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68화
난데없이 경기장에 난입한 건 3학년 전체 2위, 그리모와르였다.
"이게 무슨 꼴인가요. 발락."
그녀가 손짓하자, 쓰러져 있던 발락의 몸뚱이가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암서 특유의 검은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녀가 재차 손을 휘두르자 공중에 철제 마스크 비슷한 게 나타나 발락의 입가에 씌워졌다.
"일종의 '부모'로서, 방치할 수는 없겠죠."
이때 시몬이 목소리를 냈다.
"그리모와르 선배님. 당신이 왜......."
"여기 있냐는 물음?"
그녀가 시몬을 응시했다. 어깨와 팔에 푸드덕하고 올빼미 몇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눈치챘다시피 여긴 '내가 만든 공간'이다. 엄연히 말하면 내가 이 공간에 있는 건 당연하고, 너와 발락이 침입한 거지."
그 말을 들은 시몬은 비로소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감이 잡혔다.
'......예전에 레오나드 선배님과 같이 갔던 그 도서관.'
그리모와르는 키젠 교수들도 왔다 갔다 하는 '키젠 중앙 도서관'에 당돌하게 공간 이능을 걸어놓고, 그 안에 틀어박혔던 인물이다.
아마 그 공간을 경기장까지 확장한 뒤, 시몬과 발락을 들어오게 한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키젠의 탐지마법에 걸리지 않고, 원하는 상대만 영역에 들어오게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언제 이리로 들어오게 된 거지? 아무런 낌새도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시몬이 흠칫하며 그리모와르가 준 목걸이를 꺼내 보았다.
원래는 보호막을 펼친 뒤에 망가졌어야 할 목걸이가 희미한 붉은빛을 내고 있었다.
"그래, 그게 열쇠다. 발락의 암서를 막은 건 부가적인 능력에 불가하다."
그리모와르가 말했다.
"왜 나를 이리로 데려온 거죠?"
"널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다. 그분께 데려가기 위해."
"그분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쪽에서 직접 찾아오면 될 텐데요."
"나는 명령 받은 바를 수행할 뿐이다."
예상은 했지만.
시몬은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그녀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신, '결사'지?"
"그렇다."
이번에도 그리모와르는 부인하지 않았다. 전에 저주인형을 썼냐고 추궁했을 때 그렇다고 답한 것처럼.
'......처음부터 날 노리고 접근한 건가? 그게 아니면-'
시몬의 시선이 잠시 너덜너덜해진 발락 쪽으로 향했다.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닐 거다."
그리모와르가 말했다.
"그분이 있는 곳으로 가자."
"거절합니다. 내가 결사와 할 이야기는 없어요. 이런 방식으로 초대한다면 더더욱."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힘으로라도 데려가는 수밖에 없다."
휘이이이이이이이잉!
주위로 불길한 바람이 불어오며,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는 후드가 넘어갔다.
긴 머리와 함께 엘프처럼 뾰족하고 길쭉한 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불길한 올빼미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크윽.'
이 사람, 강하다.
불길하고 짙은 칠흑의 파장에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마지막 제안이다, 시몬 폴렌티아. 네게 손을 대고 싶지는 않다."
"......."
"냉정하게 생각해라. 전체 1위를 쓰러트리고, 바로 2위인 나까지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하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인다만."
"그야 내 힘만으로는 힘들겠지만."
시몬은 아공간을 열자, 그 안에서 해골 투구 하나가 휙 날아와 시몬의 손에 잡혔다. 시몬은 그것을 천천히 얼굴에 쓰며 말을 이었다.
[내게는 군단이 있어.]
촤르르르륵!
아공간에서 무수한 뼈들이 날아와 시몬의 몸을 빠르게 덮어가기 시작했다.
무형의 망토가 자리 잡고 뼈의 갑주가 무너져 가는 전신을 든든히 지탱했으며, 마지막으로 공중에서 날아온 파멸의 대검이 척! 하고 시몬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배신의 군단장."
그제야 그리모와르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어렸다.
"시몬 폴렌티아, 네가 배신의 군단장이었구나. 결사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였는데."
혈천교의 계략을 막은 장본인.
타라도스의 해방자.
빙룡 카리사 사태의 방해자.
상아탑 계획의 불청객.
