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67화
꾸르르르륵.
산사태처럼 무너져내린 맹독의 진창 속에서, 발락이 좀비처럼 기어 나오고 있었다.
-키잉! 키이잉!
시몬의 품에 안겨 있던 데스나이트가 그 모습을 보고 바둥거렸다. 시몬이 데스나이트를 내려주자마자, 바로 그를 뒤로 밀면서 주인을 지키듯 앞을 가로막았다.
'......발락.'
시몬은 고개를 돌려 전광판 쪽을 바라보았다.
주위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맹독의 폭풍 때문에 발락의 라이프 게이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수치보단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전신에 구정물 같은 칠흑을 줄줄 쏟아내며 몸을 일으키고 있는 발락은 거의 악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죽여주마.]
발락이 제 입을 막고 있는 철제 마스크를 붙잡는 순간, 위협을 느낀 데스나이트가 먼저 바닥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뭐라도 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데스나이트! 위험해!"
부웅!
데스나이트가 빛살처럼 돌진해서 발락의 몸을 오러블레이드로 베어버렸다.
그러나 발락의 몸은 텅 빈 독극물로 변해 무너져 내렸다.
-키잉.
당황한 데스나이트가 뒷걸음질 쳤다.
방금 벤 건 독으로 형체를 빚은 더미. 진짜 발락은 그 뒤에 무너져내린 맹독갑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가 손짓하자 산만 한 액체 쓰레기 더미가 솟구쳐 데스나이트를 덮어버렸다.
데스나이트는 다급히 배리어를 펼쳤지만, 발락이 그 상태에서 흑마법을 시전했다.
<포이즌 사이클론>
쿠콰콰콰콰콰!
맹독이 계속해서 회전하면서 데스나이트를 붙들어놓았다. 발락은 저벅저벅 한쪽 다리를 절며 시몬에게 다가왔다.
"당신......!"
시몬이 진땀을 흘렸다.
아까 오러블레이드에서 베인 자리에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이 정도 상처라면 결투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호 배리어가 완전히 뚫린 것 같았다.
즉. 이미 발락의 라이프 게이지는 0이 됐고, 이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뜻.
그런데도 그는 시몬에게 살의에 가까운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눈깔이 반쯤 돌아간 게 정상이 아니었다. 진흙탕 싸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죽어라.]
그가 입에 낀 철제마스크를 붙잡자 파스슥! 소리와 함께 녹아내렸다. 이내 그가 입을 우악스럽게 벌리더니, 새까만 벼락을 엮어 빚은 듯한 '죽음의 뱀'을 쏘아 보냈다.
<암서(暗書)>
시몬의 눈이 커졌다.
'왔다!'
맞는 즉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끔찍한 금기.
시몬은 즉시 옷 안으로 손을 넣어 그리모와르에게 받은 목걸이를 작동시켰다. 목걸이가 흔들리며, 처음에 봤던 그 특수한 막을 전면에 펼쳐냈다.
'제발 막혀라!'
쿠르르르르릉!
죽음의 뱀이 그 막에 부딪혔다.
그리모와르의 말대로였다. 정말로 암서가 막을 타고 흘러가더니 애꿎은 바닥에 파고들었다.
'좋아! 성공했......!'
그러나.
첫 번째 암서를 완전히 다 막기도 전에, 발락이 발사한 두 번째 암서가 날아오고 있었다.
'연사라고?'
발락은 이미 이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두 번의 암서를 연달아 쏘아 보낸 것이다.
이건 위험했다. 시몬이 다급히 몸을 날렸지만, 두 번째 암서는 그리모와르의 방어막을 완전히 깨부수고도 전진해 도망치는 시몬의 몸에 부딪혔다.
"!!"
격통이 뇌를 때린다.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고 세상이 뒤흔들린다. 입에서 피가 왈칵 솟구치고, 전신에 몸이 빠진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
시몬이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의식이 따라잡지 못했다.
이게 죽음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쓰러지려는 순간.
덥석.
무너지는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시몬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발락에서 공격에서 빠져나온 백은의 기사가 시몬의 옆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우웅-
데스나이트가 괜찮냐는 듯 물었다. 다른 한 손에 깃발에서 칠흑이 역십자 형태로 폭포처럼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콰콰콰콰콰콰!
터져 나오는 역십자가를 멍하니 보고 있는 시몬은, 순간 몸의 변화를 느꼈다. 꼬였던 혈관과 핏줄이 되돌아오고, 전신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완화되며, 서서히 몸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비아 돌로로사는 데스나이트가 깃발을 작동시킨 시점에서 '무적'에 가까운 절대적인 복구능력을 부여한다.
이는 깃발이 가까워질수록 효과가 강해지며, 무엇보다 데스나이트뿐만 아니라 술사에게도 적용된다.
