의 앞에 차렷자세로 바짝 붙었다.
너무 가까이 붙어버리니 당황한 엘섬이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 에이베스의 오른 다리가 섬광처럼 치밀어 턱을 걷어차 버렸다.
'대체.'
엘섬은 억울해서 아이처럼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경기가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하고 싶은 건 아무것도 안 되고, 상대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고 있다.
네크로맨서가 된 뒤로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엘섬 펜지 : 6%]
[에이베스 퀸타나르 : 92%]
'진정하자, 이건 팀전이다. 화산섬 단체시험에서 배운 게 있지 않은가!'
밀려나던 그가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깍지꼈다. 에이베스의 표창이나 좌표방해 마법진이 닿지 않는 곳, 아예 한참 떨어진 거리에 장거리 마법진 두 장을 펼쳤다.
<워터 블래스트>
'내가 다음 공격에 끝나더라도 게이지는 깎고 당한다!'
그러나.
에이베스는 코앞에 있는 엘섬을 마무리하지 않고, 하늘을 날 듯 옆으로 도약했다.
퍼억!
그리고 저 멀리 펼쳤던 장거리 마법진을 발차기로 부숴 버렸다. 마법진은 마치 부서지는 유리창처럼 와장창 박살 났다.
'마투로 마법진을?'
쩌엉!
이내 반대쪽 마법진까지 날아가 부숴버린 에이베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엘섬에게 되돌아왔다.
"미안. 일말의 희망도 짓밟아서."
그녀가 멍해 있는 엘섬의 얼굴을 칠흑이 휘감긴 주먹으로 후려쳤다.
쩌어어엉!
귀가 뻥 뚫리는 타격음과 함께 엘섬이 쓰러진 방향으로 모래폭풍이 휘몰아쳤다.
관중석의 학생들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리거나 머리카락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이내 폭풍이 가시고.
심판이 손이 들어 올렸다.
"승자, 에이베스 퀸타나르 학생입니다."
* * *
이후의 경기도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퍼어억!
"승자, 에이베스 퀸타나르 학생입니다."
쩌어어어어억!
"승자, 에이베스 퀸타나르 학생입니다."
으적!
꽈드드드득!
"승자, 에이베스 퀸타나르 학생입니다!"
3학년 한 사람의 원맨쇼에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에이베스는 줄줄이 나오는 2학년 세 사람을 쓰러트렸다. 스코어는 순식간에 4:0. 맷집이 좋은 엘섬이 잘 버틴 편이었고, 다른 학생들은 꿈틀하지도 못하고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려 패배했다.
"크헉!"
금설 마법을 쓰는 설원성주 라헤임마저도 그녀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주위에 눈을 깔고 빙판을 만들어 그녀를 견제하려고 했지만, 에이베스는 예상했다는 듯 발밑에 마법진을 걸고 자유자재로 뛰어다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딕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메이린은 꿍한 표정이었고, 카미바레즈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시몬이 딕을 바라보았다.
"에이베스 선배님은 어떤 네크로맨서야?"
"신 학생회에 들어가기 전엔 3학년 마투학과 대표였어."
그렇게 대답한 딕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설명 다 끝난 거 아닌가? 저 여자가 이 학교 최강의 마투사라고."
겉보기에는 신장이 보통 여학생들보다 조금 클 뿐, 전체적으로 마른 체형에 빨간 뿔테안경을 끼고 다니는 전형적인 모범생 인상이지만, 사실은 마투학과의 톱이었다.
그런 그녀의 장기는 극단적인 초단기결전.
상대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을 토대로 상대가 하려는 모든 행동을 차단, 억제하고 마투로 강제 승부하게 한다. 상대의 눈짓만 봐도 뭘 하려는지 간파할 만큼 심리전과 분석력이 뛰어나다.
"거기에 에이베스 선배, 마투학과 대표면서 필기 성적은 3학년 전체 1위래. 300년 마투학과 역사에 전례가 없는 학생이라나 뭐라나. 진짜배기 문무겸장이란 거지."
딕이 그렇게 말하며 턱을 괴었다.
"묘사하자면 마투 잘하는 메이린 같은......."
퍽!
즉각 얼굴이 빨개진 메이린이 딕의 팔뚝을 때렸다.
"야! 묘사를 해도 진짜!"