네프티스 시간여행의 최대 변수.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건들. 결사는 대륙 전역에 깊게 뿌리내린 집단이었고, 시몬은 지금까지 그들의 계획을 몇 번이고 물거품으로 만든 당사자였다.
결사의 입장에선 가장 없애고 싶은 사람 중 하나이리라.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결사와 연관된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겠어.'
시몬이 자세를 낮추고 파멸의 대검을 붙잡았다. 피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선명히 울려 퍼졌다.
[크흐흐! 소년! 움직일 수 있겠나?]
'솔직히 서 있는 정도가 최선이에요.'
[그렇다면 내게 맡겨라!]
몸 곳곳에서 피어의 뼈들이 시몬을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시몬도 피어에게 몸을 맡겼다.
터어어어엉!
이내 지면을 박차고 시몬의 몸이 돌진했다. 그리모와르는 급히 손바닥을 펼치며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카아아아앙!
그녀의 정면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휘둘러진 파멸의 대검이 막혔다.
"이건!"
이내 서서히 공간이 우그러지며 대검을 빨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시몬이 대검에 힘을 주어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그리모와르가 올빼미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기절한 발락도 함께 데려갔다.
"도망치는 거냐!"
시몬이 소리쳤다.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점점 멀어지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명 높은 배신의 군단장은 대단히 강대하다지? 내가 이길 수도, 네가 이길 수도 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흐릿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결사에서 오고 있을 내 동료들이 널 이길 거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잠시 동안만 이곳에 갇혀 있도록 해라.]
"그리모와르!"
시몬이 힘주어 파멸의 대검을 빼냈다.
"놓치지 않아!"
[나를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근처에 네 친구가 죽어가고 있다.]
'뭐?'
쿨럭!
그때 어둠 저편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시몬의 귀가 쫑긋했다.
'이 목소리는!'
시몬은 그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도망치는 그리모와르를 계속 쫓을지 고민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어둠 속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시몬은 무리한 추적은 포기하고 목소리를 쫓아 달렸다.
쿨럭 쿨럭!
"아!"
그곳에는 복부에 커다란 말뚝 같은 게 박힌 채 피를 흥건히 흘리며 쓰러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카쟌!"
카쟌은 입에서 피거품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이 온통 피로 젖어 붉게 물들어 있는 게, 이미 그리모와르에게 크게 당한 것 같았다.
"카쟌! 정신 차려요! 카쟌!"
"......아직, 안 죽...... 었다."
카쟌이 긴 숨을 몰아 내쉬며 말했다.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바닥에 꽂고 자리에 앉았다. 피가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 바닥에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내 손을 움직여 ...아공간을 작동시켜라. 그 안에서 포션 몇 개를......."
시몬은 카쟌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아공간에서 가방을 꺼냈고, 그 안에 있는 포션을 닥치는 대로 상처에 부었다. 조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카쟌은 복부에 박힌 커다란 말뚝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마취라도 하고......."
우드득!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카쟌이 생으로 말뚝을 뽑아낸 것이다.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지만 개의치 않다는 듯 포션을 부었다.
"이 몸뚱이는......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캬잔은 몇 번 까무러쳤다가 정신을 차기기를 반복했다. 계속해서 정체불명의 포션을 부으며 몸을 회복시킨 그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
"대체 어떻게 카쟌이 여기까지 들어온 거예요? 그리모와르의 초대를 받은 것도 아닐 텐데......."
뒤이어 시몬은 카쟌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당시 카쟌이 소속된 도둑길드는 '발락에게 소식을 전하러 갔다가 실종된 하수인'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길드원이 발락의 임무지역에서 박살 난 의수를 발견했다. 그 의수는 독에 완전히 녹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도둑길드는 즉각 그 의수를 조사했다.
그 결과 그 의수에 적용된 기술과 흑마법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건 최근 발견된 결사의 인공괴물들과 같은 성분이었다."
"아!"
"그렇게 발락이 결사와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도착하니 네 결투가 막 시작되려고 하던 참이었다. 대기실에 들어가서 네게 경고할 생각이었는데."
카쟌이 눈을 감았다.
"그전에 그리모와르에게 들켜서 이 공간에 갇히게 된 거다."
그러고 보니, 대기실에 그리모와르가 왔던 게 기억났다.
그전에 이미 카쟌을 자신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쓰러트린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갇힌 게 아니라 갇혀준 셈이다만."