'암서에 맞기 전에 깃발을 켜줬구나!'
술사와 소환수 모두 어마어마한 양의 칠흑과 에너지가 소모됐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시몬의 변화를 눈치챈 듯, 발락의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어떻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죽음에서 되살아났나.]
시몬은 힘겹게 웃는 얼굴로 데스나이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거의 죽었다 살아났기에 간신히 설 수 있을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암서에 맞고도 서 있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발락은 거대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평생을 믿고 있던 초월적 존재가 눈앞에서 부정당한 신도의 모습이 이러할까.
그가 발작하듯 몸을 뒤틀며 소리 질렀다.
[죽어라! 죽음은 절대적이다!]
그가 입을 벌리고 세 번째 암서를 쏘아 보냈다. 시몬은 이번에도 맞을 각오를 하고 눈을 감았지만 데스나이트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데스나이트!"
꽈르르르르르릉!
데스나이트가 시몬 대신 암서를 맞았다.
입고 있던 은백색의 데드아머가 단번에 박살 나며 데스나이트의 몸뚱이까지 암서의 힘이 파고들었다. 사념으로부터 커다란 충격이 전해져 왔다.
언데드는 생과 사의 경계에 걸친 존재인 만큼, 암서에 대한 내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서가 가진 본연의 파괴력이 워낙 막강했다. 직격한 데스나이트는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파직. 파직.
물론 암서를 사용한 발락도 정상은 아니었다. 암서를 사용할 때마다 신체가 붕괴하는 것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머리털이 빠지고, 눈과 코와 입, 온몸의 구멍에서 검은 피를 줄줄 흘려댔다. 하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해하지 마라!]
발락이 옆으로 움직여 암서를 쏘아 보냈다.
그는 노골적으로 집요하게 시몬만을 노리고 있었다.
'크윽! 대체 몇 발까지 쏠 생각인데?'
시몬은 이번에야말로 맞을 각오를 다졌지만, 데스나이트가 시몬의 어깨를 붙잡더니 빙글 몸을 돌려 자신의 등을 다가오는 암서에 내주었다.
꽈르르르르릉!
시몬의 동공이 연신 흔들렸다.
'데스나이트! 왜 이렇게까지......!'
소환형 언데드가 제 의지로 주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번거로운...... 망자 따위가!]
발락도 목에서부터 가슴까지 멍이 든 것처럼 시꺼멓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다시 시몬에게 암서를 날리려고 했다.
그사이, 데스나이트가 시몬을 보호하듯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데스나이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딸칵. 딸그락.
그의 뼈대가 여러 파츠로 떨어져나오더니 시몬의 몸에 달라붙으며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몬은 익숙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이건.......'
이론상 불가능한 건 아니다. 다른 스켈레톤으로도 가능한 건데, 굳이 데스나이트를 입는 건 효율이 크게 떨어질 뿐이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암서로부터 시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이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콰콰콰콰콰콰!
이미 발동 중인 상태인 '비아 돌로로사'의 효과가 더더욱 강해졌다. 데스나이트를 입은 시몬은 갑자기 몸이 백은색으로 뒤덮여 가는 것을 느꼈다.
화아아악!
방금 파괴되었던 데드아머가 비아 돌로로사의 효과로 복구되는 것이다. 시몬이 데스나이트를 입은 상태였기에, 데드아머는 시몬을 기반으로 갑주의 형태를 재구축하고 있었다.
손을 들어 올리니 어느새 팔이 매끈한 은백색의 건틀릿으로 덮여 있다. 이어서 부츠와 흉갑을 지나 얼굴까지 투구가 씌워진다.
'아.'
새로운 백은의 기사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에 솜털이 치솟고, 정체 모를 고양감이 차오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데스나이트의 본 아머로 무장한 것 그 이상의 기분이 들었다.
'하, 하지만 데스나이트. 이러면 네가 오러를 쓸 수가.......'
-키잉.
데스나이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해보라는 건가?
시몬은 떨리는 손을 움직여 허공을 뻗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아니라 물에 손을 넣은 것처럼, 뭔가 묘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시몬은 그것을 부드럽게 붙잡고, 천천히 잡아당겼다. 시몬의 손등과 손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데스나이트의 뼈들이 시몬의 손을 함께 당겨주는 것처럼 느꼈다.
파직! 파직!
허공에 로즈색 불똥이 튀어 오르더니, 이내 그의 손에 일렁이는 오러블레이드가 붙잡혔다.
'됐다!'
손끝이 찌릿찌릿 떨린다.
이제는 시몬이 데스오러라는 또 하나의 힘까지 정복한 순간이었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그러고는 오러블레이드에 집중했다.