"아악! 아프다고!"
"그리고 케이스가 완전 달라! 난 칠흑원소계가 메인인 상아탑의 네크로맨서거든!"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내가 나갔다면 저렇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을 거야."
"저 안경 누나 발차기를 얼굴에 처맞고도 그런 생각이 나올까 싶다. 암튼-"
실실대며 농담을 한 딕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경기는 어느새 라헤임도 나가떨어지고, 마지막 주자인 엘리사가 나섰다. 그러나 그녀도 상당히 고전하는 모습이다. 혼령화 상태로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 배경을 모르고 에이베스 선배를 이기려 했으니 상대가 될 리가 있나."
카미바레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분이 왜 전체 7위에 머물러 있을까요?"
"실은 공략법이 있거든. 3학년들은 동기인 에이베스를 잘 알고, 3년 내내 싸워오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체득했으니까."
딕이 손끝을 세웠다.
"단적으로 말해 경기 시작 후 5분만 넘어가도 에이베스 선배의 승률은 60% 아래로 떨어져. 발락이나 에이젤 같은 진짜 거물들에게는 안 먹히기도 하고. 같은 마투학과 학생이 상대면 에이베스 선배의 승률도 떨어지지."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지금만큼은 마투학과가 한 명도 없는 게 아쉽네."
"어어, 대진운도 안 따랐지."
여기서 마검사용자 쥴이 나왔다면 해볼 만한 승부였을 테지만, 그런 가정법은 사실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 경기는 엘리사의 혼령화가 끝나 버렸고, 결국 에이베스가 가까이 붙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양상이 되어갔다.
"끄흡!"
얼굴을 크게 얻어맞은 엘리사가 바닥을 거칠게 굴러다녔다.
'진짜 아무것도 못 하겠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구슬이 달린 목걸이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에이베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대 사령술사전 전용 아티팩트였다.
엘리사가 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게다가 유령선은 쓰지도 못했어.'
주위에는 유령선들이 뒤집혀 있거나 거꾸로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유령선은 그 어마어마한 무게와 덩치 때문에 아공간이 열리고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바로 그 약간의 틈에 에이베스가 공간 앵커라고 불리는 이상한 아티팩트를 아공간에 던져놓으니, 아공간에서 유령선이 빠져나오려는 순간 방향이 뒤틀리며 뒤집히거나 거꾸로 튀어나와 땅에 처박힌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공간에서 유령선을 꺼내면 그만인 줄 알았다.
차마 엘리사 본인도 몰랐던 약점. 상대를 완벽하게 분석하지 않으면 쓰지 못할 전술이다.
'그 짧은 시간에 370명 가까이 되는 2학년을 전부 조사하고 공략했단 말이야?'
쩌어어억!
엘리사가 1학년 때 배운 서투른 마투로 방어자세를 취했지만, 가볍게 옆으로 우회한 에이베스가 엘리사의 머리채를 붙잡아 당겨 그녀의 균형을 흐트러뜨린 뒤, 칠흑이 실린 주먹을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고위귀족 학생들이 질색하는 도그파이팅까지. 그야말로 승리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모습이다.
'이대로 나까지 당하면 6:0. 2학년의 사기는 바닥을 칠 거야.'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도, 엘리사의 동공에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하다못해!'
덥석!
악에 받친 엘리사가 피를 흘리며 뛰어들어 에이베스의 허리를 양팔로 힘껏 붙잡았다.
'?!'
당황한 에이베스가 떼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에이베스를 번쩍 들어서 방향을 틀었다.
"지금이야! 쏴!"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던 유령선의 포문 하나가 움직였다.
<스피릿 캐논>
스피릿이 실린 포탄이 엘리사와 에이베스를 동시에 덮치며 폭발했다. 그녀들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크으으......!"
흙먼지 속에서 에이베스가 입가를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끼고 있던 뿔테안경이 박살 나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왜 그런 멍청한 짓을......!"
그때 심판이 손을 들어 올렸다.
[엘리사 셀린 : 3%]
[에이베르 퀸타나르 : 0%]
"엘리사 셀린 학생의 승리입니다."
경기가 시작된 후 거의 처음으로, 2학년 관중석에서 작게나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해가 안 되네."