"네?"
카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새로운 임무다. 준비해라, 시몬."
* * *
예상치 못한 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다.
하수인들은 발락의 흑마법으로 결계가 파괴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대처했지만, 자욱한 독연기 때문에 도저히 내부의 상황을 살필 수 없었다.
학생들도 빅매치가 이렇게 되어버리자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쳤다. 그나마 확인할 수 건 전광판의 라이프 게이지뿐.
이내 시몬보다 발락의 라이프 게이지가 먼저 0%가 되며, 학생들이 큰 소리로 환호했다.
-지, 진짜로 시몬이 이겼다!
-내일부터 학생회장은 시몬 폴렌티아야!
그러나 학생들이 축제 분위기인 것과는 달리, 내부 상황은 긴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심판, 응답하세요! 심판!
경기장 내부에 있어야 할 본부 직원이 응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권한을 가진 심판이 경기를 종료해야 후속 조치를 취할 수 있었기에 프로세스가 막혀 버렸다.
키젠본부의 직원이라면 일개 서무원이라도 하나같이 최상위권의 네크로맨서. 그런 자가 맹독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결국 답답한 일처리에 보다 못한 제인이 나섰다.
-학생들을 긴급 대피시키고 결계 내부의 독을 빼낼 준비를 하겠습니다.
발락이 뿜어낸 맹독과 가스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대로 결계를 해제하면 로크섬 전역으로 독안개가 퍼져나갈 테고 학생들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사실상 결계를 걷어버리기에는 학생들이 볼모로 잡혀 버린 셈. 제인은 신속히 관중석에 남아 있는 학생들을 피난시켰다.
-경기장의 3차 결계를 펼친 뒤 내부 상황을 확인하도록 하세요.
-제, 제인 교수님!
시설 하수인이 즉각 보고해 왔다. 3차 결계가 누군가에 의해 손상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사고가 아니라 완벽하게 계획된 사태다. 제인은 상황의 심각함을 느끼고 다음 지시를 내렸다.
-교내 맹독술사를 모두 불러 모으세요. 교수들, 조교들, 하수인들, 3학년 이상의 맹독학과 학생들을 집합시켜 독을 빨아들여 중화하겠습니다. 별야 교수님은 내부의 상황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나한테 맡겨!
어떤 독에도 면역을 가지고 있는 별야는 결계를 살짝 걷은 사이, 결계 내부로 들어가 상황을 살폈다. 그사이 맹독술사들이 모이고 독을 중화할 준비를 마쳤다.
제인이 통신 수정구를 붙잡고 별야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별야 교수님, 어떻게 됐습니까?
-뭐야 여기. 아무도 없어! 심판 아저씨랑 발락, 우리 귀염둥이도 없는데?
제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상정할 수 있는 상황이 너무 많다.
신성연방? 결사? 키젠 내부의 적? 반 키젠파? 왕국 간 알력다툼? 중립세력?
차라리 영문을 몰라 답답함을 느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같은 편부터 의심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개탄스러웠지만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였다.
-중화작전 개시.
이내 경기장의 결계가 걷히고, 불려온 네크로맨서들은 일제히 해독마법을 사용하거나, 바람을 일으켜 가스를 가두는 등 자신만의 방법으로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유독물질을 막았다.
조금씩 경기장 내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인 교수님."
그때 한 하수인이 은밀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바로 옆에서 지나다녀도 다른 하수인들이 모르는 걸 보니 은폐마법 같은 걸 따로 사용한 것 같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물가의 여우는-"
"새벽에 다섯 번 운다."
제인이 한결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믿을 수 있는 네프티스 측 네크로맨서들만의 암호어였다.
"델타원, 카쟌으로부터 연락입니다."
"......."
귓속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역시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키젠은 내외로 적이 많았고, 누가 저지른 일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가정들이 물러나고 단 하나의 적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적'이 덫에 걸렸다.
"학생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기숙사로 보내도록 하세요. 두 학생 모두 무사하고 시몬 폴렌티아 학생의 승리가 확정되었다고 전하도록 하십시오."
"예."
그녀가 일반 통신으로 쓰는 수정구는 내려놓고, 품에서 새빨간 통신 수정구를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교류전 이벤트는 종료, 결사 섬멸 및 본거지 추적 작전을 개시합니다."