'내가 더 잘 쓸 수 있는 형태로!'
콰콰콰콰콰콰콰!
데스나이트의 오러블레이드가 묵직하게 커지더니 이내 거대한 대검의 형태로 변했다. 시몬은 한 손엔 대검을, 다른 한 손엔 깃발을 붙잡은 채 발락을 노려보았다.
'데스나이트, 깃발의 컨트롤은 맡길게.'
데스나이트의 사념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전투는 이쪽이 리드한다.
[그 어떤 괴팍한 짓을 하든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발락이 입을 벌리고 다시 암서를 날려 보냈다. 시몬은 즉시 지면을 딛고 뛰었다.
데스나이트의 힘을 이용해 고속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암서는 눈이 달린 것처럼 시몬을 집요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파지지직!
그러는 사이 발락이 입을 벌리고 두 발째 암서를 쏘아 보냈다.
총 두 발의 암서에 쫓기고 있고, 곧 따라잡힐 것이다. 그때 원을 그리듯 달리던 시몬이 몸을 격렬히 회전시키며 오러블레이드를 휘둘렀다.
파드드드드득!
첫 번째 암서가 오러의 대검에 휩쓸렸다.
그 와중에 뻗어 나온 몇 줄기가 갑옷을 때리긴 했지만 시몬은 신경 쓰지 않고 허리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전방으로 다가오는 두 번째 암서를 향해, 검으로 붙잡아 둔 첫 번째 암서를 때려 박았다.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두 암서가 서로 충돌했다. 그 반동으로 튄 에너지 때문에 시몬도 타격을 받았고, 갑옷이 절반쯤 박살 나긴 했지만 정면충돌은 피했다.
'지금!'
터어어엉!
시몬이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었기에 순식간에 발락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그 무엇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제는 전신이 망가지다 못해 새까맣게 변한 발락이 마지막 암서를 쏘아 보냈다. 이에 시몬은 오러블레이드를 앞세운 채 몸으로 받아냈다.
콰아아아앙!
이번에는 정면충돌. 일직선으로 쏘아진 암서에 데드아머가 가루가 될 정도로 박살 났다.
후웅!
훙!
그러나 바로 이 순간.
기다렸다는 듯 몸이 둘로 분리되었다. 시몬은 오른쪽으로, 본 아머 상태였던 데스나이트는 왼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둘은 한 손에 오러블레이드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죽음 따위!"
-키잉!
시몬과 데스나이트의 눈이 번뜩였다.
"극복할 수 있는 난관이야!"
쩌어어어어어어어엉!
시몬과 데스나이트가 좌우에서 발락을 스치듯 지나며, 오러블레이드를 휘두른 채 뻗어 나갔다. 발락의 양 가슴과 어깨에 X자로 커다란 피분수가 솟구쳤다.
"하아, 허억."
시몬이 뒤를 돌아보았다. 발락의 암서는 멈추었고, 마지막까지 암서의 피해를 재생한 '비아 돌로로사'의 효과도 이제 꺼져갔다.
쿵!
마지막으로 발락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진짜 아슬아슬했네.'
땀과 피로 흠뻑 젖은 시몬이 힘겹게 고개를 젖혔다.
데드아머는 다시 재생을 시작하며, 본래 주인인 데스나이트의 몸을 덮어갔다.
"수고했어. 데스나이트."
오러를 꺼트린 시몬이 악수하듯 데스나이트에 손을 내밀었다.
톡.
그러자 데스나이트는 시몬을 끌어당겨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수고했다는 듯 어깨를 두들긴 시몬은 비로소 데스나이트의 전원을 끄고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이제야 좀 숨이 잘 쉬어졌다.
'그나저나.'
시몬의 눈가가 예리해졌다.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도 말리러 오지 않는 거지?'
발락과의 싸움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느라 주변을 볼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주위는 음울하고 고요하게 바뀌어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발락은 라이프 게이지가 0이 되어서도 계속 싸웠다. 이렇게까지 전투가 심화될 정도면 누군가 말려야 하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심판은 자리에 없었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관중석에 사람들이 없어.'
결계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는 불길한 빛이 일렁였고, 하늘은 물감을 엎지른 듯한 어지러운 색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시몬은 이런 풍경을 최근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설마.'
푸드덕- 푸드덕-
경기장 곳곳에 올빼미들이 날아와 자리 잡았다. 주위에는 피를 흥건히 흘리며 쓰러진 발락과 시몬, 그리고 데스나이트뿐이었다.
"기다렸다. 설마 발락이 질 줄은 몰랐지만."
뚜벅 뚜벅.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당신은......!"
시몬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게 됐구나. 시몬 폴렌티아."
어두워진 경기장에 난입한 건 3학년 전체 2위.
그리모와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