이건 상정 외의 사태였다. 심지어 온실의 화초처럼 자랐다는 명문 셀린가의 엘리사가 한 짓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에이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고 하나 할게. 실전에서도 그런 짓을 하면, 잘해도 동반자살이고 못하면 체력이 좋은 나만 살아남겠지. 미친 짓이야."
"알 게 뭔데요."
바닥에 쓰러진 채 옷이 잔뜩 그을린 엘리사가 혀를 삐쭉 내밀었다.
"이건 실전이 아닌데. 에베베."
허리를 굽혀 박살 난 빨간 안경을 쥔 에이베스가 등을 돌려 걸어갔다.
결국 여섯 명을 연달아 상대하고, '체내 칠흑 격화' 상태를 유지해 라이프 게이지가 계속 떨어지던 에이베스가 먼저 당하고 만 것이다.
"수고했어! 에이베스!"
"최고야!"
다음 차례의 3학년 동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 명은 그녀에게 물통을 건넸고, 다른 한 명은 겉옷을 벗어서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2학년 Top10은 어땠어?"
동기 하나가 물었다. 잠시 물을 마시던 그녀가 힐긋 엘리사 쪽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1년, 지금 저기서 경험과 실전역량이 더해진다면......."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 같은 건 우러러보기도 힘든 높은 곳에 서겠네."
"응?"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다음 경기가 시작되었고, 엘리사 셀린은 다음으로 나온 3학년에게 1분 만에 탈락했다.
* * *
2학년들은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6 대 1.
3학년 한 명을 잡기 위해 2학년 여섯 명을 소모했다. 그야말로 참담한 완패였다.
황금세대.
미래의 샛별.
성녀 사태와 혈천교 사태를 모두 경험한 기수.
초호화 담당교수진.
2학년 2학기까지 360명이 살아남은 엘리트 기수.
에프넬을 무너뜨릴 미래의 창.
2학년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평가하는 찬사를 받고 들떠 있었다. 반면 에이젤이 나가고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는 3학년 기수들과 어떻게든 순수 실력으로는 비벼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가장 많은 것들을 배운다는 2학년 2학기를 거치고도, 키젠에서 1년 더 머무르고 말고는 역시나 어마어마한 격차였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는데.
-얼굴을 못 들겠다.
2학년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나마 마지막 엘리사의 분투로 에이베스를 잡지 않았더라면, 3학년 한 명에 2학년 여섯 명이 연달아 당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뻔했다.
그나마 그것만큼은 면해서 체면치레를 한 정도. 사기가 극도로 떨어진 건 사실이었다.
"쓰으으읍, 분위기가 완벽하게 저쪽으로 넘어가 버렸네."
딕이 골치 아프다는 듯 말했다. 시몬은 조용히 3학년 관중석을 보고 있었다.
저쪽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특히 소타 프쉬케가 신이 나서 발락 옆에서 떠드는 모습이 상당히 보기 불편했다.
"다, 다음 경기에서는 꼭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카미바레즈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작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단체시험에서 우리 329기의 저력을 확인했잖아요! 지지 않아요!"
"맞아, 카미!"
메이린도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딕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조건 이겨야지. 근데 다음 경기마저 지면 그냥 4연패 확정이야. 그냥 애들 이길 의지가 죄다 꺾여 버릴......."
"쪼옴."
메이린이 눈을 흘기자 딕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본부 직원은 다음 경기내용을 뽑아 공중에 날리고 있었다. 사회자 콘라드가 외쳤다.
"다음 경기 내용은 '고지 점령전'입니다!"
고지 점령전은 경기장 끝에 떨어진 네 개의 점령지를 모두 점령하는 팀이 승리하는 간단한 룰이었다. 고지는 마법진으로 대체되며, 마법진 위에 1분간 올라가 있으면 점령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경기는 정예 10명 단체전! 전체 50위권에 들어간 학생들 중에서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2학년부터!"
가장 긴장되는 순간.
본부 직원이 뱀의 입으로부터 명단을 꺼내 던졌다.
"2학년 팀 첫 번째 학생은......!"
공중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한 콘라드가 큰소리로 외쳤다.
"메리다 휴 이켈입니다!"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던 2학년 학생들이 그 이름을 듣고는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제 분위기였던 3학년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돌렸다.
이 모든 사태의 시작.
이불을 어깨에 두른 민트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잔잔한 분노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